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28화 (128/218)

<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2) >

“어이구, 정 실장.”

이봉준 실장이 두툼한 뱃살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한참 전에 내려갔다더니만 여기서 뭐 해? 이건 무슨 그림이야?”

“허구한 날 본 그 그림이지, 뭐.”

서지준이 이봉준 실장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생각보다 유한 분위기에 안심했는지, 엿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서은교가 삽시간에 치와와로 바뀌었다. 안달 난 치와와로. 꼬릿짓이 손채영 앞에서 했던 것보다 더 요란하다.

친해지고 싶어, 손채영은 글렀으니 서지준이라도!

그런 열망으로 가득 찬 눈빛이랄까.

서은교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던 때였다.

“하여튼 남의 나라까지 와서 쪽팔리게.”

서지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임마, 네가 왜 쪽팔리냐? 같은 한국인이라?”

“거기다 동성동본이잖아, 형. 흔하지도 않은 성인데!”

“그러네. 그건 좀 쪽팔리겠다.”

정확히 이름을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누굴 가리키는지는 명백했다.

서은교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쪽 심정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닌데.”

입에 사탕을 넣었는지 한쪽 뺨이 불룩한 임주원이 혀를 찼다. 그의 뚱한 눈빛이 잠깐 서지준에게 닿았다가 돌아온다.

“적당히 좀 하지. 질투도 과하면 안쓰러워 보여요.”

흰자위까지 충혈된 서은교가 족제비 팀장을 홱 돌아본다. 도움을 청하려는 모양이지만, 족제비는 여전의 김현조한테 물어뜯기는 중이다. 심지어 이봉준 실장과 성 실장도 한 마디씩 보태고 있다.

나야 뭐, 구경하는 중이고.

예상대로 잘 돌아가길래.

결국, 모욕감으로 몸서리치는 서은교를 족제비 팀장과 실장이 잡아끌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서은교가 분통 터진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길래 손을 흔들어줬다. 뭐, 이 정도면 나름 훈훈한 결말인가.

“욕봤다.”

김현조가 내 등을 툭 쳤다.

“뭐, 중국까지 와서 별일을 다 겪네요.”

“일하다 보면 비일비재해. 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 있잖냐. 이 바닥에선 연예인 싸움이 매니저 싸움 되니까. 앞으론 박 터지게 싸울 일 더 많아질걸.”

“겁나네요, 그거.”

“그거 못 버티는 놈들은 다 떨어져 나가는 거고, 결국엔 기싸움에 이골난 사람들만 우글거리게 되는 거지. 나도 원래는 순한 얼굴이었어, 이 바닥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지.”

“저 같은 온실 속 화초는 버티기 힘든 세상이네요.”

농담처럼 말했더니, 김현조가 정색했다.

“뭔 헛소리야, 넌 누가 봐도 이 바닥 체질이구만.”

“암, 정선우는 기대되는 인재지.”

이봉준 실장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소리 들을 때까지 이 바닥에서 버틴다에 오백 원 건다.”

“받고, 난 오백 원 더 건다.”

서지준이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이만 들어가죠, 애들 기다릴······.”

레스토랑 안을 힐긋 보며 말하다가,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애들이 다른데 신경을 팔고 있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그리고 애들 앞에 정장을 입은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송하의 손을 붙잡은 채로.

뭐야, 저건?

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체 모를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오빠!”

날 보자마자 애들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걸 보니 저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십니까?”

남자는 중국인이었다. 내 손에 붙잡히자마자 알아듣지 못할 말로 더듬거리더니, 내 뒤쪽을 보곤 겁먹은 듯 뒷걸음질한다. 등 뒤가 시끌시끌한 게 다른 사람들도 곧장 날 따라 들어왔나 보다.

그때 불쑥, 임서영이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으아아, 이상한 거 아니에요, 오빠!”

“아니라고?”

이태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분 아들이 여덟 살인데, 송하 팬이래요. 사인받고 싶어서 울고불고했다길래 사인한 장 해드려도 괜찮은지 얘기 중이었어요. 지금까지 다 거절했는데 이분만 해드렸다가 문제 생길까 봐.”

“그럼 손은 왜 잡은 거야?”

“아, 손잡은 게 아니라 선물 받았어요. 푸링빙.”

이송하가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둥글넓적한 과자가 놓여 있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이징에 온 뒤로 광적으로 달려드는 팬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남자는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멤버 중에서 가장 중국어를 잘하는 이태희에게 통역을 부탁해 남자에게 사과하고, 남몰래 싸인 씨디도 한 장 챙겨주기로 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을 때.

임주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정 실장님, 아까 서은교 앞에서도 그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겁주지 그랬어요. 그럼 식겁해서 다음부턴 시비 걸 엄두도 못 낼 것 같은데. 진짜 무서···.”

임주원이 말을 하다말고 일행을 쭉 훑어본다.

그리고는 돌연 웃기 시작했다. 사탕 조각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 기침을 하면서도 웃는다. 저러다 울겠는데.

그가 끅끅거리며 말했다.

“우리 이 멤버로 있으면, 팬들한테 시달릴 일은 절대 없겠는데요?”

“네?”

“혹시 꽃다발 효과 알아요? 꽃다발 효과?”

아이돌 그룹한테 쓰는 말 아닌가? 예쁘장한 애들 여럿이 우글우글 뭉쳐있으면, 혼자 떨어져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예뻐 보이는 거.

그런데 그게 왜?

“이거 딱 꽃다발 효과 반댄데요? 인상파들이 다발로 모여있으니까 험악함이 열 배랄까.”

임주원이 성 실장을 가리켰다.

“봐요, 성 실장님은 사포보다 더 까칠할 것 같은 여우상이고.”

인정한다는 듯, 성 실장이 눈을 가늘게 접고 웃는다.

“그리고 김 실장님은 걸어 다니는 좀비 수준이잖아요. 이 실장님도 무표정일 때는 산도적 같고. 또 여기 덩치 큰 매니저분도 눈이 처져서 그렇지, 선글라스만 쓰면 건달 뺨칠 것 같고”

김현조와 이봉준 실장, 이관우를 차례로 쳐다본 임주원이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짚는다.

“그리고 정 실장님이야, 독보적이시고. 인상파의 거두.”

그 말에 넵튠 애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서지준은 이미 한참 전부터 숨넘어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웃는 중이다.

“진짜, 일부러 이렇게 모아놓기도 힘들겠다!”

뭐, 그건 동감하지만.

인상만 놓고 보면 연예인 쪽도 남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송하나 엘제이는 좀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고, 이태희도 대체로 무심한 표정이고. 서지준이야 차가운 도시 남자 롤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고. 임주원도 매끈하게 잘생겼지만, 가시 돋친 느낌이니까.

솔직히 여기서 순둥이 소리 들을만한 얼굴은 임서영뿐이지.

이 얘길 했더니, 이번엔 실장들까지 뒤집어졌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처음이라 분위기가 어색하진 않을까 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 테이블은 시종일관 웃음소리로 떠들썩했다. 합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 팀처럼.

그 속에 섞여서 함께 웃고 있으려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들 팀도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남조윤입니다.

건조하고, 미지근한 모래 같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레스토랑 입구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저예요. 저녁 먹는 중인데,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핸드폰 너머로 스텝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촬영 중이에요? 괜히 바쁠 때 방해했나 보네.”

-괜찮습니다, 대기 중이에요.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요? 가보지도 못하고, 궁금해 죽겠네요.”

상황이 이래서 남조윤 곁에 계속 붙어있을 순 없지만, 그래도 크랭크 인 때는 꼭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베이징에 온 다음 날 촬영을 시작해서.

-재밌습니다. 분장하는 것도, 연기하는 것도, 촬영장에서 대기하는 것도 재밌어요. 이렇게 규모가 큰 상업영화에서 연기하는 건 오랜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촬영 얘기가 나오니까, 남조윤의 목소리에 열기가 올라온다.

희미하게 들뜬 기색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입 끝이 올라갔다.

남조윤의 연기를 보고 현장 스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함께 시나리오를 보고 리딩하는 동안, 그리고 남조윤의 연기 연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감탄했었는데. 내 안목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뚫을 정도였는데.

젠장. 내 눈으로 보고 싶다.

남조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

“뭐 부족한 건 없고요?”

-지금도 넘칩니다. 실장님이 스타일리스트랑 메이크업아티스트 소개해주신 덕분에 편하게 촬영하고 있어요. 그리고 감독님이나 프로덕션 직원분들도 신경 많이 써 주시고.

다행이다. 소속사도 없고, 옆에서 케어해주는 매니저도 없으니 현장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었는데.

남조윤이 W&U와 계약했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눈앞에 2팀장의 얼굴이 어른거려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번 영화가 잘되면, 그 후에는···.”

뒷말을 집어삼켰다.

면접까지 봤다가 떨어진 사람인데. 희망고문 같은 게 될까 봐서.

“아니에요. 또 굶고 다니지 말고, 몸 챙기면서 하세요.”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중국에서 하시는 일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남조윤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 혼자 다짐했다.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그리고 남조윤의 연기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움직여야겠다고. 계속 이렇게 반쪽짜리 관계로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남조윤과 정식으로 함께 일할 날을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는 넵튠 멤버들과 다른 일행들이 보인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내 팀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주위를 훑어봤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고급 술집이라더니. 내부 치장이 호텔 뺨치게 화려하다. 방음도 완벽하고.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룸 몇 개를 지나쳤지만, 들리는 건 나와 직원의 발소리뿐이었다.

곧 직원이 검은색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일하면서 술집은 종류별로 들락거려봤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룸은 처음이다. 천장부터 바닥, 눈 닿는 곳마다 붉은색과 금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다. 그 위로는 뭉근한 조명 불빛이 오로라처럼 떠다녔다.

이런 데서 술 마시면 술맛이 끝내주나?

입술을 핥으며 둘러봤다. 테이블엔 이미 술과 안주가 세팅돼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없다.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잠깐 나갔나?

촉감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까, 깜짝이야.

고개를 홱 돌려보니, 테이블로 가려져 있던 상석 쪽에서 누군가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소파에 누워있었던 건지, 원래라면 깔끔하게 쓸어넘긴 상태였을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져 있다.

테이블을 더듬은 남자가 안경을 찾아 쓴다.

W&U와 연계된 중국 쪽 에이전트 소속 직원. 이름이···.

“지난번에 인사드렸었죠. 이량입니다.”

“아, 정선웁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둘이 마시는데 무슨 술이 이렇게 많습니까?”

테이블을 힐끔 보며 물었다.

두세 시간쯤 술잔을 부딪치면서 친분도 다지고, 중국 연예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장감 넘치는 정보들을 듬뿍 얻어갈 계획이었는데. 여기서 밤을 꼴딱 새워도 이 술은 다 못 마시겠다.

중국인들이 통 크게 대접하는 걸 좋아한단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량의 입 끝이 말려 올라갔다.

“둘이서는 다 못 마시죠. 같이 마셔줄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룸의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펄럭이는 차이나 드레스 자락을 봤을 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암전됐다.

노이즈 없이 선명한 시야.

고풍스러우면서도 이질적인 공간. 그리고 박 국장과 송 기자.

미래라는 걸 인식하고 나서도, 잠깐동안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에 봤던 새빨간 차이나 드레스가 눈에 밟혀서.

안 되지.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상념들을 눌러뒀다. 지금은 이 미래에서 어떤 정보를 얻느냐가 최우선이니까.

20년 후의 미래라.

새로운 미래를 보게 된다면 이송하가 출연하는 드라마나 남조윤이 출연하는 영화, 그 둘의 성공 여부에 대한 것이길 바랐는데. 이 고정된 미래에선 그런 정보들을 얻긴 힘들 것 같고.

그럼 이번엔 뭐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걸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옆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탁자 위에 둥둥 떠 있던 홀로그램 창이 미끄러지듯 눈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와 숫자 따위가 잔뜩 적혀있다.

그리고 맨 아래에, 증명사진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여기 있네요.”

미래의 내가 말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사람들.”

있게 한 사람들이라고?

눈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시야가 돌아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사진을 확인하려고. 조금 전의 말이 정확히 어쩐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래의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인 건 분명하니까.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낯이 익은 얼굴도 있다.

저거. 독특한 안경을 쓰고 있는 중년 남자. 나이가 들고 인상이 좀 변하긴 했지만, 조금 전에 봤던 중국 에이전트 직원 이량이고.

그 옆에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2팀장, 염병, 2팀장이 보인다.

그리고 또 한 명.

인상 좋은 익숙한 얼굴. 그리고 그림 같은 미소.

저건 배신자랑 닮았는데.

아니, 잠깐. 닮은 게 아니라 어딜 봐도 나이 먹은 최건영이다.

뭐야, 이거?

이게 대체 무슨 거지 같은 조합이지? 내 인생의 블랙리스튼가?

멍하니 홀로그램을 쳐다보고 있는데, 미래의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제 팀원들이죠.”

뭐?

<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들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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