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끝이 길면 (3) >
“박 피디, 출연계약서 두 부 새로 좀 뽑아줘.”
박 감독이 손에 쥔 종잇조각을 홱 팽개치며 말했다.
지켜보고 있던 박수경 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약서요?”
“그래, 남조윤 씨 계약서 새로 쓸 거니까.”
내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샜다. 개소리도 듣다 보니 재밌다.
굽혔던 허리를 편 박 감독이 나처럼 웃었다. 그가 내 팔뚝을 툭 쳤다.
“이건 잘 찢었어요. 어차피 출연료 좀 더 얹어서 새로 쓰자고 할 생각이었으니까. 박 피디, 뭐 하고 있어. 계약서 뽑으라니까?”
“안 뽑으셔도 돼요, 피디님.”
내가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대화에 끼어들려고 벌떡 일어났던 김판석 대표가 타이밍을 놓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박수경 피디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선 나와 박 감독을 번갈아 봤다.
“필요 없는 계약서를 뭐하러 다시 뽑아요, 잉크 아깝게.”
“정선우 실장님. 뭘 더 얻어내고 싶어서 이래요? 감독이 이만큼 숙이고 들어갔으면 감독체면도 좀 생각해줘야지. 앞일은 생각 안 해요? 앞으로 촬영할 때도 계속 이렇게 안 좋은 분위기로 할 거예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오해?”
“저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한 것 같은데. 촬영 계속할 생각 없습니다. 감독님한테 더 얻어내고 싶은 것도, 없고요.”
박 감독의 기세가 험악해진다. 조금 전엔 간이라도 빼줄 것 같더니만, 지금은 내 간을 빼내 날로 씹어먹고 싶은 눈이다. 그가 위협하듯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남조윤이 소리 없이 한걸음 나섰을 때였다.
“가, 감독님, 에이스 배급사에서 계속 전화 오는데요.”
조감독이 끼어들었다.
“이거 다섯 번째예요. 전화 좀 받으라고 문자도 오는데, 어떡하죠?”
“받지 말라니까!”
버럭 소리친 박 감독이 다시 나를 노려본다.
“정 실장, 생각보다 뒤끝이 기네.”
“좀 그렇더라고요.”
“그렇게 그렇게 뒤끝이 길면 인생 피곤해. 실장이면 한창 인맥관리해야 할 시긴데, 나 같은 감독하고 원수져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이래? 이 바닥 소문 빠르다니까. 사람이 멀리 봐야지, 멀리. 일 오래 안 할 거야?”
요즘 내 앞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너 내 앞에서 사람 협박하는 거야!”
김판석 대표가 씩씩거리며 끼어들었다. 안 그대로 덩치 큰 사람이 인상까지 쓰니 분위기가 살인적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김판석 대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비아냥거렸다.
“협박하는 게 아니라 충고, 아니 조언하는 거예요. 앞으로 업계에서 구르다 보면 이보다 더 더러운 꼴도 많이 볼 텐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사람이랑 척지면 어디 일 하겠냐고요!”
언쟁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봤다.
박 감독의 입에서 내 소문 얘기가 튀어나온 순간부터 남조윤의 얼굴에 먹구름이 증식하고 있다. 테이블이 날아다니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 카메라는 없어도,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지.
“말씀대로, 감당할 자신 없으면 굳이 원수 만들어서 좋을 게 없죠.”
내 말에 박 감독이 홱 돌아보며 반색했다.
“그렇지! 굳이 나랑 척질 필요가···!”
“그런데 이번 일은 제가 어떻게든, 감당해보려고요.”
“···뭐라고?”
“설마 그런 각오도 없이 이러고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참을까. 말까. 끝까지 갈까. 말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인가. 아닌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비로소 움직였다.
그리고······ 글쎄,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막 나가겠다, 이거구만! 이런 미···!”
나한테 번복 의사가 어림반푼어치도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박 감독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윽박지르던 기세는 쪼그라들고 그 대신 초조함이 그에게 덕지덕지 붙었다.
그때.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조감독이 다시 끼어들었다.
“감독님! 이거 전화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뭔 일 난 것 같은데.”
“임마, 너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내가 받지 말라고···!”
불쑥,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내 거다. 핸드폰을 꺼내는데 또 다른 벨소리가 끼었다.
“이건 대표님 핸드폰······ 어?”
“뭐야, 이거?”
판 프로덕션 직원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직원들의 핸드폰도 징징거리며 신호를 울렸다. 책상에 놓인 일반전화기도 일제히 소음을 내지른다. 이건 뭐 합창 수준이었다.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이런 경우 둘 중 하나더라고요.”
눈알을 굴리고 있는 박 감독에게 말했다.
“엄청 좋은 소식이거나, 엄청 나쁜 소식이거나.”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새 벨은 끊어져 있다. 대신 메시지 아이콘이 반짝인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웃었다.
“저한텐 좋은 소식이네요.”
박 감독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곧 그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
[‘미다스의 손’ 끌어들인 신작 영화, 홍보 효과 노린 노이즈 마케팅?]
[SBE 필름 어리둥절, ‘정선우-이송하’ 차기작은 최성원 감독 신작]
[이게 무슨 일? ‘정선우 차기작’이라는 두 영화, 진짜는 어느 쪽?]
[천만감독 최성원 신작! 초호화 캐스팅, 300억대 블록버스터···]
“좋아, 이거지, 이거.”
속속 올라오는 기사들을 본 기획피디가 흐뭇해 했다.
“민정 씨, 보도자료 쭉쭉 넣어줘! 쭉쭉!”
“연예부 기자들 메일함엔 싸그리 집어넣고 있어요! 원래 이런 보도자료는 부탁 안 하면 며칠씩 읽지도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건 아주 실시간 확인이에요. 활활 타네요, 타!”
홍보담당자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꾸했다.
“포털 실검은? 실검도 올라가겠지?”
“이 분위기면 금방 올라갈걸요? 상황이 웃기잖아요, 코미디도 아니고! 어유, 에이스 마케팅팀은 이거 어떻게 수습할 거야. 거긴 진짜 벼락 맞았다는데.”
낄낄거리던 담당자가 불쑥 물었다.
“이거 쐐기 박으려면 정선우 실장, 그 사람 인터뷰 꼭 필요해요. 보도자료에 코멘트 한 줄 찍 들어가는 거 말고, 기자 인터뷰! 협조 가능한 거죠?”
“좀 기다려봐! 정 실장이 급한 일만 끝나면 연락 주기로 했으니까!”
기획피디가 핸드폰을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담당자가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요. 정선우 실장이 다른 쪽 영화랑 안 좋게 끝났다셨잖아요.”
“디테일 한 것까진 몰라. 뉘앙스가 그랬다는 거지.”
“이게 처음에 어디선가 소문이 먼저 돌고, 기사가 뜨고, 에이스 마케팅팀이 한발 늦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신나서 달려든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쪽 영화 관계자들이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서 누운 꼴이잖아요? 그래서 이건 그냥, 시나리오 하나 써보는 건데요.”
“뭔 니주가 그렇게 길어?”
“그 무덤, 정선우 실장이 판 거 아닐까 하고요. 이런 얘긴 없었어요?”
기획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민정 씨야말로 알아봤을 거 아니야, 소문 근원지가 어딘지.”
“알아봤죠.”
“근데?”
“모르겠어요. 이 정도 난리가 났으면 어디서 시작된 건지 기자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질만도 한데, 귀신같이 조용하단 말이에요. 정선우 실장이랑 친하다는 기자도 슬쩍 떠봤는데 그 친군 아닌 것 같고.”
담당자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획피디가 귀밑을 긁적였다.
“뭐, 설마···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만약에 정선우 실장이 손쓴 거면 나한테는 꼭 귀띔해줘.”
“왜요?”
“보면 말이야. 그런 일을 할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거든.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중에 성공하면 십중팔구는···.”
“아이고, 시끄러워라. 여기 전쟁 났어?”
중얼거리던 기획피디가 홱 돌아봤다. 최성원 감독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어, 감독님. 고민은 다 끝나셨어요?”
“대충은.”
“그럼 이제 얘기 좀 해보세요.”
“뭘?”
가까이 다가간 기획피디가 최성원 감독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까 제가 밖에 있을 때, 회의실에서 정선우 실장이랑, 그 무명배우랑 셋이서 뭐 하셨어요? 뭘 하셨길래 감독님이 갑자기 그렇게 싸매고 고민하신 거예요?”
최성원 감독이 대답 없이 턱수염을 문질렀다.
***
“어, 김 기자. 기사는 일단 쓰지 말고,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그게 상황이 좀 복잡해요, 정리되는 대로 바로 전화드릴 테니까.”
판 프로덕션 직원들이 저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진땀을 뺐다. 김판석 대표와 조감독도 비슷한 상황이다. 통화 중이 아닌 건 나와 남조윤. 그리고 박 감독뿐이었다.
박 감독은 뭉툭한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때리듯이 두드렸다.
얼굴이 벌게졌다가, 파래졌다가, 지금은 시커멓다.
뭘 보고 있는지 알만하다.
“이걸, 이게 지금······!”
중얼거리던 박 감독이 고개를 홱 들었다.
그리고 남조윤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남조윤이 눈썹을 찌푸렸다.
“남조윤 씨! 진짜 밥상 뒤집을 거야?”
나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대상을 바꿨나.
“지금 가만있을 상황이야? 정선우 씨 설득을 해야지! 조윤 씨도 십 년간 밑바닥에서 무명생활했으니까 지금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횐지 알 거 아니야!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대로 걷어찰 거야? 아깝지도 않아?”
“아깝습니다.”
남조윤이 대답했다.
“주인 잘못 만난 시나리오는.”
담담한 말에, 박 감독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남조윤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계약서 정리됐으니까 이만 가시죠. 험한 소리 더 듣지 마시고.”
그러면서 내 등을 은근히 민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는 듯이.
하지만 두어 걸음 옮기기도 전에 발목을 잡혔다.
“아니, 가긴 어딜 가! 정선우 실장이 뭐라고 바람을 넣었는지 모르겠는데, 남조윤 씨 상업영화에선 아무도 모르는 무명 신인이야!”
박 감독이 답답한 얼굴로 소리쳤다.
흰자위는 흥분으로 벌겋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굴러다닌다.
“정 실장도, 조윤 씨를 진짜 생각하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뭐 믿고 이래? W&U한테 손 벌리려고? 이송하한테 끼워팔려는 생각이면 포기해! 내가 장담하는데, 남조윤 씨 일로는 절대 W&U 도움 못 받아!”
“······W&U에 손 벌릴 생각 없습니다.”
“그럼 조윤 씨한테는 내가, 내 영화가 최선인 거 알잖아! 다시 독립영화판에 가서 짐 나를 거야? 어? 아니면 나 말고 어디 이만큼 좋은 조건으로 남조윤 씨 오라는 데 있어? 있냐고!”
“네.”
“있느냐, 뭐?”
귀아프게 빽빽 거리던 박 감독이 입을 벙긋거렸다.
통화하느라 바쁘던 프로덕션 직원들도, 발을 동동 구르던 조감독도 나를 쳐다본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나는 다시 진동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SBE 필름 기획피디였다.
“제작규모 340억대에, 최성원 감독님 신작이면. 넘치는 조건이죠.”
내 말에, 박 감독이 괴상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건, 그 영화는 이송하···!”
“최성원 감독님이 기회를 열어 주셔서요. 최 감독님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 거, 웬만한 배우들한테는 꿈같은 일이죠.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 같은데요.”
박 감독의 얼굴이 더 괴상해졌다.
그때, 조감독이 기겁하며 박 감독의 팔을 붙잡았다.
“감독님! 에이스에서 계속 전화 안 받으면, 진짜로 손 뗄수도 있다고···!”
***
찰나 간, 박 감독은 눈알을 굴리며 궁리했다.
상황은 최악을 향해 가속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습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도, 아직 정선우 본인의 인터뷰는 없었으니까.
남조윤과 재계약만 하면 오늘 하루 일은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다.
시끄럽게 떠드는 언론도, 에이스 배급사도 잠잠해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저 둘을 설득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설득도, 협박도, 타이름도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하나다. 피하고 싶었지만 수는 그것뿐이었다. 박 감독은 입술 안쪽 물컹한 살을 깨물었다. 인상이 절로 구깃구깃해졌다.
“나랑 조감독이 어떻게, 무릎 꿇고 빌까? 어? 그러면 되겠어?”
“감독님?”
조감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감독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사뭇 애달팠다.
“두 사람이 이대로 가면 우리 영화 어떻게 될지 몰라. 지금 이 작품에 딸린 식구가 몇 명인데. 두 사람 때문에 투자에 문제 생기면, 그 많은 식구 다 어떡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단역 배우들은 또 어쩌고? 조윤 씨도 현장 딱한 사정 다 알잖아. 어?”
박 감독은 진짜 무릎 꿇는 시늉까지 하며 매달렸다.
“두 사람이 원하면 나랑 조감독이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테니까, 식구들 생각해서라도 영화는 계속 가자. 아니, 제발 같이 가 줘요, 어?”
사정사정하며, 박 감독은 힐끔 앞쪽의 반응을 살폈다.
협박과 으름장에는 끄떡하지 않던 남조윤의 눈이 마침내 흔들렸다. 박 감독이 내심 안도했다. 그의 의도대로 남조윤은 동요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모를까, 누군가를 무릎 꿇린다는 게 현실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촬영 스텝들까지 던져놨으니. 동요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자존심이 쓰렸지만 그만한 값은 했다.
생각하며, 박 감독이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정선우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감독님,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무··· 물어봐요, 뭐든지!”
“아까 하신 말이요. 조윤 씨 일로는 절대 W&U 도움 못 받는다고.”
어쩐지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물었다.
“뭘 알고 계시길래, 그런 걸 장담하세요?”
< 뒤끝이 길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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