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끝이 길면 (2) >
“아우, 배 아파. 젠장! 배 아파 죽겠네!”
영화제작사 SBE 필름의 회의실.
기획피디가 보고 있던 태블릿을 팽개치듯 던졌다. 옆자리에서 배우 프로필 파일에 코를 박고 있던 중년 남자, 최성원 감독이 자글자글 주름이 진 눈으로 웃었다.
“배 아프면 화장실부터 가.”
“최 감독님! 지금 똥 마렵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진짜 아파? 그럼 병원 가든가. 미팅 나 혼자 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 이거 때문에 배가 아프다고요, 이거!”
기획피디가 팽개쳤던 태블릿을 최성원 감독 앞으로 밀었다.
최 감독이 화면을 쳐다봤다. 헤드라인이 대문짝만하다.
[한류스타 만든 정선우 임시귀국, 신작 영화 때문? 어떤 영화길래?]
“젠장, 우리도 정선우 실장으로 홍보하려고 홍보기획 다 짜놨는데!”
“선수 뺏기기 전에 먼저 기사 내지 그랬어.”
“계약서에 아직 도장이 안 찍혔잖아요! 오늘 미팅 때 정선우 실장한테 부탁하고, 바로 내려고 했단 말이에요! 우리 쪽 기자들도 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굴이 시뻘게진 기획피디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최 감독이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이제라도 기사 내든가.”
“지금 꿀은 저쪽 영화가 다 빨고 있는데, 이런 타이밍에 부랴부랴 후속으로 기사 내면 우리가 뭐가 돼요. 덤밖에 더 돼요? 그리고 남은 단물이라도 빨아먹으려고 안달 난 것처럼 보이잖아요, 구차하게!”
“그럼 내지 말든가.”
“···형, 그냥 프로필 계속 보세요. 저 복장 터지게 하지 마시고.”
기획피디가 씹어내듯 말하며 물컵을 들었다. 텅 비어있었다. 젠장! 욕지거리를 뱉은 기획피디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호흡곤란으로 뒤로 넘어가도 안 이상할 상태였다.
최성원 감독이 자신의 물컵을 내밀며 말했다.
“영화는 작품만 좋으면 돼. 홍보야 부차적인 문제고.”
“지금이 90년대예요? 작품 좋은 거야 깔고 가는 거고요. 초대박 흥행은 홍보에 돈 발라서 만드는 거죠. 우리가 이번에 마케팅에 쑤셔 넣을 돈이 80억이 넘어요.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홍보가. 그러니까 에이스 배급사에서도 지금 이걸로 기사 쏟아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기획피디가 최 감독의 물까지 단숨에 비우곤 투덜거렸다.
“정선우 실장도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그 사람은 또 왜.”
“오늘 우리랑 미팅하기로 해놓고, 차기작 기사는 다른 영화로 내보내고!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건데 너무하잖아요! 적어도 우리 쪽엔 기사 터지기 전에 미리 말을······!”
기획피디가 말끝을 흐렸다.
회의실 밖이 시끌시끌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회의실 쪽으로 똑바로 다가오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날카롭고 냉담한 인상이 드러났다.
두 사람을 안내해온 여직원이 먼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 오셨는데요. 커피 준비할까요?”
“커피는 무슨. 냉수나 가져와.”
기획피디가 미간에 주름을 그었을 때.
“저 친구 배운데?”
불쑥, 최성원 감독이 말했다.
“무슨 배우예요, 정선우 실장이잖아요. 안 보이면 안경 쓰세요.”
“아니, 그 친구 말고. 뒤에 있는 친구.”
기획피디가 다시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정선우 실장 뒤로 낯선 남자가 보였다. 잘생긴 얼굴이다. 몸매도 좋고. 하지만 국내의 탑스타란 탑스타는 다 만나본 그의 눈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W&U 신인인가? 어디서 보셨어요? 전 처음 보는 배운데.”
“나도 처음 봐.”
기획피디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시는데 배운 줄은 어떻게 아세요?”
“보면 알지. 아우라가 있잖아.”
“아우라는 무슨. 안경 쓰시라니까요.”
기획피디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구시렁거렸다.
“계약은 계약이고, 배 아파서라도 한마디 해야지 안 되겠어요.”
***
기획피디의 얼굴이 뚱하다.
예상한 일이다. 저 사람도 인터넷에 깔린 기사들을 봤을 테니까.
인사하고 앉기가 무섭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기사 봤습니다.”
“아, 기사요.”
턱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모른 척, 의뭉을 떨면서.
“상대 쪽 영화사나 에이스 배급사 쪽에서도 이런 이슈거리는 놓치기 아쉬웠을 테니까, 기사 터뜨리고 마케팅하는거야 뭐,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 쪽이랑도 계약서에 도장만 안 찍었지, 구두계약 다 된 거 아닙니까?”
기획피디가 울화를 꾹꾹 눌러 참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무조건 우리 쪽 홍보만 도와달라,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거지만. 그래도 도의적으로. 우리 홍보대행사에서도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는데, 기사가 이렇게 먼저 나가버리면 우리 입장에서는 좀 섭섭···.”
“그러게요. 기사가 왜 그렇게 나갔을까요.”
툭 던지듯이 말했다.
기획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슨 헛소리야, 하는 얼굴로.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남조윤도 슬쩍 날 쳐다본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런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그 영화 안 찍기로 했는데.”
“······안 찍기로 했다고요?”
“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던 기획피디가 황급히 태블릿을 본다.
“잠깐,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네. 그럼 에이스 배급사에선 왜 이렇게 기사를··· 정 실장님이랑 서로 얘기하고 언론플레이 계획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거였으면 제가 직접 인터뷰를 했겠죠. 로열패밀리 때처럼.”
기획피디가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그럼 지금 나오는 기사들이 다 오보라고요?”
“네. 그래서 이 문제로 상의를 좀 하고 싶은데요. SBE 필름 쪽이랑 상의하고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피디님 말씀처럼, SBE 필름이랑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일만 남은 상황이니까요.”
“어, 그래요. 잠깐, 그것참 바람직한 생각, 일단 잠깐만요.”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 기획피디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의자를 박찼다. 그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박 피디! 홍보지원팀 민정 씨한테 연락해! 빨리!”
“네? 지금요?”
“지금! 급하니까 당장 좀 와달라고···! 아냐, 아냐! 내가 할게!”
기획피디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1초 만에 다시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커피! 커피 드릴 테니까, 잠깐 감독님이랑 얘기하고 계세요!”
유리문 밖으로 직원들이 정신없이 웅성거리는 게 보인다.
시선을 돌려, 비어있는 자리 옆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를 바라봤다.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카락과 턱수염. 부드럽게 주름진 얼굴. 겉모습만 보면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지만, 영화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다.
최성원.
15년 전 신인 감독상을 받으면서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 작품활동을 하면서 영화제에서 받은 감독상은 양손으로도 다 꼽을 수가 없고, 천만 관객을 동원한 메가 히트작을 두 개나 만들어낸 쌍천만 감독.
국내 영화계에 탑을 달리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만약 이송하가 저 사람의 차기작에 출연이 확정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주앉아서 이야기해볼 기회도 없었겠지. 그리고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느냐, 마느냐는 앞으로 하기에 달렸고.
옆을 바라봤다. 남조윤도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끌려온 자린데도, 시선에는 신뢰가 담겨있다.
나는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로 말라붙은 목구멍을 축이고 말했다.
“감독님께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홍보 문제라면 나는 아는 게 없는데.”
최성원 감독이 웃으며 대꾸했다.
“홍보가 아니라 캐스팅 건입니다.”
“아, 캐스팅.”
“소개하고 싶은 배우가 있어서요.”
감독의 시선이 내 옆으로 돌아간다. 남조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남조윤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남조윤을 바라보던 최성원 감독이 물었다.
“이송하 씨랑 한 묶음이에요? 영업 문제라면 피디를 설득해 보지 그래요. 보아하니 정선우 실장님이 영화 홍보에 꽤 도움이 되는 모양이고, 이송하 씨도 한창 한류의 중심에 있으니까 얘기가 빠를 텐데.”
“W&U랑은 상관없습니다. 당연히 끼워팔기 식 영업도 아니고요.”
최성원 감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화사가 아니라, 감독님을 설득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를요?”
“네.”
남조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영업이 아니라, 연기로요.”
***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야! 남조윤이 그 새끼야?”
“아, 아뇨. 에이스 배급사 홍보팀장이요.”
조감독이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박 감독이 신경질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걷어찼다. 안 그래도 난장판이던 트레일러 안이 더 어지러워졌다.
“이거 어떡하죠? 감독님, 안 받으셔도 돼요?”
“당장 할 말이 있어야 받지! 받아서 뭐라고 해, 그 새끼들 잠수타서 아직 설득이고 나발이고 말 한마디 못 해봤다고 해? 일단 냅둬, 배급사엔 남조윤이랑 얘기 끝내고 나서 내가 연락할 거니까!”
초조한 얼굴로 왔다 갔다 하던 박 감독이 말했다.
“다시, 인터넷 다시 새로고침 해 봐. 기사 새로 뜬 거 있나!”
조감독이 태블릿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이 가득했다. 뻣뻣한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던 그가 흠칫 놀랐다.
“기, 기사 떴어요!”
“뭐? 정선우 그 새끼가 인터뷰했어?”
박 감독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거무죽죽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조감독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그냥 어뷰징 기산가 봐요. 정선우 실장 인터뷰는 없네요.”
“애 떨어질 뻔했잖아, 임마!”
박 감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잠수타서 연락도 안 받는 새끼가, 인터뷰는 안 한단 말이지.”
“왜 안 할까요?”
“왜겠냐. 그렇게 난장 피우고 나갔어도, 진짜로 촬영 때려치울 생각은 없는 거지.”
박 감독의 입술이 비틀렸다.
“나 엿 먹으라고 시간 끄는 거야, 약아빠진 새끼.”
“그, 그런 걸까요?”
“이 새끼들이 진짜 다 때려치울 생각이었으면 벌써 기자들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떠들었겠지. 근데 조용하잖아. 주도권 잡았다 이거지. 날 안달복달하게 해놓고 지들 원하는 거 다 얻어낸 다음에, 마지막에 선심 쓰듯이 손 내밀겠다, 이거 아냐!”
“그런 거면 다행이긴 한데···.”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임마! 내가 시발, 그놈들 앞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가서 사과해야 할 판국에!”
그때, 잠깐 잠잠했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박 감독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돌겠네. 또 에이스야?”
“이번엔 메시지 같은데요, 잠깐만요.”
재빨리 핸드폰을 확인한 조감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독님, 남조윤이랑 정선우 실장 찾았어요!”
“연락 왔어? 뭐래, 그 새끼들!”
“연락 온 게 아니라, 판 프로덕션 막내 피디가 알려준 건데.”
“판 프로덕션?”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걔들 지금 김판석 대표님 만나고 있대요!”
***
“내가 정말, 선우 씨 볼 낯이 없네.”
김판석 대표가 칙칙한 낯빛으로 말했다.
내가 막 대꾸하려던 때였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 감독이 튀어 들어왔다. 계단으로 올라왔는지 더운 숨을 헐떡거리면서. 사무실 안을 홱홱 둘러본 그가 우리를 보곤 황급히 다가왔다.
“박 감독, 넌 여기 왜 왔어? 이제 내 푼돈은 필요 없다면서?”
김판석 대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멈칫한 박 감독이 뒷목을 긁적이면서 살살 웃었다.
“대표님, 아까 그건 제가, 제가 따로 사과 드릴게요. 대표님 말씀대로 제가 잠깐 돌았었어요. 요즘 작품 생각하느라 예민해져서. 제가 판 프로덕션이랑 대표님만 믿고 작품 시작한 건데, 다른데 어딜 갑니까.”
말이 이어질수록 김판석 대표의 표정은 더 냉랭해졌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박 감독이 헛기침하며 날 바라본다. 김판석 대표보다는 나와 남조윤 문제가 더 급하다는 듯이.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휴, 정 실장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제가 안 받았으니까요.”
내 말에 박 감독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도끼를 쥐여주면 당장 내 정수리를 찍을 것 같다. 하지만 몇 초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어색하게 웃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회탈을 뒤집어쓴 것처럼 거북한 웃음이다.
“그래, 기분 많이 상했죠. 당연하지. 아까 정 실장님이랑 조윤 씨 그렇게 보내고 나서 나도 후회 많이 했어요. 배급사에서 아무리 조윤 씨 배역을 줄이라고 해도, 감독인 내가 버텼어야 하는 건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금 김판석 대표의 표정이 딱 그렇다. 나도 저렇겠지.
“배급사랑 내가 담판 지었어요. 조윤 씨 비중 원래대로, 아니, 원래보다 더 늘려서 가는 걸로. 그리고 우리 조감독이 현장에서 좀 섭섭하게 한 모양인데 그것도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박 감독이 남조윤을 보면서 지껄였다.
넌 앞으로 이 바닥에서 연기할 생각 하지 말라던, 그 입으로.
“박 감독님.”
“원래 작품 만들 땐 별의별 우여곡절이 다 생기잖아요. 진통이 있어야 애가 나오는 거고. 작품 대박 나려고 액땜했다고 생각하고, 아까 트레일러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서로 덮어두는 걸로 합시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일어나면서 말했다. 박 감독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찌르는듯한 시선이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렇게 사과도 하잖아요. 더 원하는 거 있어요? 있으면 말해봐요. 그래야 합의점을 찾아보지. 까놓고 말해서, 정 실장님도 이거 완전히 엎을 생각은 아니잖아요?”
“제가요?”
“그러니까 지금 기사 나가고 있는 거 반박 인터뷰도 안 하고, 프로덕션에 와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풀 거 풀고, 나랑 같이 인터뷰···.”
“아닌데요.”
테이블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들었다.
“여기 온 건 이거 때문입니다.”
박 감독의 앞에다 쓰레기통을 부었다.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박 감독의 발치에 수북하게 쌓였다.
박 감독의 인상이 확 구겨진다.
“지금 이게 무슨···!”
“계약서요.”
“······무, 뭐?”
멍청하게 섰던 박 감독이 허겁지겁 종잇조각을 뒤진다. 종잇장 몇 개를 맞춰본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꽉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혹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에게 다시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 영화 안 한다니까요.”
< 뒤끝이 길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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