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끝이 길면 (1) >
“미친 새끼들! 어디서 감히······!”
눈알을 부라리며, 박 감독이 담배를 한껏 빨았다. 텁텁한 연기가 흩어졌다. 그는 재떨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거라곤 난장판으로 부서지고 깨진 집기들뿐이었다. 울컥 분이 솟구친 박 감독이 담배꽁초를 홱 집어 던졌다.
그때 소파 밑에 나뒹굴고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박 감독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네, 무슨 일이···.”
-선우 씨 연락받았어. 남조윤 계약 파기하기로 했다면서!
판 프로덕션 대표, 김판석이 버럭 소리쳤다.
“내 참, 여기 깽판 치고 가서 대표님한테 일러바쳤어요?”
-박 감독, 너 기어이···!
“니미, 대표님이 남조윤 자르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난 어떻게든 같이 끌고 가려고 했는데, 지들 입으로 영화 안 찍겠다고 걷어차고 나갔다고요! 지금 울화통 터지는 게 누군데!”
-선우 씨가 그렇게 경우없는 사람이 아닌데, 대체 현장에서 남조윤을 얼마나 홀대했길래······! 내가 앞으로 선우 씨 얼굴을 어떻게 봐!
박 감독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가 일단 선우 씨랑 잘 얘기해볼 테니까, 너도···!
“귀에 딱지 앉겠네. 간섭 좀 적당히 하세요.”
-······뭐, 임마?
“현장 일은 감독 소관 아닙니까? 대표님이 나 개털일 때 시나리오만 보고 제작 맡아주신 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이래라저래라 해도 참았는데, 너무하시네. 이거 이제 백억짜리 작품이에요, 백억!”
김판석 대표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침묵을 깼다. 김판석 대표가 어르듯이 말했다.
-박 감독, 너 지금 단단히 실수하는 거야. 백억에 홀려서 눈에 뵈는 것도 없는 거라고. 이대로 가면 현장 분위기 개판 될 거고, 배급사 손에 시나리오는 너덜너덜해지고!
“대표님, 지금 에이스 배급사 견제해요?”
-뭐?
“배급사에서 큰손들 소개해줘서 투자금 왕창 늘어나니까, 나중에 프로덕션에 콩고물 덜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이러냐고요.”
비아냥거리는 말에 김판석 대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투자금 빼고 손 뗄 테니까, 딴 제작사 알아봐!
“그러세요, 그럼. 몇억 그거 빠져봤자 이제 간지럽지도 않으니까.”
미친 새끼.
한 마디를 남기고, 김판석 대표가 전화를 뚝 끊었다.
트레일러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박 감독은 소파에 파묻혀 앉은 채, 거스러미가 일어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에 다시 담배가 물렸다. 연기를 몇 모금 빨아 마신 박 감독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팀장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말인데요. 남조윤이요.”
-아, 그거. 어떻게 됐어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대수롭잖게 물었다.
“그 새끼, 아예 작품에서 빼기로 했습니다. 비중 줄고 현장에서 텃세 좀 부리고 하니까, 그거 못 견디고 결국 뛰쳐나갔어요.”
박 감독이 담뱃재를 아무렇게나 털어내며 귀를 기울였다. 건너편에선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흐르는 숨소리에는 만족한 기색이 스며있었다.
-그래요? 독립영화 오래 했다길래, 근성은 있는 배운 줄 알았는데.
“뭐, 연기는 되는 놈이라 잘하면 빛 볼 날이 올 수도 있었는데. 인성이 글렀어요, 인성이. 이 새낀 절대 성공 못 할 겁니다. 팀장님이 이 새끼랑 전속계약 안 하신 거, 정말 좋은 선택이셨어요.”
한참 유들유들한 어조로 떠든 박 감독이 덧붙였다.
“정선우 실장이 찾아와선, 둘이 같이 깽판 쳐놓고 갔습니다. 그놈도 아주 미친놈이더라고요.”
-···그래요? 그거 아주 볼만했겠네.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을 재던 박 감독이 다시 입을 열려던 때.
“감독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트레일러 밖에서 조감독이 문을 두드렸다.
박 감독이 핸드폰을 멀찍이 내리고 물었다.
“또 누가 와?”
“기자라는데요? 촬영현장이랑, 감독님 인터뷰 좀 하고 싶대요!”
기자라는 말에 박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비 좀 하고 나간다고 해!”
소리친 박 감독이 다시 핸드폰에 대고 본론을 꺼냈다.
“저, 그럼 팀장님, 거슬리는 문제는 다 해결됐고. 제가 이번 작품 잘되면 차기작은 대형 블록버스터급으로 준비할 생각인데요. 시나리오도 있고요. 서지준 씨나, 손채영 씨 같은 탑급 배우만 딱 세팅되면···.
-시나리오 한번 보죠.
“감사합니다!”
박 감독이 허공에다 고개를 꾸벅거렸다.
전화를 끊고,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벽 거울 앞에 섰다. 아까의 소란으로 금이 쩍쩍 그어진 거울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비쳤다. 그가 어깨를 쭉 펴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있을 때.
다시 트레일러 문짝이 흔들렸다.
“감독님! 감독님! 여기, 빨리 좀 나와보세요!”
“하여튼 저 새낀, 없어 보이게······ 나간다!”
박 감독이 트레일러 문을 벌컥 열었다.
조감독 뒤로 노트북 가방과 카메라를 멘 기자 두세 명이 보였다.
“엔터무비에서 나왔습니다. 감독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혹시 잠깐 인터뷰 괜찮으세요?”
“그럼요, 그럼요. 작품 홍보되는 일인데 해야죠.”
박 감독이 웃으며 대답하자마자, 질문이 밀려들었다.
“W&U 정선우 씨랑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신 건가요?”
“네? 누구요?”
“정선우 씨가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먼저 연락한 겁니까?”
“네?”
“정선우 씨가 담당하는 배우는 어떤 분입니까? 무명 신인이라고 들었는데, 그분도 같이 좀 뵙고 인터뷰할 수 없을까요?”
“잠깐, 저, 네?”
멍청하게 서 있던 박 감독이 주춤 물러났다. 옆에서는 조감독이 똑같은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촬영 스텝들과 보조출연자들이 술렁거리며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기자들이 박 감독에게 달라붙었다.
“감독님, 코멘트 좀 부탁드립니다!”
“세간에서 정선우 씨를 미다스의 손이라고 부르고, 그 때문에 정선우 씨가 선택한 작품은 상당한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는데요. 영화관계자분들은 정선우 씨한테 정말 고마우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혹시 정선우 씨도 모시고 더블 인터뷰는 힘들까요?”
“감독님!”
박 감독이 흠칫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에이스 배급사였다.
*
매끈한 외제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박 감독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외제차 안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내렸다. 그의 영화를 백억짜리 대작으로 만들어준 에이스 투자배급사의 영화사업부장. 그리고 마케팅팀 팀장이었다.
사업부장이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박 감독님. 이런 중요한 정보를 왜 미리 말 안 했어요?”
“그게, 부장님.”
“이렇게 좋은 카드가 있었으면, 빨리 우리 마케팅팀에 얘기하셨어야지. 드라마 로열패밀리가 정선우 실장 써먹어서 재미를 얼마나 봤는지 몰라요? 이 팀장, 우리도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럼요, 타이밍은 오히려 저희가 더 좋아요.”
마케팅팀장이 한 손에 든 태블릿을 흔들며 웃었다.
“이송하랑 고양이 수호령이 중국에서 빵 터진 상황이라, 한류를 만들어낸 안목이니 어쩌니, 정선우 실장한테도 관심이 엄청 쏠렸잖아요. 게다가 관계자들이 다 중국에 있어서 기자들이 애가 닳았거든요. 지금은 뭘 터뜨려도 화제가 안 될 수가 없어요.”
“그래?”
“기자 몇 명한테 코멘트 넣어놨는데, 반응이 아주 화끈합니다.”
“그럼 투자자들도 솔깃하겠는데?”
“당연하죠. 벌써 입질 오고 있습니다.”
“좋아, 좋아. 박 감독님!”
“네, 부장님. 저, 그런데···.”
“촬영하느라 바쁘겠지만, 협조 좀 잘 부탁해요. 초반에 언론홍보 잘돼서 마케팅비 세이브되면, 그거 다 제작비로 돌아갈 거니까. 이 팀장, 뭐뭐 필요하다고 했지?”
“일단 감독님이랑 정선우 실장 인터뷰부터 따야죠.”
“정선우 실장 로열패밀리 때는 인터뷰 다 해줬다며? 이번에도 잘 부탁해봐. 정선우 실장도 자기 배우 알리고, 서로 윈윈인데 설마 거절하겠어? 그건 잘 성사시켜보고, 박 감독님도 인터뷰 문제없죠?”
“문제가 조금······.”
부장과 팀장이 박 감독을 쳐다봤다.
박 감독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있습니다.”
입도 대지 않은 커피가 차갑게 식었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은 박 감독은 힐끔 앞을 살폈다. 사업부장과 팀장이 아까부터 심각한 얼굴로 속닥거리는 중이었다. 타는 목을 달래려, 박 감독이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다시 데려오세요.”
불쑥 나온 말에, 박 감독의 입에서 커피가 튀었다.
“네, 네?”
“남조윤 씨, 무조건 다시 데려와야 합니다. 출연료를 몇 배를 더 부르든, 배역 비중을 다시 키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조윤 씨랑 정선우 실장 달래서 다시 영화에 합류시키세요.”
팀장이 말했다. 목소리도, 표정도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황한 박 감독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에이스 측에서도 남조윤은 빼자고···!”
“그건 이 상황이 터지기 전이고요. 지금 관련 기사가 얼마나 쏟아지고 있는지 아세요? 남조윤 씨 달래서 못 데려오면, 일이 아주 더럽게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언론이야 잘 수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정보라고···!”
“미다스의 손이 선택했네, 어쨌네, 기사가 그렇게 나가고 있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게 뒷수습이 되겠습니까? 뭣보다 남조윤 씨가 좋게 나간 게 아니잖아요.”
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에 정선우 실장이 미친 척하고 이 영화 망할 것 같아서 때려치웠다고 인터뷰라도 하면요. 언론사들 신나서 기사 써제낄 텐데, 그럼 투자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아니, 미다스의 손이니 어쩌니. 그거 다 운이 좋아서 그런 거지. 그걸 누가 진짜 믿습니까. 기자들이 그냥 농담삼아 떠드는 얘긴 거 다 아시잖아요. 설마 그런 것 때문에 투자자들이···.”
“박 감독님.”
사업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수십억씩 돈 투자한 사람들한텐, 농담 아니에요, 그거.”
“그건, 그······!”
“남조윤 씨랑 정선우 실장, 무조건 달래서 데려와요. 감독님이 못하겠으면 판 프로덕션, 김판석 대표님한테 부탁해보세요. 고양이 수호령 같이 만든 사이니까 정선우 실장이랑 좀 더 가까울 거 아닙니까.”
박 감독의 낯빛이 거무튀튀하게 썩어들어갔다.
사업부장이 최후통첩을 내렸다.
“빨리 움직이세요. 만약에 일 잘못돼서 투자자들 빠지면, 그땐 저희도 이 영화에 손 뗄 수도 있으니까.”
***
“날씨 좋네요.”
유리창 너머, 새파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남조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까부터 턱이 경직돼있다.
“전화가 계속 옵니다. 감독, 조감독···.”
“받지 마세요.”
“문자도 벌써 마흔 개가 넘게···.”
“보지 마시고.”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은데요. 기사들도 그렇고.”
“커지라고 열심히 부채질해놨는데, 커져야죠.”
떨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조윤 것만 야단인 게 아니었다. 내 핸드폰도 난리다. 심지어 중국에 있는 사람들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잠깐 조용히 갔다 온다더니 이게 조용한 거냐. 어째 네가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가 생기냐. 뭐 그런.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수북하게 쌓였지만, 일단은 묻어뒀다.
중요한, 꼭 필요한 전화만 몇 통 하고.
편의점 봉지 안에서 캔을 두 개 꺼내 하나를 남조윤한테 던졌다.
“느긋하게 기다려봐요. 사이다 마시면서.”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가만있는 게 나아요. 지금은.”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요.”
남조윤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나처럼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캔을 딴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캔에 가볍게 건배를 하고 말했다.
“어디까지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예?”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간다. 느릿느릿.
반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는 온화한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온다.
“좋게좋게 적당한 곳에서 멈출까. 아니면 끝까지 갈까.”
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요.”
“네.”
“이 바닥에 들어오고 나서 안 건데, 제가 뒤끝이 긴 편인가 봐요.”
한쪽 눈을 슬쩍 뜨자, 남조윤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입 끝이 올라갔다.
“자꾸 끝까지 가고 싶네.”
***
“감독님, 남조윤 이거 전화 안 받는데요? 어,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계속 걸어 봐!”
박 감독과 조감독의 다급한 목소리가 섞였다.
그들의 표정은 난장판인 트레일러 내부보다 더 어지러웠다.
“다른 핸드폰으로 전화해도 안 받는 거 보면, 이 새끼 아예 잠수탄 거 같아요! 정선우 실장도 안 받고!”
“메시지도 보냈어? 만나서 얘기하자고, 어? 출연료 얘기도 했지?”
“다 했죠, 다 씹혔어요!”
“니미, 시발! 환장하겠네! 하필 이런 타이밍에 기사가 터져가지고!”
박 감독이 거칠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이며, 조감독이 물었다.
“남조윤 다시 안 돌아오면 어떡하죠? 감독님, 이러다 우리 영화 나가리되는 거 아니에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임마!”
박 감독이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배역 비중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하고, 내가 아까 깽판 치고 나 협박한 거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먼저 숙이고 들어가면, 그럼 그놈들도 적당한 선에서 들어올 거야.”
“그, 그럴까요?”
“정선우 그 자식이 남조윤 배우인생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어. 백억짜리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 롤인데. 막말로 여기서 그러고 나가면, 남조윤이 갈 데 있어? 나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남조윤 데려가겠다는 감독이 있겠냐고!”
***
전화를 끊고, 다시 미니밴에 올라탔다.
“슬슬 출발할까요?”
복잡한 얼굴로 창밖의 노을을 보고 있던 남조윤이 고개를 돌렸다.
“어딜······?”
“약속시간이 다 돼가거든요.”
“약속이요?”
“미팅 때문에 왔다고 했잖아요. 송하가 로열패밀리 말고, 영화 하나 새로 조율하는 게 있거든요. 340억짜리 블록버스터. 계속 줄다리기 중이었는데 한류스타로 인지도가 확 올라가서, 계약하게 될 것 같아요.”
“아. 그럼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문 손잡이를 잡는 남조윤을 가로막았다.
“나랑 같이 가요.”
“네?”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백억짜리 대신, 340억짜리 영화 한번 잡아보려고요.”
< 뒤끝이 길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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