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34화 (134/218)

< 뒤끝이 길면 (4) >

사냥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알 것 같다. 덫에 걸린 짐승은, 꼭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엄살을 부리던 박 감독이 펄떡거렸다.

“그게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내가 뭐라고 했다고?”

“내가 장담하는데, 남조윤 씨 일로는 절대 W&U 도움 못 받아. 라고 하셨죠.”

박 감독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요.”

“뜻은 무슨! 급해서 그냥 막···! W&U랑은 상관없는 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황해선지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된다. 켕기는 얼굴. W&U랑은 상관이 없다는 건, 오히려 큰 상관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뭐지? 뭐가 있길래 남조윤은 W&U 도움은 절대 못 받을 거라고 장담할까?

W&U에 남조윤이랑 엮인 게 있는 사람. 그것도 안 좋은 쪽.

딱 한 사람 떠오르는데.

생각해보자.

만약, 자기가 팽개친 배우가, 그것도 싫어하는 내가 들이민 배우가 비중 있는 배역을 잡았다는 걸 알았다면. 거슬렸을지도 모르지. 그 배우가 뜨기라도 하면 본인 안목이 틀린 게 되니까.

허리를 굽혀 박 감독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저희 2팀장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박 감독이 흠칫 놀란다. 눈동자가 바쁘게 흔들렸다.

자백이나 다름없는 반응이다.

“그분, 아시죠? 이번 일에···.”

“내가 영화감독인데 W&U 팀장님들이야 다 알죠!”

내 말을 뚝 자르며 박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뭔가 황당한 오해를 하나 본데, 내 말은 W&U가 자기 식구들도 많은데 상관없는 남조윤 씨까지 챙기겠느냐는 뜻이었어요! 아니, 이런 것보다, 계약, 계약 건부터 빨리 정리하고···!”

정색하고 말을 돌리는 것이, 순순히 뭘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기야 겨우 실장인 나보다야 2팀장이 더 무섭겠지.

말마따나 여긴 좁은 바닥이니까.

“······.”

말없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 입을 열 수 있을까.

부탁. 설득. 이런 건 먹힐 것 같지 않고.

협박?

장담할 순 없지만, 시도해볼 만은 하지. 때마침 시기적절하기도 하고.

문득, 심경택 선생을 협박했던 일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그 뒤로 펀치라인의 랩 하던 멤버를 협박했던 때는 좀 더 쉬웠고.

“그···.”

막 입술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손아귀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곁눈질로 화면을 봤다가 멈칫했다.

이송하.

순간, 무언가 덜컥 멈춘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머릿속에 한 줄기 바람이 흘러들었다.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데 다른 쪽 팔이 덥석 붙잡혔다. 박 감독의 목소리가 귓속을 찔렀다.

“진짜 무릎 꿇을까? 어? 말만 해요!”

“그만해, 박 감독! 사람 난처하게 왜 이래!”

김판석 대표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박 감독의 어깨를 붙들었다.

“얘기 잘 돼가고 있는데 왜 그래요, 대표님!”

“잘 돼가긴! 남조윤 씨는 다른 작품 얘기 중인 게 있다잖아!”

“어떻게 잘 조율하면 되는 거고! 조윤 씨, 영화 계속할 거죠? 어?”

박 감독이 이번엔 남조윤의 팔을 잡아챘다.

촬영 식구들의 생계 운운에, 남조윤은 마음이 약해진 건지 먹구름이 낀 얼굴로 말했다.

“못합니다.”

목소리만큼은 단호하다.

“조윤 씨!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 아니란 거 알잖아요! 조윤 씨가 기회 잡았다고, 오늘 아침까지 식구였던 딱한 사람들, 다 외면할 거예요?”

박 감독이 김판석 대표의 팔을 뿌리치며 몇 번을 더 물었지만, 남조윤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감독님.”

기대에 찬 눈빛이 내 쪽으로 홱 돌아온다.

“말씀하신 것처럼 남조윤 씨가 아직 무명 신인이라서요. 겹치기 촬영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감독님 작품 잘 되시길 빕니다.”

나를 보는 박 감독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진다.

지금 내 얼굴은 어떨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개새끼들! 내 영화 투자에 문제 생기면, 다 너희 때문이야!”

“박 감독! 이 자식이 정말! 선우 씨, 이만 가봐요!”

판 프로덕션 직원들에게 붙들린 박 감독이 저주를 쏟아냈다.

“이러고 가서 어디 잘되나 보자! 어!”

잘 될 겁니다. 꼭.

속으로 되뇌며, 문을 닫았다.

***

기다란 손끝이 소파의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이윽고 백한성 대표가 시놉시스에서 시선을 뗐다.

“작품 괜찮네, 이걸로 가자.”

“네, 대표님.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2팀장이 냉큼 대답했다.

볼일은 끝났지만, 그는 반쯤 남은 홍차를 마시는 척하며 백한성 대표의 낯빛을 살폈다.

2팀장이 말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본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어째 복덩이 이놈은 허구한 날 연예란에 뜨는 거 같아요? 누가 연예인인지 모르겠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선우 그놈 말이에요.”

2팀장이 꼬리를 물고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SBE 필름에 스케줄 픽스하러 가면서, 배우 하나 데려간 거 아세요?”

“3팀장이 아까 얘기했어. 복덩이가 꽂힌 친구라던데.”

“아무리 자기 담당 배우 작품이래도 그렇지, 회사 일인데. 우리 식구도 아닌 생판 남을 제멋대로 데리고 다니는 건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팀이었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이거.”

“W&U 일 아니라고 직접 못 박았다는데 뭐. 필사적인 게 귀엽잖아.”

“귀엽긴. 어쨌든 공사구분을 못 하잖아요.”

2팀장이 학을 뗐다.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본부장이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복덩이한테 관심이 많으냐.”

“걱정되니까 그러죠. 제가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이놈 이렇게 제멋대로 풀어놓으면, 나중에 분명 대형사고 한번 친다니까요.”

“그놈의 대형사고. 치고 나서 얘기해. 치고 나서.”

2팀장이 못마땅한 티를 다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었을 때.

“그 친구는 어땠어?”

백한성 대표가 툭 던지듯 물었다.

“누구요?”

“정선우가 꽂힌 배우. 2팀장이 직접 면접도 봤었다면서. 어땠어?”

“그··· 남조윤이라는 친군데.”

2팀장이 엉거주춤 선 채로 말했다. 헛기침이 섞였다.

“독립영화 오래 했던 배우라 연기는 나쁘지 않았는데요. 그게 다였어요. 배우의 아우라라고 할까, 그런 특별한 게 없어서. 우리가 전속계약으로 잡아둘 만한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백한성 대표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2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친구만큼 연기하고, 그 친구보다 어리고, 비주얼도 좋고, 가능성 있는 무명 배우들 많습니다. 이번에 새로 계약한 신인들만 봐도 그 친구보다 훨씬 나아요.”

확신하듯 말한 2팀장이 덧붙였다.

“저 보는 눈 확실하잖아요. 대표님, 제 안목 못 믿으세요?”

“어이구, 박도진이 인성 참 좋다던 그 안목?”

“본부장님! 그 얘기는 왜 또, 내가 봤을 때만 해도 걔 괜찮았어요!”

“그래, 그렇다고 쳐.”

본부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팀장이 벌게진 얼굴로 백한성 대표를 바라봤다.

“한 명은 어떤 배우한테서 뭔가를 봤고, 다른 한 명은 못 봤고.”

백한성 대표가 느긋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궁금하네. 누구 안목이 진짠지.”

***

“실장님.”

고개를 돌렸다. 남조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낯빛이 별론가 보다. 남조윤이 어색한 손길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괜히 제 일에 휘말려서, 하루종일···.”

“이 경우에는 남조윤 씨 일이 제 일이죠. 그리고···.”

남조윤이 겪은 수모에 2팀장의 입김이 닿았을 가능성은,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오늘 같은 날 안 좋은 이야기를 하나 더 얹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지나간 일 말고, 이제 이거에 집중해야죠.”

남조윤에게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최성원 감독의 신작 영화 시나리오다.

남조윤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양손으로 서류봉투를 받는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핏줄이 불거진 손이 봉투를 꽉 쥐었다. 비장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어디 한번 잘 돼봐요, 우리.”

“네?”

서류봉투에 시선을 박고 있던 남조윤이 날 바라본다.

나는 입 끝을 올리며 말했다.

“보란 듯이 잘 돼 보자고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하겠습니다.”

“죽으러 가요? 마지막은 무슨.”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셨었죠.”

고개를 갸웃했더니, 남조윤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 찾아와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셨던 날. 실장님 본인 안목이 쓸만한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그랬었죠.”

“그러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할 겁니다. 더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결의에 찬, 곧은 눈길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요. 실장님 소리 그만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럼···.”

“말 놓으세요, 형.”

남조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곧, 그가 마주 웃었다.

*

남조윤을 데려다 주고 회사로 들어갔다.

커피를 사 들고 5층 홍보팀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송하한테 회의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놓고는, 정신이 없어서 아직 연락을 못 했다. 부재중 목록에 떠 있는 이름을 꾹 눌렀다. 로밍 중이라는 알림과 함께 신호가 이어졌다.

바쁜가?

늘 신호가 두어 번 울리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렸는데. 이번엔 신호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다시 전화해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가 좀, 듣고 싶었는데.

이관우나 이태희한테 전화해볼까 하고 전화번호부를 눌렀을 때였다.

“우리 회사에서 네가 제일 바쁜 거 같다.”

우뚝 멈췄다.

맞은편에서 2팀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게요. 좀 바쁘네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태연히 말했다.

“박 감독님 얘기 들어보니까, 팀장님도 꽤 바쁘셨던 것 같던데요.”

“······박 감독?”

고개를 갸웃하며, 2팀장이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박 감독이 나에 관해서 얘기할 게 없는데?”

모른 척은.

분명히 봤다. 찰나 간, 저 작자의 눈동자에 파문이 이는 것.

나도 모르게 입 끝이 비틀렸다. 머릿속에 독이 퍼지는 느낌이다.

그러다 불현듯, 얼마 전에 본 미래가 떠올랐다.

2팀장의 사진을 보고 미래의 내가 ‘팀원’이라고 말했던 장면.

그걸 보고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원래의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2팀장과 팀을 만든 걸까. 혹시 저 팀이라는 건 블랙리스트의 의미가 아닐까. 만약 2팀장과 안 좋게 엮이지만 않았다면, 저 사람의 나쁜 면이 아닌 좋은 면을 봤을 수도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또 다른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미래의 나는 어쩌면.

2팀장과 한팀인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돼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

머릿속을 차지한 상념을 꾸역꾸역 눌러놓고, 홍보팀으로 들어갔다.

내 머리가 복잡하든 말든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사무실이 어째 시끌시끌하다. 직원들이 테이블 쪽에 우르르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홀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박 팀장에게로 다가갔다.

“저 왔어요, 팀장님. 커피도 같이.”

“땡큐. 자기 때문에 오늘 하루 정신없었는데, 이걸로 넘어간다.”

박 팀장이 커피를 받으며 웃었다.

“SBE 필름에서 부탁한 인터뷰 준비해야지. 자기도 멘트 좀 생각해봐.”

“네. 에이스 배급사 쪽은 좀 어때요?”

“난리 났지, 뭐. 이번에 평생 팔 쪽 다 팔아보라고 해. 우리 쪽에 일언반구도 없이 옳다구나 하고 기사부터 쏟아내니까 이런 꼴이 나는 거지. 우리 홍보팀은 뭐 폼으로 있어?”

박 팀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웃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가운데서 낯선 이들을 발견했다. 두말할 것 없는 선남선녀. 비주얼을 보니 틀림없이 연예인인데. 회사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다.

누구지?

여자 쪽을 먼저 보고,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돌연 세상이 뒤집어졌다.

노이즈투성이라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이곳이 어딘지는 확실했다.

공중에서 움직이는 지미집과 무대 앞 레일을 달리는 카메라.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하게 부서지는 조명. 귀를 때리는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갈채. 그리고 무대 위에서 꽃다발을 건네받는 남자.

시상식이었다.

나는 스텝들과 함께 서서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다.

꽃다발을 안은 남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저처럼 부족한 배우한테······.”

울먹이는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사회자의 애드립으로 박수갈채가 공백을 메운다. 곧 다시 울음을 애써 삼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족한 배우한테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기, 내 말 듣고 있어?”

박 팀장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수면 밖으로 끌어냈다.

노이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선명한 시야가 눈앞에 보였다. 홍보팀 직원들 사이에 파묻힌 두 사람.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남녀 중, 남자 쪽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인사하러 오나 보네. 자긴 저 두 사람 처음 보지?”

“···누구예요? 배우 같은데.”

“배우 맞아. 2팀장님이 얼마 전에 새로 뽑은 신인들.”

박 팀장이 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자기가 보기엔 어때? 좀 뜰 것 같아?”

< 뒤끝이 길면 (4)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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