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29화 (129/218)

<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3) >

“어떻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홀로그램은 온데간데없다.

눈앞에 있는 건 거미줄 같은 망사로 엮인 치파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쭉 찢어진 천 자락 밖으로 뽀얀 허벅지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이 내 양옆에 앉았다.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주세요.”

어눌한 한국어가 뚝 멎었다.

여자가 능숙하게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라 내밀었다.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양주가 목구멍을 화끈하게 태우며 넘어간다.

“한 잔 더.”

빈 잔에 다시 술이 채워졌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텁텁하게 차오른 숨을 뱉고 옆을 쳐다봤다. 조금 전 홀로그램에서 본 것보다 훨씬 젊은 얼굴의 이량이 날 보고 있다.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엔 ‘제 팀원들’이라고 했지. 2팀장이랑 배신자를 놓고 내 팀원이라니. 원래의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그따위 조합으로 팀을 만든 거지?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다. 뭐 그런 건가?

아니, 아니지.

그 미래에 존재하는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니까. 배신자 놈과의 관계가 서로 개새끼 소새끼가 오갈 만큼 최악은 아니었을 수도 있고. 2팀장하고 안 좋게 엮이는 일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이 아니더라도, 그 작자들이 같이 일하고 싶은 인물상은 아니잖아. 오히려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갈 작자들이지. 잠깐. 혹시 홀로그램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배신자나 2팀장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

이량을 보며 의심했을 때였다.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인데. 혹시 취향이 그쪽이십니까?”

“예?”

“양옆에 여자애들을 앉혀놨는데, 저만 보시길래······.”

“그런 거 아닙니다.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요.”

대답하며 옆을 바라봤다.

앳된 얼굴의 여자들이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웃고 있다.

한번 친해져 보자고 마련한 자리에 헐벗은 여자들이라. 그것도 이송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어린애들을. 그러고 보니 첫날 리무진에서, 손채영 땜빵 매니저로 따라왔던 실장이 중국 에이전트 얘길 했었지.

호텔 소유주가 손채영과 따로 식사하길 원한다느니 어쩌느니.

혹시 그런 게 목적인가? 이송하를 그런 자리에다 불러 앉히는 거?

그런 거라면 술이고 나발이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저희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얼굴이 무서워요.”

왼쪽에 앉은 여자가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이량이 웃으며 덧붙였다.

“연예인 지망생들입니다. 원래 이런 데 오는 애들이 아닌데, 일부러 불렀어요. 정선우 실장님이 안목이 아주 좋으시다길래. 사람도 잘 보시고, 작품도 잘 보시고.”

“운이 따라서요.”

“운이든 실력이든, 결과가 말해주는 거죠. 무명이었던 이송하를 순식간에 한류스타로 만든 분 아닙니까.”

이량의 입에서 이송하 이름 석자가 나온 순간.

술잔에서 손을 뗐다.

“너희 중엔 스타 감이 없나 보다. 나가 봐.”

이량이 손짓했다. 여자애들이 조용히 룸을 빠져나갔다.

처음처럼 단둘만 남자 이량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관심 있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이송하 씨 얘기를 들으시곤 아주 흥미로워하셨어요. 그래서 실장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좋은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요.”

“네, 뭡니까?”

일어설 준비를 하며, 대수롭잖게 물었을 때였다.

“대표가 돼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가 멈칫했다.

“뭐라구요?”

“W&U에서 독립할 의향이 있으시면, 여기 좋은 투자자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당연히 이송하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투자를 하겠다고? 나한테?

*

-자기 지금 어디야? 밖이야?

“네. 볼일이 좀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자기 한국에 들어와 있는 거 또 누가 알아?

“송하 스케줄 조율 건으로 미팅하기로 한 영화사 사람들만 알아요. 어차피 내일 다시 중국으로 넘어갈 거라, 조용히 중요한 볼일만 보고 가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대답하면서 영화세트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끌벅적하다. 촬영을 준비하는 스텝들과 보초출연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중국에서의 일들로 복잡하던 머릿속이 찬찬히 가라앉는다.

홍보팀 박 팀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잘했어. 고양이 수호령 빵 터진 것 때문에 지금 언론사 기자들이 잔뜩 벼르고 있는 거 알지? 자기 한국 들어온 거 알려지면 인터뷰하자고 난리 날 거야. 귀찮아지기 싫으면 선글라스 꼭 쓰고 다녀!

“이미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 큰놈으로.

처음 방문하는 거라 정장을 꺼내 입었는데, 거기다 선글라스까지 더하니 꼴이 아주 희한하다. 나보다 더 희한하게 분장한 보조출연자들이 많아서 날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지.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넓은 세트장을 두 바퀴를 돌고 나서야, 겨우 발견했다.

느슨한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

오랜만에 보는 남조윤이다.

일부러 말 안 하고 찾아왔는데, 놀라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그래서, 그냥 가라고요?”

앞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남조윤의 촬영의상을 부탁해놓은 스타일리스트였다.

“아니, 무슨 스케줄을 이렇게 짜요? 허탕 치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제도 새벽 3시부터 불러서 온종일 땡볕에서 대기하게 만들고 한 씬도 안 찍더니!”

“남조윤 씨 매니저세요?”

“코딘데요, 왜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대화하던 남자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쉰다.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스케줄이 바뀌는 걸 어쩝니까. 원래 영화 촬영할 때는 현장 상황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거 비일비재해요. 탑스타도 대기하면서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뭐 그렇게 야단이세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누가 보면 아주 할리우드 스탄 줄 알겠네.”

저건 뭔데 말투가 저 모양이지?

“조감독님!”

아, 조감독.

근데 저 조감독은 말투가 왜 저 모양이야.

스타일리스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친다.

“대기하는 게 불만인 게 아니라, 현장 상황이 남조윤 씨 씬에서만 바뀌니까 이러는 거죠! 다른 배우들 촬영은 스케줄대로 가는데 남조윤 씨만 자꾸 캔슬되고 있잖아요, 지금! 크랭크 인하고 촬영장엔 매일같이 나오는데 고작 두 씬밖에 안 찍은 게 말이 돼요?”

“시나리오 수정 중이라 어쩔 수 없다니까요! 정 못 참겠으면 투자배급사 찾아가서 따지시든가 하세요. 바빠 죽겠는데, 진짜!”

“시나리오가 수정되면 배우한테 바로 피드백이 와야 하는 거···!”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촬영장을 찾아오면서 내가 기대했던 건, 남조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이었는데.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다.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뭐야, 왜 저래? 남조윤은 오늘도 촬영 없대?”

“그런 거 같은데? 며칠째야, 나 같으면 씨발, 좆같아서 엎었다.”

“남조윤 연기는 기가 막히게 하던데, 딱하게 됐네. 힘없는 게 죄다.”

수군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남조윤의 이름이 도마 위에 올라 다져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조윤은 스타일리스트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남조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제가 얘기할게요.”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조감독에게 물었다.

“그럼 다음 촬영은 언제 준비하면 됩니까?”

“아직 몰라요. 일단 기다려보세요.”

“그럼, 시나리오 수정본은 언제 받아볼 수 있습니까?”

“그것도 나오면 연락드릴 테니까 좀 기다려보시고요. 바빠 죽겠는데 미치겠네, 정말. 뭐 나오면 연락드릴 테니까, 아니, 근데 남조윤 씬 매니저 없어요?”

“있어요, 매니저.”

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남조윤과 스타일리스트가 나를 알아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감독 앞에 멈춰 서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조감독이 흠칫 놀란다. 나를 알아봐서 놀라는 건지, 지금 내 표정이 더럽게 안 좋아서 놀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옆에서 남조윤이 혈색 없는 입술을 달싹거린다.

“실장님, 중국에···.”

“미팅이 있어서 잠깐 들어왔어요. 놀래주려고 했는데, 제가 놀랐네요.”

대답하고, 조감독에게 물었다.

“박 감독님, 지금 어디 계세요?”

트레일러 문을 덥석 잡았다가,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던 남조윤과 스타일리스트가 멈칫한다.

“주차장에 제 미니밴 있으니까, 두 분은 거기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트레일러 안에서 좋은 얘기가 오갈 것 같진 않으니까.

남조윤한테 키를 건넸다.

키를 움켜쥔 남조윤이 몇 번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곧 다시 닫힌다.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뱃속에선 뜨거운 게 솟구치고 머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매일같이 나오는데, 두 씬밖에 못 찍었다고.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저 사람이 뭐라고 했었지.

재밌다고 했었나. 편하게 촬영하고 있다고.

“왜 나한테 말을······.”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대신 짧게 숨을 뱉었다.

“조금 있다가 얘기해요. 일단, 상황부터 제대로 알아볼 테니까.”

트레일러 문을 벌컥 열었다.

“누구세요? 여기 막 들어오시면 안 되는··· 어?”

가로막던 남자가 내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트레일러 안을 훑어보니 소파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박 감독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엉거주춤 엉덩이를 뗐다.

“어, 그, W&U 정선우 씨. 정 실장님 맞죠?”

“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박 감독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남조윤 씨 촬영이 잘되고 있나 싶어서 와봤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시나리오가 수정되는 중이라, 남조윤 씨만 촬영스케쥴을 못 잡는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

박 감독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스친다.

“그게, 처음이랑 상황이 좀 많이 바뀌었어요.”

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이 원래, 제작비가 35억짜리였는데.”

“압니다.”

“그런데 에이스에서, 그, 에이스 아시죠? 배급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안다.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투자배급사.

“거기서 연락이 왔어요.”

박 감독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박 감독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는지 투자배급사에서 러브콜을 보내온 게 시작이었다. 안 그래도 좋은 배급사를 찾아 헤매던 박 감독과 판 프로덕션이 덥석 그 손을 잡았다.

거기까진 축하할 일이다. 영화를 흥행시키기 위해선 상영관에 얼마나 많이, 오래 걸리게 하느냐가 중요하니까. 그리고 대형 배급사일수록 많은 상영관을 잡아주고.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에이스에서 투자자들을 끌어모아 줘서, 원래 35억이던 제작비가 잘하면 백억이 넘어갈 수도 있어요, 백억이! 그 돈이면 영화 퀄리티가 얼마나 달라지는 줄······!”

흥분해서 떠들던 박 감독이 내 표정을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아시겠지만 제작비가 늘어난다는 건 손익분기점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거고. 그래서 에이스 측에서 시나리오를 좀 더 흥행코드에 맞게 수정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특히 그, 남조윤 씨 비중이 너무 크다고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래서요?”

“국내 영화가 흥행하는데 스타 파워가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아시죠? 마케팅도 그렇고, 당장에 포스터만 봐도 출연배우들 얼굴 박아서 나가잖아요. 어쨌든 그래서 전문 작가들을 붙여서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하기로 얘기가 됐어요. 남조윤 씨한테는 참 미안한데, 작품 성공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수정본을 좀 보고 싶은데요.”

“그게 아직.”

“크랭크 인 들어가서 촬영이 진행 중인 거면, 완성은 덜 됐다고 해도 각은 다 나왔을 거 아닙니까. 그거라도 보여주세요.”

박 감독이 한숨을 푹 내쉰다.

골치 아프다는 듯이.

그리고는 태블릿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고.”

화면에 떠 있는 시나리오 수정본을 빠르게 넘기며 훑어봤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읽을 게 없었으니까.

태블릿을 도로 테이블에 던져놓고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남조윤 씨 배역이, 초반에 죽네요?”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그대로 튀어 나갔다.

그래도 미안한 표정이나마 짓고 있던 박 감독이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에이스에서는 남조윤 씨한테 위약금 주고 빼자고까지 했어요. 그냥 남조윤 씨 빼고 인지도 높은 배우로 교체하자고. 내가 그건 안된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시간 들여서 시나리오 뜯어고치고 있는 겁니다.”

남조윤 배역은 초반에 죽어 나가는 단역이 되고.

원래 남조윤한테 주어졌던 롤은 다른 배우에게 넘겨주고.

황당해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박 감독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아니, 근데 그쪽 실장님, 정선우 씨가 남조윤 씨 진짜 매니저도 아니잖아요. 남조윤 씨한테는 내가 직접 사과하고 설명할 겁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단역으로 가고, 이번 작품 대박 나고 나면 다음 작품 할 때는 내가 남조윤 씨 꼭 좋은 배역에다가···.”

“됐습니다.”

“예?”

“배급사에선 원래 위약금 주고 빼자고 했었다고요? 그렇게 하세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 영화 안 합니다.”

<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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