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4) >
“자, 잠깐! 잠깐만!”
박 감독이 날 따라서 벌떡 일어났다.
“정 실장님, 그렇다고 그러고 일어나시면 어떡합니까! 배급사 쪽은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일단 앉으시죠. 시원하게 냉커피 한잔하면서 다시 얘기합시다. 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미간을 찌푸리자마자 박 감독이 다시 말했다.
“뭐, 내가 이러면서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릴 줄 알았어요? 어쩌면 좋나 그래. 난 그럴 생각 없는데. 정선우 씨 그만큼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아. 내가 박 감독 자존심을 건드렸나 보다.
무려 백억짜리 영화 찍으시는 대단한 감독님인데.
“그리고 남조윤 그 친구도 그만큼 대단한 배우 아니고. 비중은 줄었어도, 내가 남조윤 씨 생각해서 대사도 몇 줄 넣어줄 생각이었는데. 무명배우 필모엔 이것도 엄청난 기횐 거 몰라요?”
내가 욕을 먹는 것보다 이게 더 기분이 더럽다.
내가 아끼는 것이 남의 흙발에 짓밟히는 느낌이었다.
문득 오디션 보던 날이 떠오른다. 남조윤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앞으로 잘 해보자고 웃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땐 감독 잘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돈 앞에서 이렇게 밑바닥을 훤히 까 보이는 사람이었나.
거참 엿같네.
“당장 전화 몇 통 돌리면 대신하겠다는 배우들이 줄을 설 거고, 내 배우 한번 찍어달라고 매달릴 매니저들이 한 트럭은 나올 텐데! 이 영화 안 합니다? 잘나셨네, 아주. 배가 불러가지고.”
이 바닥에 들어와서 신물 나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더러워도 참아라. 웬만하면.
머리를 차갑게 식히면서 생각했다. 참아야 하나?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백억짜리 영환데, 작품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라면 당연히 저희가 감수하는 게 맞죠. 비중이야 어떻든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와야 그렇게 말해봤자 늦었···.”
“이런 반응을 기대하셨나 본데.”
“뭐?”
멍청한 표정을 짓던 박 감독이, 한발 늦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서로 생각 없으니 잘됐네요. 제가 마음이 약해서 감독님이 매달리셨으면 난처할 뻔했는데.”
“뭐, 이 자식아?”
“자식?”
“기껏해야 매니저 실장 주제에 감히 감독에게 대들어? 방송에서 스타 매니저라고 치켜세워주고 하니까 감독이고 뭐고 우스워? 너 이 바닥 소문 빠른 거 몰라? 앞으로 영화 안 할 거야?”
박 감독이 코웃음을 쳤다.
“W&U 같은 큰 회사에서 일하겠다, 데리고 있는 이송하는 나날이 쑥쑥 크고 있겠다, 세상 무서운 게 없나 본데. 남조윤은 어쩌려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설이 턱 막혔다.
남조윤.
연기가 좋아서. 연기가 하고 싶어서. 스텝들한테 무시당하고 사람들한테 동정받는 거지 같은 촬영환경인데도 재밌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던 남조윤이 떠올랐다.
“연기를 잘하거나 말거나, 이렇게 잡음 많이 생기는 무명배우를 어느 감독이 데려다가 써? 너 지금 이러는 거, 남조윤 배우인생 망치는 거야! 알아? 그거 책임질 자신 있···!”
그때였다.
트레일러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남조윤이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요?”
“네. 다치면 안 되니까.”
다친다고?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남조윤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체구는 늘씬한데 힘은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나를 입구에다 옮겨놓은 남조윤이 등을 돌렸다.
남조윤답지 않은 흉흉한 등이다. 저절로 마른침이 침이 넘어갔다.
턱. 남조윤이 태연히 간이의자의 프레임을 붙잡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의자가 박 감독 옆의 탁자를 덮치고 나뒹굴었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간이식탁과 유리컵이 부서져 흩어졌다.
유리조각을 저벅저벅 밟고 간 남조윤이 테이블 모서리를 쥐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트레일러 구석에 처박혔다. 층층이 쌓여있던 종이쪼가리들이 날아올랐다가, 넋 나간 박 감독의 뺨을 후려치면서 떨어졌다.
“너, 너 미쳤어? 이 새끼, 이게 지금 무슨 행패야!”
소리치던 박 감독이 내게 소리쳤다.
“정 실장, 정선우 씨! 저거 안 말리고 뭐 해!”
“아, 전 뭐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 일 보세요.”
W&U 법무팀 직원이 뭐라고 했더라.
담당 연예인이 밖에서 사고를 치면, 제일 먼저 주위에 카메라가 있는지부터 살피라고 했지. 물적증거만 안 남으면 뒷수습은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보자, 일단 이 안에 카메라는 없는 것 같지?
안심하고 트레일러 문에 등을 기댔다.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남조윤, 너 이거 소문나면 끝···!”
“소문내세요.”
남조윤이 박 감독 앞에 서서 말했다.
“뭐? 뭐라고?”
“남조윤이라는 놈이 감독 트레일러에 쳐들어와서 테이블 엎고 지랄했다고. 소문내요. 어차피 내 소문은 더러워서 그거 하나쯤 더 얹어져도 티도 안 날 테니까. 꼴리는 대로 하세요.”
목소리는 담담한데 내용은 위협이다.
나한테는 남조윤의 뒷모습밖에 안 보였지만, 표정도 흉흉한가 보다. 길길이 날뛰던 박 감독이 겁먹고 움츠러든 걸 보면.
“그 대신 실장님 소문이 내 귀에 들리면···.”
남조윤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낯익은 접이식 칼이었다.
오디션 때 남조윤이 주머니에 넣어갔던 그거.
칼이 홱홱 펴졌다 접혔다. 박 감독이 흥분해서 오디션 합격을 외쳤던 그 날, 그때처럼. 손안에서 접이식 칼이 능숙하게 움직인다.
눈알을 굴리는 박 감독에게, 남조윤이 긁히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뭘 할지 모릅니다.”
“미, 미친놈! 깡패 새끼도 아니고, 깽판 친 걸로도 모자라서 감독을 협박해? 넌 앞으로 이 바닥에서 연기할 생각 하지 마! 내가 이 꼴을 보고 가만있을 줄 알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만있지 마세요.”
남조윤 대신, 내가 말했다.
“나도 가만히 안 있을 생각이니까.”
*
“험한 꼴 보여서 미안해요. 놀랐어요?”
조수석에서 남조윤이 말했다.
“놀랐죠. 제가 이래 봬도 온실 속 난초처럼 곱게 자란 사람이라.”
농담처럼 말했다. 아직 박 감독의 개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를 치고 있어서, 이렇게라도 진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액셀을 밟아버릴 것 같다.
핸들을 툭툭 두드리다가 옆을 돌아봤다.
나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중인데, 당사자인 남조윤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선 바짓단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뭐해요, 지금?”
“밑단에 유릿가루가 묻어서요. 수정 씨가 구해온 옷인데.”
“유릿가루요?”
뒷좌석에서 스타일리스트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 조감독에게 따지고 들던 그 험악한 얼굴로. 적어도 이 차 안에서 성질나있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구나.
“트레일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옷에 유릿가루가 묻어요? 험한 꼴이라는 게 진짜로 험한 꼴을 말하는 거였어요? 세상에, 감독이 유리잔이라도 던진 거예요?”
던지긴 이쪽이 던졌지.
시침 뚝 떼고 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분통을 터뜨렸다.
“설마 그걸 또 그대로 당하고 온 거예요? 정 실장님이 뭐라고 해요, 좀! 실장님 없을 때 남조윤 씨가 얼마나 무시당하고 다닌 줄 알아요? 저 사람 저렇게 순해 빠져서 연예계에서 버티겠어요?”
“수정 씨.”
남조윤이 불렀지만, 스타일리스트는 콧방귀를 뀌며 계속 말했다.
“이 바닥이 아무리 못 뜨면 사람취급도 못 받는다지만 정도가 있는 건데! 현장은 거지 같은데도 영화 찍겠다고 참고, 참고! 보는 내가 복장이 터져서 정말! 어우 답답해, 어우 답답해!”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가슴을 퍽퍽 두드린다.
나는 또 액셀을 밟을뻔했다.
“내가 나서서 한소리 하려고 하면 ‘수정 씨,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긴 쥐뿔! 정 실장님한테 한번 말이라도 해보자니까 그것도 하지 말라고···!”
“수정 씨. 그만해요.”
남조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스타일리스트가 다시 입을 달싹였지만, 남조윤이 고개를 저었다.
불만으로 입이 툭 튀어나온 스타일리스트를 여의도에 내려주고 그대로 한강둔치로 차를 몰았다. 잔디밭에 놀라나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적당히 조용한 곳에 미니밴을 세웠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러서 사온 음료수 캔을 따며 말했다.
“나이 먹고 사람 된 거라더니.”
남조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진다.
“예?”
“저번에 왜. 내가 이번 영화 배역이 완전 미친놈인데 소화가 되겠냐고 물었을 때. 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나이 먹고 사람 된 거라고. 사실 그거 안 믿었었는데.”
“아.”
“내가 뭐가 날아다니는 건 좀 익숙한 편인데, 그래도 의자랑 테이블이 날아다니는 광경은 처음 봤네.”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삼키고 물었다.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참았어요?”
본론을 툭 던졌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조윤이 나를 바라본다.
“나한테는 말을 하지. 내가 못 미더웠어요? 감독이랑 대형 배급사에서 지랄하고 백억이니 뭐니 스케일이 커지니까, 나한테 말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왜 말 안 했어요? 현장에서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난 다 잘되고 있는 줄 알았네. 내가 나 일 잘한다고, 같이 일하자고 꼬드겨서 데려온 건데. 이 영화도, 염병, 내가 소개한 거잖아요.”
어마어마하게 쪽팔리고, 그보다 더 화가 난다.
나한테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런 대우를 견딘 남조윤이 답답하고. 인생이 더럽게 꼬여서 연기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 너무 연기가 하고 싶어서, 영화를 찍고 싶어서 그걸 참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딱하고.
그렇게 참았는데, 결국에는 감독 앞에서 테이블 엎고 때려치우고.
박 감독이 내 소문 안 좋게 낼까 봐.
빈 캔을 손아귀 안에서 우그러뜨렸다.
“그러다 다쳐요.”
남조윤이 말하자마자, 풀톱이 뜯어지면서 날카로운 알루미늄이 내 손바닥을 긁었다. 새빨간 피가 차오른다. 손목을 타고 내려와 핸들로 뚝뚝 떨어졌다.
남조윤이 빈 캔을 빼앗아 뒷좌석에 던져놓더니 내 손을 살폈다.
그리곤 색바랜 지갑에서 밴드를 꺼내 내민다.
“이런 건 왜 가지고 다녀요?”
“습관이라서요.”
왼손으로 어설프게 밴드를 붙이는데, 남조윤이 나직이 말했다.
“실장님이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말할 수가 없었어요.”
“왜요?”
“실망시키기 싫어서요.”
남조윤의 목소리가 더욱더 가라앉았다.
“난 잘 모르겠는데, 실장님이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면서 날 도와주고. 영화 출연할 기회도 잡아주고.”
“그건 당연한 거죠.”
“정말 잘 해보고 싶었거든요, 이번엔.”
남조윤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나야 이미 인생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이고, 실패하는 것도 한두 번도 아니지만. 실장님은 아니잖아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남조윤이 살짝 시선을 내렸다.
“제가 실장님 매니저 인생에, 첫 실패작이 되긴 싫었거든요.”
“뭐라고요? 실패작?”
“이 바닥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잖아요. 운 나쁘게 나랑 엮이지만 않았어도 오늘 이런 일 겪을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남조윤이 씁쓸히 말했다.
“보셨으니 알겠지만, 제가 운이 더럽게 나빠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운이 더럽게 좋으니까.”
내 말에, 남조윤의 눈이 커졌다.
“못 들으셨어요? 내가 손대면, 다 잘된다는 소문.”
“그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내가 운이 정말 더럽게 좋으니까, 마이너스 플러스 계산해 보면 결국엔 플러스일걸요.”
남조윤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내 핸드폰이다. 화면을 보니 홍보팀 여직원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여직원이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선우 씨! 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 어디 있어요?
“한강이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당장 인터넷부터 보세요! 지금 선우 씨 기사 뜨고 난리 났어요!
새어나온 목소리를 들었는지, 남조윤이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이게 무슨······.”
남조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나도 재빨리 화면을 훑어봤다. 등록시간이 1분도 채 안 된 기사들이 우르르 떠 있다. 헤드라인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이송하 키운 미다스의 손 정선우, 다음 선택은 영화?]
[한류스타 만든 정선우 임시귀국, 신작 영화 때문? 어떤 영화길래?]
[정선우, 이번엔 영화에 대박 예감? 영화 관계자들 이목 쏠려]
-소문이 어디서 시작된 건진 모르겠는데, 지금 에이스라고, 영화 배급사에서 환장하고 달려들고 있어요! 선우 씨랑 송하 씨 이름까지 팔아서 영화 홍보용으로 기사 엄청 내고 있다구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니, 일단 이거 헛소문이면 빨리 수습을···!
“아. 박 팀장님한텐 말씀드렸는데, 아직 전달 못 받으셨구나.”
내 말에, 여직원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
“그냥 두세요. 제가 시작한 거니까.”
-네? 뭐라구요?
옆에서 남조윤이 커다래진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일부러 판 깔아놓은 거라고요.”
<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4)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