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6) >
술이 확 깨네.
만날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저건 미친년이다.
“그럼 됐습니다.”
“그걸로 끝이에요?”
다시 걷는데 손채영이 뒤에서 물었다.
“끝입니다. 안 한다면서요.”
“이런 건 세 번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갈공명이야?
저 여자를 우리 네쌍둥이랑 비교하고 싶진 않은데, 정말 그러고 싶진 않은데. 하는 짓이 쌍둥이들이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보다 더하다. 미운 네 살을 뛰어넘은, 죽이고 싶은 다섯 살.
그래도 애들은 어린 맛에 귀엽기라도 하지.
“안 한다는 걸 뭘 세 번씩이나. 그런 시간 낭비를 왜 합니까.”
“다들 그렇게 해요! 세 번이 아니라 삼십 번, 삼백 번도 해요!”
“전 안 합니다.”
“왜요, 두 번째나 세 번째에선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저건 정말 미친년이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취하긴 저쪽이 취했나.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내가 자기한테 카메오 출연 한 번만 해달라고 읍소하며 매달리길 바라는 건가? 그게 보고 싶어서 저러나?
지금껏 사람들한테 굽실굽실 부탁만 받으면서 살아와서 그런 게 당연한 줄 아나 본데, 나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나 본데, 잘못 봤다. 이 카메오 건이 나한테 그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문제였더라도 내 답은 같았을지도 모르고.
“전 더 부탁할 생각 없습니다.”
“왜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손채영 씨한테는 부탁하기 싫으니까요.”
싸늘한 침묵 속에서 손채영이 날 쳐다봤다.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턱에 힘이 들어간 게 보인다.
지난번처럼 손이라도 날아오려나.
그래, 온종일 저 여자 신경 쓰느라 나도 피곤했다. 터질 고름은 빨리 터뜨리는 게 낫지. 이번엔 케이크를 던지면서 내 편을 들어줄 이송하도 없으니, 알아서 내 뺨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됐어요. 이 얘기 말고 딴 얘기 해요.”
꽉 다물려 있던 턱이 풀리고, 표정은 태연히 가라앉는다.
손채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딴 얘길 하자고.
“얘기요. 우리가?”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지난번에···.”
“손채영 씨.”
목소리를 뚝 끊었다.
서로 말 길어져 봤자 기분만 나쁜 사이에, 왜 얘길 하려고 하지?
“우리가 서로 얘기를 나눌 사인 아닌데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왜. 이송하 때문에 그래요?”
이번에야말로 손채영의 눈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적막하고 싸늘한 복도에 손채영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내 작품, 내 광고, 걔도 내 거 가져갈 만큼 가져갔잖아요! 내가 그것 가지고 걔 머리채라도 잡았어요? 걔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 그럼 그거 받고 계산 끝난 거···!”
“계산은 끝났다고 치고.”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얘길 하려면, 시작은 사과가 돼야 맞는 거 아닙니까?”
“사과?”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건 아니니까. 손채영 씨 때문에 송하는 하마터면.”
이송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손채영의 눈빛이 확 사나워졌다.
“걔한테 뭘 하라구요? 난 그런 거 안 해요.”
“왜요?”
“난 원래 그래요!”
눈싸움하듯 손채영의 눈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무슨 영화를 얻겠다고 계속 얘기하고 있는 거지.
한숨을 쉬는데, 손채영의 뒤쪽, 엘리베이터 옆에 누군가 서 있다.
처음엔 이송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서은교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곳에 기대선 채, 나와 손채영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손에는 와인병 모가지를 잡은 채로.
내 시선을 따라간 손채영이 서은교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보는 눈이 있는 데서 나랑 입씨름할 생각은 없는지, 곧 나를 일별하고 서은교 쪽으로 가버린다.
“선배. 저 선배랑 와인 한잔 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서은교가 진드기처럼 손채영한테 달라붙는다.
이미 어디서 한잔하고 왔는지 구두를 신은 발이 휘청거린다.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상담하고 싶은 것도 있고, 혹시 시간···.”
“피곤해서.”
손채영이 서은교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서은교가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 등을 돌려 내 객실을 찾았다.
내일부터 자비 없는 일정이 시작될 테니 오늘은 일찍 잠들어야지. 술기운 탓에 몸도 늘어지지만, 손채영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피곤하다. 킹사이즈 호텔 침대에 간절히 파묻히고 싶다.
“사람 봤으면 인사는 하죠? 연예인이나 실장이나 똑같네.”
무슨 날인가.
오늘 게자리 운세엔 이런 게 쓰여 있나 보다.
‘미친년들을 조심하세요’
“손채영 선배랑 그쪽이랑 사이 되게 안 좋은가 봐요? 막 목소리 커지고 그러던데? 이송하랑도 별로인 거 같던데. 맞죠? 하긴, 이송하가 나처럼 선배한테 귀여움받을 스타일은 아니지.”
코앞까지 다가온 서은교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한잔 마시고 온 듯 풀어진 눈에, 악의가 울컥 넘쳤다.
“이송하 걔, 누구누구랑 잤어요?”
“······뭐라구요?”
“갑자기 광고에 드라마에, 그것도 겨우 작품 하나 성공한 신인한테 가기엔 굵직 굵직한 것들만. 뭐가 없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견적이 나오는데, 뭘.”
가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더럽힌다.
목구멍이 따갑다.
“이봐요, 서은교 씨.”
“W&U 백대표가 대놓고 밀어줬다는 얘기도 있던데, 대표랑도 잤나? 아님, 그쪽이랑 스캔들 났던데 그쪽이랑도 잤어요? 와, 나이도 어린 게 일 잘하네.”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그쪽은 그런 식으로 일 땁니까?”
눈살을 확 찌푸렸더니, 서은교가 겁먹은 것처럼 흠칫 놀란다.
그리곤 금방 쌍심지를 켜며 소리친다.
“뭐? 야, 너 지금 나보고 뭐라고 했어? 돼지?”
“야?”
“그래, 야. 사람들이 한류스타, 한류스타 하면서 세트로 대접해주니까 저도 스탄 줄 알아? 지난번에도 감독작가랑 있는 친한 척은 다 하더니. 제 담당 연예인이 통나무처럼 뻣뻣하면 저라도 고개 숙이고 다녀야지, 이건 뭐 한술 더 뜨네.”
와인병 주둥이가 내 가슴을 쿡쿡 찌른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이렇게 화가 난 게 얼마 만이지.
“이보세요, 주제를 알아야지. 넌 그냥 매니···!”
퍽, 소리가 났다.
뒤통수에 스파이크를 얻어맞은 서은교가 내 쪽으로 넘어졌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더니 서은교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복도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이거 미친년 아냐?”
손채영이 발끝으로 서은교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린다.
미동도 없다. 죽었나?
“나한텐 말 잘하더니, 왜 듣고만 있어요?”
손채영이 날 쳐다보며 물었다.
“나랑은 얘기하기도 싫다더니. 이거랑은 얘기가 하고 싶었나?”
“막 뭔가 하려던 참이었는, 아니 그보다 지금 무슨···.”
“쳤어요, 왜요. 또 뭐라고 하게요?”
아니. 어쩌면 내가 쳤을지도 모르는데, 뭐.
살펴보니 멀쩡히 숨 잘 쉬고. 웅얼거리는 거 보니 괜찮나 보다.
근데 이거 완전범죄로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런 게 고개를 숙이라 마라야? 그쪽이 내 매니저였으면 이건 죽었어요. 아니, 애초에 이런 헛소리를 들을 일도 없고. 내 말 듣고 있어요?”
“네.”
“안 듣고 있잖아요! 무슨 생각해요!”
“이 폐기물 처리할 생각 합니다.”
“처리는 무슨.”
손채영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경호원 불러요. 여기, 이름 뭐야, 하여튼 누가 술 퍼먹고 7층 복도에 자빠져 있으니까.”
저 할 말만 하고 뚝 끊더니, 다시 팔짱을 끼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까 말하려던 건데. 그쪽도 나한테 잘못했잖아요.”
“잘못?”
“거짓말했잖아요! 나한테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었을 때, 팀장님이 시킨 거 아니라고, 옆에 없다고 하더니. 다 있는 자리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했다면서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말꼬리를 뚝 자른 손채영이 대뜸 소리친다.
“그쪽도 그럼 나한테 사과해요!”
그런 일이 있었지.
손채영이 내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홱 돌아섰다.
“내가 이걸 왜, 짜증 나, 진짜!”
그리고 성큼성큼 멀어진다.
*
[‘고양이 수호령’ 이송하 방문에 중국 공항 마비?]
[이송하 차세대 한류스타 예약, 중국 활동 청신호]
[고양이 수호령 방영 시작, 동영상 사이트 누적조회수 5천만 돌파!]
[이송하 한류스타 만든 미다스의 손, 정선우 효과 어디까지?]
“팀장님, 보내주신 기사 봤는데요. 다 좋은데 마지막은 뭐예요.”
-뭐긴, 지금 한국에 난리 났는데 자기도 덩달아 난리 난 거지.
핸드폰 너머에서 박 팀장이 시원하게 웃었다.
홍보팀이 퇴근도 못 하고 연일 회의 중이라는데, 좋은 일 때문이라 그런지 웅성거리는 배경음이 다들 밝다.
-박도진이랑 성도원 스캔들 연달아 터지면서 국내에 중국 자본 들어오던 게 주춤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 바닥 사람들 걱정 많았거든. 한류열풍까지 주춤할까 봐. 근데 고양이 수호령이 터지는 바람에 분위기가 확 반전될 판이라니까? 회사도 지금 축제 분위기고.
“한국에서 얼마나 난리가 났는진 몰라도, 여기만큼은 아닐걸요.”
말하면서, 프로모션 현장을 쳐다봤다.
이송하와 서지준을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 오랜만에 보는 신태균 감독과 홍주미 작가. 고양이 수호령을 만든 핵심 인물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인터뷰에 대답하고 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이다. 그럴 수밖에.
원래는 기자들과 백여 명의 팬들만 모이기로 했던 행산데, 갑자기 장소도 바뀌고 규모가 열 배로 커졌다. 팬들이 주최측인 화이TV를 테러수준으로 괴롭혔다나. 지금 아니면 언제 배우들 얼굴 보냐고.
그 결과, 천 명쯤 되는 팬들이 몰려와서 객석을 채우고 있다.
마침 이송하가 마이크를 들었다.
환호가 터진다. 이송하의 입에서 프로모션을 위해 준비한 유창한 중국어 멘트가 흘러나오자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국내에서도 행사는 엄청 다녔지만, 이만큼 분위기가 열광적인 건 또 처음이다.
심지어 군대에 위문 공연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 중국 반응이 그 정도야?
“팬들 비명 지르는 소리 안 들리세요? 난리 났다니까요. 베이징 도착한 뒤론 계속 경호원한테 둘러싸여서 호텔이랑 차, 목적지만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에요. 사람들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웬일이니, 웬일이야. 지준이만 그런 게 아니라 송하도?
피부에 제대로 와 닿질 않는지, 박 팀장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나도 그랬다.
피로에 절어서 호텔 침대에 누웠는데도 잠이 안 왔을 정도로.
가슴이 묘하게 벅차오르고 손발이 근질근질해서 한참이나 호텔 방을 돌아다니다가, 새벽 늦게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베이징의 휘황한 야경을 쳐다보고 있었을 정도로.
무대 위에 선 이송하를 바라봤다.
좀 흥분한 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의연해 보인다.
“네. 송하도 반응 좋아요. 난리예요.”
-완전 겹경사네, 겹경사야!
“덕분에 덩달아 넵튠 인지도도 올라가고, 앨범도 꽤 팔리고 있다나 봐요. 그래서 김 실장님도 팬 미팅 일정 조정하느라 정신없어요.”
-넵튠까지 중국에서 잘되면 정말 올해 운수대통인 건데! 일단 지금 기세 몰아서 지준이랑 송하부터 한류스타로 확 박아야지. 자긴 현장에서 보고 듣는 소스들 바로바로 토스 좀 해줘.
“네, 언론 잘 부탁드릴게요.”
-기대하고 있어. 자기들 중국 일정 끝내고 인천공항 딱 도착했을 때, 아, 이게 바로 금의환향이구나, 하게 만들어놓을 테니까.
“MMTV인데요, 베이징에 체류하시는 동안 프로그램 섭외를···.”
“실장님! 정선우 실장님! 중국 예능프로 만들고 있는 한국 외주 PD인데요. 이송하 씨 중국 예능 출연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아직 픽스된 거 없으시면 저랑 얘기 좀···.”
“잠깐만요! 국민신문 베이징 특파원입니다! 인터뷰 잠깐만···!”
“지금 5분만! 정선우 씨, 멘트 하나만 부탁···!”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거의 삼십 번쯤 붙들렸다.
중국 쪽 매체는 쥐꼬리만 한 중국어 실력이랑 몸짓으로 떨쳐냈는데, 한국어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무슨 무슨 신문사 특파원들. 그리고 중국 방송국에서 외주로 일하는 한국 PD, 작가들.
“인터뷰 일정이나 방송출연 건은 계속 정리 중이라, 끝나는 대로 중국 측 에이전트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중국 매체보다는 저희랑 꼭 먼저 부탁드립니다!”
명함을 한 무더기 받아서 겨우겨우 무대 뒤로 들어갔더니, 이봉준 실장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야, 정선우 인기 많네.”
“밖에 나가보세요. 실장님은 영혼까지 빨릴걸요.”
“나야 뭐 그냥 서지준 매니저고, 넌 유명인사 아냐. 근데 너 혹시 중국에서도 유명해지는 거 아니냐? 중국사람들 미신 같은 거 좋아하잖아. 운 좋은 사람도 엄청 좋아하고.”
“됐어요.”
손사래를 쳤더니, 이봉준 실장이 배를 잡고 더 크게 웃는다.
저 양반도 제정신은 아냐.
이봉준 실장은 금방 화이TV 쪽 관계자랑 떠들었다. 좀 전에 만났는데 둘 다 친화력이 얼마나 좋은지, 형제 수준이다. 이젠 술자리를 마련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정선우 실장님.”
안경을 쓴 말쑥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인사를 했는데··· 아, W&U와 계약 중인 중국 에이전트 관계자다. 중국인이라는데, 한국어가 유창해서 의사소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앞으로 이송하 씨 중국 활동이 많아지실 것 같은데, 실장님이랑 저도 자주 보겠네요.”
“그렇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저희가 해야죠. 날 잡아서 술 한잔 어떠십니까? 다른 실장님들께는 한 번씩 인사드렸는데, 정 실장님은 이번이 처음이시니까요.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연락주세요.”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프로모션이 끝났다.
수트를 빼입은 서지준 옆에서, 이송하가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무대를 내려온다. 바닥에 질질 끌릴 만큼 긴 드레스를 입은 게 처음인 데다 빨리 오려고 하다 보니, 걸음걸이가 뒤뚱뒤뚱한 게 웃긴다.
“천천히 와, 천천히. 그러다 밟고 넘어지겠다.”
“오빠, 저 중국어 멘트 하나도 안 틀리고 잘···!”
칭찬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덥석 끌어안겼다.
서지준한테.
요즘 왜 이렇게 날 끌어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여, 정 실장님! 나 어땠어요?”
“멋있었어요. 근데 좀 놓죠. 기자들이 찍고 있는데.”
플래시 세례수준이라고.
그리고 이송하는 무슨 새치기당한 사람처럼 황망하게 서 있고.
“얌마, 네 매니저는 나 아니냐?”
이봉준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 다가왔다.
“감격해서 안을 거면 날 안아야지.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더니만!”
“선우 씨 덕에 내가 한류스타 됐잖아. 있어봐, 형은 두 번째야.”
이봉준 실장이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필요 없어, 임마. 송하야. 엄마 뺏긴 얼굴로 섰지 말고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포옹 한번 할까?”
“싫어요.”
“어, 그럴 줄 알았어.”
이송하한테 단칼에 거절당한 이봉준 실장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서지준을 쭉 밀어내려는데 그가 이봉준 실장처럼 웃으며 말했다.
“선우 씨, 내가 지난번에 빚진 거 몸으로 갚겠다고 하나 달아놓으라고 한 거 있잖아요.”
“네. 긴히 써먹으려고 아끼는 중인데요.”
“하나 더, 아니, 두 개 더 달아놔요. 내가 세 번 출동할 테니까.”
그냥 좀 더 안고 있지 뭐. 좋은 날인데.
“야, 너 공수표 막 날린다? 이놈이 뭘 부탁할 줄 알고?”
“통 크게 날려야지! 이제 한류스탄데!”
좋다고 서로 킬킬거리고 있는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과 헤어져서, 이송하와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접근하는 언론매체와 정체 모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경호원이 대기실 앞까지 밀착상태로 따라왔다.
이송하와 대기실에 같이 들어가서 안을 쭉 살폈다.
숨어있는 변태나, 카메라 같은 건 없다.
“옷 갈아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네.”
문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뭔가가 와락 덮쳐왔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하고, 그런 거.
그리고 곧장 문에다가 이마를 처박았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이마를 감쌌더니, 등 뒤에 업히다시피 매달려있던 이송하가 화들짝 놀라 떨어진다.
“오빠, 오빠, 머리 괜찮으세요? 이마가 빨개요!”
“···깨지진 않았고?”
“그,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너 대체 뭐······.”
기가 막혀서 돌아보려는데, 밖에 있는 경호원이 문을 두드렸다.
안에 무슨 일 있습니까? 들어갈까요? 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재빨리 괜찮다고 대답했을 때였다.
뒤에서 이송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스 밟고 넘어졌어요. 죄송해요.”
“너 분명 저쪽 끝에······ 넘어졌다기보단 날아온 거 같은데.”
“아니에요, 넘어졌어요.”
그리고 내 눈치를 보더니, 변명하듯 한 마디 덧붙인다.
“드레스가 잘못했네.”
*
나와 이송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넵튠 애들은 나름 베이징 구경도 하는 모양이던데, 우리한텐 꿈 같은 소리였다. 분 단위로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모자라서 스케쥴 끝나면 잘 시간을 쪼개서 로열패밀리 대본연습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열패밀리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 동선에 선베드 걸리는 거 같은데요! 다시 체크할게요!”
“풀 바에 칵테일 세팅 다 됐습니다!”
촬영장은 호화의 끝을 달리는 호텔 야외 수영장.
출연자는 이송하와 현지 섭외한 수많은 보조출연자.
거기다 서은교를 끼얹었다. 젠장.
이송하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면서 수영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가운을 걸친 서은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호텔 복도에서 뻗은 서은교를 경호원한테 인계한 뒤론 처음 본다.
그날 일은 얼마나 기억하는 거지?
“저기요, 이송하 수영복 뭐 입어요?”
필름 끊겼나 보다.
“비키니? 레쉬가드? 모노키니? 뭐 입느냐고요.”
“그걸 왜···.”
“정 실장님!”
날 찾는 목소리에, 서은교가 작게 욕지거리를 하고는 급히 웃는 얼굴을 했다. 돌아보니 가슴 털을 시원하게 드러낸 우 감독이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정 실장님이 카메오 건 다 해주셨다면서요? 이거 우리가 받기만 해서 어쩌나.”
“뭘요. 화면에 잘 나오게만 부탁드려요.”
“이거야 발로 찍어도 그림이죠, 뭐. 의상이 수영복인데!”
음? 서지준은 수영복 얘긴 없었는데.
그럼 지금 같이 촬영하는 건가, 했을 때였다. 옆에서 나를 고까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서은교가 갑자기 확 밝아진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든든한 자기편을 만난 사람처럼.
“선배! 채영 선배!”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6)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