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7) >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우르르 옆으로 피한다.
그 사이로 손채영이 걸어왔다.
느슨하게 여민 가운 속으로, 슬쩍슬쩍 흰색 수영복이 내비쳤다.
“어후, 이거 채영 씨 때문에 촬영되겠나 싶은데요?”
우 감독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촬영 스텝들과 보조출연자들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얼굴로 손채영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구석에는 경호원들이 핸드폰을 꺼내 드는 구경꾼들을 막느라 몸싸움을 벌이고 있고.
치와와가 된 서은교가 손채영한테 꼬리를 흔들었다.
“선배, 공항에서 보고 처음이네요! 카메오 출연하시는 거예요?”
진짜 기억 하나도 안 나나 보네.
“그동안 선배 만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
“나 기억 안 나요?”
손채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뒤통수에 스파이크를 날린 사람치곤, 참 태연한 얼굴이다.
“기, 기억이요?”
“얼마 전에, 7층 복도에서, 술 마시고. 그때 우리 봤는데.”
“저랑요? 어, 그, 그날 제가 필름이 끊어져서···.”
서은교의 눈알이 지진을 일으켰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삑사리까지 났다. 서은교가 그러거나 말거나, 손채영은 우 감독과 촬영 동선 이야기를 하면서 멀어졌다.
“저기요, 이봐요!”
서은교가 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날 그쪽이 나 발견했다던데. 거기 채영 선배도 있었어요?”
“있었어요.”
“내, 내가, 그날 술 취해서 혹시 선배 앞에서 말실수했어요?”
“아아······ 말실수.”
“했어요, 안 했어요? 말해봐요, 빨리!”
서은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하긴 했죠. 말실수라기보단 본심이 나온 것 같던데.”
“내가 뭐, 뭐라고 했는데요?”
“그게, 너무 모욕적이고 기분 나쁜 말들이라.”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누구랑 잤느냐느니··· 그쪽이랑은 평생 상종도 하기 싫을 만한, 그런 말들이어서. 더 이상은 입밖에 못 꺼내겠네요.”
“저, 정말이에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거든요.”
서은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라고 했길래 저래요?”
선베드에 드러누운 손채영이 한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서은교가 똥 싼 치와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보고 있다.
“뭐, 크게 거짓말은 안 했는데요.”
손채영이 있는 데서 모욕적인 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대상은 나였지만.
“그런데··· 카메오 안 한다면서요?”
“그쪽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감독님이 착각한 거지.”
손채영이 선글라스를 끼며 말했다.
나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술만 달싹이고 말았다. 목이 막힌다. 손채영이랑은 워낙 얽히고설킨 게 많아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걸 풀어야 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다.
손채영한테 사과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글쎄. 인면수심의 과거가 기억에 선명한데. 정말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다고 해도, 과연 저 여자랑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을까 싶다.
그냥 눈앞에 안 보이는 게 제일 속 편한데. 이렇게 엮이지 말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손채영이 다시 말했다.
“여긴 나 때문에 온 거예요.”
“그래요? 그럼.”
됐고.
돌아서려는데 손채영 목소리가 이어졌다.
“쪽팔리잖아요. 내가 그쪽하고 일하겠다고 했던 거 회사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그쪽이 밖에서 무시당하고 욕이나 얻어먹고 다니면 내가 뭐가 돼요? 내 안목이 거지같이 보이잖아요!”
“아.”
“하여튼 그래서 온 거예요. 그런데 뭐, 알아서 했네.”
손채영이 다시 서은교 쪽을 보곤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리고는 짧은 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목덜미를 만졌다가, 선베드의 팔걸이를 몇 번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뜸들이듯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인다.
선글라스로 얼굴 반을 가려서 표정은 알 수가 없다.
“저번에······.”
손채영이 막 말문을 열었을 때.
뒤에서 타닥타닥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송하다.
무슨 멍석말이 당하는 사람처럼 가운 앞섶을 빈틈없이 여며놨다.
겉으로 드러난 건 티 하나 없이 뽀얀 팔다리 정도.
아까 손채영을 보던 시선들이 이번엔 이송하한테 집중됐다. 넋 빠진 얼굴이 한둘이 아니다. 구경꾼들과 경호원이 있는 곳에서는 또 몸싸움이 벌어졌다. 어째 아까보다 소란이 더 크다.
저들 중 누가 짐작이나 할까.
이 시점부터 여긴 평화로운 수영장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걸.
나는 심호흡을 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 무조건 사고가 터지는 두 명 사이에 끼어있으니, 털끝까지 긴장하고 만반의 대비를 갖추어도 부족하다.
“오빠, 저 수영복 갈아입고 왔는데요.”
손채영을 못 알아봤나 보다.
시선에 둔감한 편인 이송하가 답지 않게 주위를 의식하며 말했다.
“이거 입어보니까, 좀.”
“좀?”
“너무 야한 거 같아요. 살이 너무 많이 보여요. 코디 언니들은 괜찮다는데, 오빠가 한번 보시고 어떤지······.”
이송하가 깍지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뭇머뭇 말하던 중.
“이래서 아마추어는.”
갑자기 선베드에 누워있던 손채영이 벌떡 일어났다.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고, 다른 손으로 가운 끈을 푼다.
삽시간에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흰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몸이 훤히 드러났다. 사방에서 감탄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졌다.
나도 한순간 그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왜, 여기 있어요?”
이송하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손채영을 번갈아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왜, 수영장 네가 전세 냈어?”
“촬영팀에서 전세 냈어요.”
“나도 카메오 촬영하러 왔어, 보면 몰라?”
손채영이 허리에 한 손을 걸치며 말했다.
가운에 칭칭 감겨있는 이송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그게 이송하의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갉아먹은 건 분명하다. 공항에서 손채영을 만난 이후로 계속 손채영을 의식하면서 견제하던 게, 안전핀 풀고 던진 수류탄처럼 터져버렸다.
“저 아마추어 아니에요.”
이송하가 박력 넘치게 가운 끈을 풀어헤쳤다.
그리곤 보란 듯이 양손을 허리에 턱 얹는다.
탑스타 이소희 배역에 맞춰 준비한, 새까만 모노키니 수영복.
이송하가 왜 야한 것 같다고 했는지 알겠다. 노출도만 보면 비키니를 입은 손채영이 더 높은데, 이송하가 입은 모노키니는 끈을 이리저리 교차시켜놓은 디자인이 묘하게 보기······.
그만해, 이 미친놈아!
이럴 때가 아니야. 여긴 전쟁터다, 전쟁터.
억지로 눈을 돌렸다.
“이야, 분위기 좋네! 둘이 벌써 감정 잡아요?”
털북숭이 우 감독을 보니 마음이 급격히 안정됐다.
다행히 이송하와 손채영도 우 감독 덕에 휴전상태에 돌입했다. 우 감독이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사각프레임을 만들어 이쪽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는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손채영이 카메오로 들어온 게 긍정적인 효과를 줄지도 모르겠다. 대본리딩 때 장 작가가 그랬지. 대본을 뛰어넘어서, 좀 더 생생하고 날 것 같은 느낌을 줬으면 좋겠다고.
저 모습을 보면 장 작가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그림 좋네요. 정말 좋아.”
우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잘 빠지겠는데요? 벌써 머릿속에선 편집까지 다 끝났어요.”
“다행이네요. 중요한 첫 씬인데.”
대답했더니, 우 감독이 날 쳐다본다.
의뭉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래서 말인데요, 실장님.”
“네.”
“실장님도 카메오로 얼굴 좀 비춰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뭐?
“진짜 하시려고요? 촬영?”
메이크업아티스트가 내 얼굴에 팩트를 찍어 바르며 물었다.
“해야죠. 송하랑 붙는 씬이면 분량도 늘어날 거고. 감독이 머릿속에서 편집까지 다 끝냈다는데.”
이미 팔릴 대로 팔린 얼굴. 카메오로 몇 초 나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이걸로 이송하 첫 씬 분량이 늘어나고 임펙트가 더해진다면야,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
의상까지 갈아입고, 우 감독 쪽으로 다가갔다.
우 감독과 월메이드 프로덕션의 제작팀원들이 모니터 앞에 모여있다. 나도 사람들 뒤에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송하와 손채영, 서은교가 대사를 주고받는다.
코앞에 있는 현장은 반사판들과 조명, 레일 위를 달리는 카메라, 붐 마이크, 허공에서 움직이는 지미집 카메라 따위로 정신 사나운데. 모니터에 비치는 건 완성된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서로 탑을 다투는, 자존심 센 여배우 둘의 요란한 기싸움.
그리고 참다못해 끼어든 고고한 상속녀.
각자의 배역을 떠올리며 화면을 주시하는데.
“NG! 처음부터 다시 갑시다!”
우 감독이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교 씨, 왜 그래요?”
흡족해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영 마음에 안 차는 얼굴이다.
“왜 그렇게 기가 죽었어? 혹시 몸 안 좋아요?”
“아니에요, 감독님! 이번엔 제대로 갈게요! 죄송합니다!”
서은교가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낯빛이 거무죽죽한 서은교가, 마찬가지로 표정이 안 좋은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안 가 카메라가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 감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나쁘진 않은데. 다른 둘이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가, 혼자 묻히네.”
“묻히는 수준이 아니라 뭉개졌는데요?”
웰미디어 제작 피디가 작은 소리로 거들었다.
“손채영 씨랑 이송하 씨가 대사칠 땐 씬에 긴장감이 넘치다가, 서은교 씨만 끼면 죽는단 말이야. 디렉션을 줘도 소용없고. 대사 좀 쳐내고 분량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리딩 때는 진짜 잘했는데. 실전에 강한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럴 수도 있고. 뭐, 괜찮아. 다른 두 명만으로도 씬은 풍성하니까.”
곧 화제가 좀 더 흥미로운 쪽으로 넘어갔다.
“이송하 씨는 현장감도 좋네. 아주 괴물 신인이야, 괴물 신인.”
“연기가 어떻다저떻다 입소문이 워낙 화려하길래, 전 딱 반만 믿었거든요. 이 바닥이 워낙에 과대포장이 심하니까. 근데 현장에서 실물로 보니까 오히려 소문이 부족한데요? 대본 속의 이소희가 저기 있네요.”
내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때.
제작 피디가 감탄했다.
“손채영 씨는 뭐, 말이 필요 없고요. 장 작가님이 원래 이소희 배역에 손채영 씨 생각하고 쓰셨다면서요?”
“그랬었지.”
“그거 들었을 땐 이미지가 좀 안 맞지 않나 했는데, 막상 보니까 손채영 씨로 갔어도 좋았겠는데요? 둘을 같이 놓고 보니까 주인공보다 카메오가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게.”
“채영 씨는 경력이 얼만데.”
“이송하 씨가 절대 못 하는 게 아닌데도, 손채영 씨가 워낙···.”
누군가 제작 피디의 등을 세게 찔렀다.
뒤돌아본 제작 피디가 날 발견하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정 실장님, 그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내 표정이 좀, 많이 별론가보다.
제작 피디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그녀는 헛소리였다느니, 이송하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느니, 혓바닥에 꿀을 바르고 최선을 다해 칭찬한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니터 안에서 움직이는 이송하를 보며 궁리했다.
이왕 카메오가 된 거, 최대한 이송하를 살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번 씬에서 정 실장님 들어가는 걸로 하죠.”
“전 무슨 역할이에요? 역할을 안 알려주셔서 준비도 못 하고.”
우 감독이 두툼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준비 안 하는 게 좋아요. 괜히 준비하고, 생각하고, 그러면 아마추어들은 연기하는 티를 너무 내서 어색하거든요. 대사 없이 리액션 위주로 딸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역할은 손채영 씨 매니저예요.”
“알겠······ 네?”
“손채영 씨 매니저요. 아,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우 감독이 이송하와 손채영한테 다가갔다. 우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두 명의 얼굴이 묘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날 쳐다본다.
이송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금 전까지 이소희에 씌어있더니.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러지?
손채영은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헷갈리는 표정이다.
뭐야, 대체.
곧 우 감독이 부르길래 다가갔다.
이송하가 입을 벙긋거린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우 감독이 먼저 당부했다.
“카메오 씬이니까 송하 씨랑 채영 씨, 두 분은 애드립 많이 하셔도 돼요. 최대한 리얼하게 갑시다. 속된말로, ‘이 바닥에선 내가 제일 미친년이다.’ 이런 느낌으로. 회사 선후배 사이라 서로 막말하는 게 불편하긴 하겠지만, 눈 딱 감고.”
불편하긴.
우 감독이 날 보고 덧붙였다.
”그리고 정 실장님은 리액션만 실감 나게 잘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 배우분들이 할 테니까.”
우 감독이 나한테 주문한 건 하나였다.
손채영을 찾으러 온 것처럼 옆으로 다가가라는 것. 그 뒤로는 배우들이 끌고 가는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나.
이송하와 손채영의 연기를 지켜보며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길 한참.
마침내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마른침을 넘기며, 입씨름 중인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손채영을 찾으러 왔다가 발견한 상황이니까 발걸음은 좀 빨라야겠지. 젠장,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손채영 매니저야. 감정이입 안되게.
그렇게 카메라의 프레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오빠!”
손채영이 반색하며 붙잡았다.
내 팔을.
“마침 잘 왔어, 이리 와봐! 저게 지금 나한테 뭐랬는 줄 알아?”
한 손으론 이송하를 삿대질하며, 다른 손으론 나를 확 끌어당긴다.
얼떨결에 손채영의 앞을 가로막은 채 이송하를 쳐다봤다.
그다음 일은 너무 순식간에 벌어졌다.
얼굴로 칵테일이 날아왔고, 차가운 레몬조각이 내 뺨에 철썩 붙었다.
그리고 우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NG!”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7)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