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21화 (121/218)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3) >

리딩실 안에 한파가 몰아쳤다.

장 작가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내 앞에서도 이러면 입봉작가는 머리채 잡고 휘둘렀겠네.”

“작가님, 그게 아니라.”

“여기서 더 크면, 다음에 작품 같이할 땐 아예 대본에 빨간 펜까지 찍찍 그어서 가져오겠는데.”

“그게 아니고, 저는.”

“작가 흔들어서 대본 주무를 생각하지 말고, 있는 씬 잘 소화해서 날 감동시킬 생각을 해요. 그런 배우님은 싫대도 씬 늘려줄 거니까. 알겠어요?”

“······네, 작가님.”

서은교가 어색한 미소를 제 지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제 서은교를 똑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태경 씨는 어때요?”

장 작가가 갑자기 물었다. 선발대 서은교가 무자비하게 얻어맞는 걸 지켜본 윤태경이 재빨리 예의 바른 미소를 띄웠다.

“저요?”

“대본 얘기 좀 하자고 했다면서요. 요구사항 있으면 말해봐요.”

“말이 잘못 전달됐나 보네. 요구사항이 아니라, 대본 정말 좋았다고 말씀드리려고 그랬죠. 저는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대본대로 연기하겠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나 독재자라고 업계에 소문내게요?”

“그게.”

“농담이에요.”

입꼬리만 올려 웃은 장 작가가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이 닿은 곳마다 출연진들과 매니저들이 허둥대면서 인사했다. 여기서 급이 제일 높은 두 명도 갑 앞의 을처럼 꼬리를 내렸으니, 그 밑의 병정쯤 되는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우리도 긴장해야겠는데요.”

성 실장이 내 옆으로 슥 다가오며 말했다.

“작품 촬영하다 보면 배우랑 작가 간에 힘겨루기가 워낙 팽팽하니까, 장 작가님이 초반에 확 휘어잡고 가려고 작정한 거 같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3, 40대 여자들은 나 좋아하니까.”

임주원이 소년처럼 웃었다. 여자들의 모성애를 들끓게 한다는 그 미소다. 좀 전까진 윤태경 의식하느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더니, 장 작가가 윤태경을 대하는 걸 보고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주원 씨는 걱정 안 하죠.”

혓바닥에 설탕을 바른 성 실장이 나와 이송하를 본다.

“송하 씨는 좀 조심해요. 처세술이 능숙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잘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걱정된다. 엄청.

능숙하긴커녕, 이송하는 처세술에는 젬병이니까.

고양이 수호령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제작진하고든 출연진하고든 사이가 엄청 좋았었고, 이송하가 연기력 논란으로 백만 악플러를 끌던 시절이라 다들 동정했으니까.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확 실감이 난다. 거기가 드라마판에서는 흔치 않은, 천국 같은 환경이었다는 게.

이곳이 현실이다. 갑을관계가 판치고 신경전이 오가는, 이곳이.

“온다. 웃어요, 웃어.”

성 실장이 속삭였다. 마침내 우리 차롄지, 장 작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길이 쫙 뚫린다.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없다.

성 실장이 입술을 핥으며 내 옆구리를 툭 찔렀다.

“분위기 많이 안 좋으면 우 감독님한테 좀 비벼보는 게 어떨까요. 감독님이 정 실장님한테 어마어마하게 호의적인 것 같은데.”

“분위기 안 좋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다른 배우한테 인사를 받고 있는 우 감독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장 작가가 우 감독 반만 호의적이어도 안심할 텐데.

아까 날 보면서 살짝 웃지 않았나?

“나만 믿어요, 정 실장님. 내가 물렁물렁하게 녹여놓을 테니까.”

나한테 자신만만하게 속삭이고, 임주원이 성큼 한발을 내디뎠다.

“작가님! 좋은 작품에 캐스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원 씨는 내가 캐스팅한 건 아닌데. 감독님 의견이었어요.”

자기만 믿으라던 임주원은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물론 나도 좋으니까 오케이했죠.”

덧붙이며, 장 작가가 이송하를 바라봤다.

이송하가 구십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근데 이송하 씨는 워낙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서, 어제 보고 또 본 것 같네.”

이 여자 작정했나 보다. 무조건 첫인사에는 가시를 박기로.

정말 우 감독한테 매달려봐야 하나.

이미 당한 다른 출연진들이 이쪽을 보고 있다. 특히 서은교는 눈이 번쩍거린다.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장 작가가 이송하한테도 대차게 창피를 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장 작가는 이송하한테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곧장 걸음을 옮긴다.

내 쪽으로.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뒤로 물러날까 했을 때, 쭉 뻗어온 팔이 나를 덥석 끌어안는다.

“작가님?”

“잠깐만요. 한 번만.”

“네?”

“리딩 끝나고 사람들 갈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게 무슨.”

헛소리야.

뭘 참아? 마음이 급하다니?

장 작가 어깨 뒤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이송하도 얼음처럼 굳어서 보고 있다. 눈이 얼마나 휘둥그런지, 금방이라도 눈알이 툭 굴러떨어질 것 같다.

임주원이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 없이 물었다.

지금 무슨 그림이냐고. 내가 제일 궁금하다.

“나는 남주인공 역에 박도진 밀었어요.”

장 작가가 속삭였다.

“내 대본에, 내가 똥 쌀 뻔했다고요.”

“아, 네.”

“찜찜해서 사주를 봤는데, 내가 지금 삼재더라고요. 그래서 정선우 씨한테서 기를 좀 나눠 받고 싶어서요. 액땜이 될지도 모르니까.”

넵튠 애들이 날 부적 취급하는 걸로 모자라서 이젠 액땜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털이 북슬북슬한 팔뚝이 뒤에서 뻗어 나온다.

“나도 삼재예요.”

등 뒤에서, 젠장,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우 감독이 속삭였다.

“우 감독은 한번 했으면 됐지, 왜 또?”

“보는 눈이 많잖아요. 나야 남자 대 남자니까 괜찮아도, 남녀가 끌어안고 있으면 좀 그렇지 않나.”

“남녀는 무슨. 조카뻘인데. 저리 가, 부정 타.”

“연출은 내가 하는데, 액땜도 같이 좀 합시다.”

그래. 다 좋다. 좋은데.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지 좀 말지. 소름 돋아 죽겠는데.

“작가님, 감독님. 일단 좀 놓고·······.”

햄버거 빵 사이에 낀 패티 꼴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들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성 실장과 눈이 마주쳐서.

그는 눈을 가늘게 접고 웃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로열패밀리 촬영현장이 무척 편해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기대가 담긴 미소다.

그 옆에서 이관우도 입을 벌린 채 날 보고 있다. 쟤 사수가 된 이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존경의 눈빛이다.

그리고 ‘대체 무슨 사이길래 서로 얼싸안고 저러지?’, ‘감독이랑만 친한 게 아니라 작가랑도 엄청 친한가 본데?’, ‘미리미리 통성명하고 좀 친해질 걸 그랬나?’ 이런 표정으로 수군대고 있는 사람들.

분통 터지는 얼굴을 한 서은교.

그것까지 보고는 들었던 팔을 도로 내렸다. 뭐, 액땜이면 어떻고 햄버거 패티면 어때. 나한테 도움이 되면 됐지.

앞으로를 위해,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몸을 던졌다.

***

“탑스타 이소희 역을 맡은 이송하씹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의 소개에, 이송하가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박수를 보냈다. 일견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곳곳에서 쑥덕거리는 내용은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은교도 박수치네. 아깐 이송하 찍어누르려고 기를 쓰더니.”

“작감이 쳐다보고 있는데 뭐 어쩌겠어.”

“서은교 뒤끝 길다던데. 작감 없는 데선 계속 못살게 굴걸?”

“근데 정선우랑 작감이랑 엄청 친해 보이던데? 그거 신경 쓰여서 못 갈구지 않을까?”

“촬영에 지장 생기는 거 아니면 작감은 안 끼어들겠지. 이런 건 배우들끼리 정리할 문젠데.”

배우들이 소곤댔다. 뒷자리의 매니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선우 저 사람은 작감이랑 무슨 사이래? 원래 있던 인맥인가?”

“인맥이 금맥이구만. 좋겠다, 염병.”

“친분 땜에 작감이 W&U 배우들만 더 챙기거나 하진 않겠죠? 좋은 대사 몰아준다거나, 한 테이크 더 간다거나, 하다못해 반사판 하나라도 더 대준다거나.”

“윤태경이랑 서은교 회사에서 배우들 차별하는 걸 가만 볼까.”

매니저들이 한쪽을 쳐다봤다.

윤태경과 서은교 측 매니저들도 같은 걱정을 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는 중이었다. W&U 사람들을 힐끔거리면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대본리딩이 시작된 후에도 이어졌다. 배우들은 윤태경과 임주원이 대사치는 걸 보고 박수쳤고, 서은교 차례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이야, 대박. 큰소리치고 다닐 만하네. 진짜 재벌 집 딸 같다.”

“저거 생활연기야. 서은교 집 엄청 잘산다더라.”

“근데 연기는 아무래도 이송하가 딸리겠지?”

누군가가 비교를 시작했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더 늘어났다.

“왜, 이송하도 전작 드라마 보니까 잘하던데.”

“걔는 아직 작품이 하나잖아.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지. 인생연기나 인생작품. 그런 식으로 하나 터뜨리고 다음 작품부터 국밥 말아먹는 배우가 한둘이야?”

“게다가 이번엔 배역도 소화하기 어렵겠던데.”

이송하가 맡은 배역은 인기 절정의 한류스타였다.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사고를 쳐서 증권가 찌라시에 이니셜을 올리는, 업계에 소문이 짜할 만큼 제멋대로인 탑스타.

그런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송하의 리딩 순서가 되자 시선이 노골적으로 쏟아졌다.

순수하게 연기를 궁금해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드라마 한 편으로 떠서 주연자리까지 꿰찬 이송하를 질투하는 시선도 많았다. 그들은 이송하가 터무니없는 연기로 리딩을 망치기만 기대하는 듯했다.

관심 속에서, 드디어 이송하가 첫 대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궁금해하던 사람도, 기대하던 사람도. 그리고 서은교도.

“은교 씨, 쟤 로맨스는 안될지도 몰라. 그건 경험 없인 힘들지.”

서은교의 옆자리에 앉은 여배우가 비위를 맞췄다.

몇몇이 거들었다.

“맞아요. 아직 어린앤데 소꿉장난 같은 연애나 해봤겠지. 이건 절절한 짝사랑이잖아요. 제멋대로 굴던 탑스타가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걸 연기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감정을 알겠어요? 아무리 대본 분석해도 겉핥기밖에 안 될걸요?”

“그렇지. 게다가 저런 얼굴로 어디 짝사랑을 해봤겠느냐고.”

***

대본리딩을 끝내고, 곧장 지하 스튜디오에서 고사식을 진행했다.

고사상 위에 떡하니 올라온 돼지머리. 그것도 웃는 돼지머리 앞에서 배우와 제작진이 차례차례 절을 한다. 시청률 신과 대박 신을 부르짖으면서.

이송하가 돼지 입에 돈 봉투를 끼우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정선우 씨한테는 내가 꼭 보답할 생각이에요.”

장 작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거랑 이송하 씨 문제는 달라요. 내가 서은교 씨한테 했던 말 기억하죠? 배우가 잘 소화하면 씬 늘려줄 거라고.”

“네, 기억합니다.”

“진심이에요. 그래야 작품도 사니까. 이송하 씨보다 서은교 씨가 더 좋으면, 분량은 당연히 그쪽으로 더 갈 거라는 말이에요.”

“······혹시 송하 연기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리딩은 성공적으로 끝냈는데.

윤태경과 서은교, 그리고 임주원. 쟁쟁한 주연 배우들 틈바구니에서도 내 눈에는 이송하가 제일 빛났다. 다른 사람들도 연기로는 깔 게 없다는 표정이었고. 우 감독도 마음에 들어 했다.

장 작가도 그런 것처럼 보였었는데.

“아뇨, 연기 좋았어요. 대본 분석을 많이 한 것 같던데.”

“네, 대본 받고 나서부터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대본은 완벽하게 소화했어요. 그런데.”

말꼬리를 늘린 장 작가가, 아쉽다는 듯이 덧붙였다.

“난 배우가 대본 이상의 뭔가를 보여줬으면 하거든요.”

“대본 이상이요? 그럼 애드립이라든가.”

“꼭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고, 좀 더 날 것 같은 느낌말이에요.”

장 작가가 진주 목걸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이소희라는 캐릭터, 원래는 손채영 씨 생각하고 있었어요. 워낙 청순한 이미지가 강해서 다들 반대했었는데, 내가 보기엔 손채영 씨가 이 역할을 잘 소화해줄 것 같았거든요. 생생하게, 날 것처럼.”

제대로 봤네.

손채영이 했다면 영혼을 담은 연기가 나왔을지도 모르지.

눈을 돌려 이송하를 바라봤다. 고사 음식을 한 접시 챙겨서 내 쪽으로 오려다가 우 감독한테 붙잡혔다. 음복 술을 받아마시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장 작가의 말을 되씹었다.

비교 대상이 하필 서은교와 손채영이라서 그런가. 뱃속이 뜨겁다.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송하의 연기를 날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를.

*

“의상하고 액세서리, 캐리어까지 다 협찬이니까 카메라 신경 써!”

“특히 송하, 머리 넘기면서 팔찌 노출해야 하니까 잊지 말고!”

“미스트 한 번 더 뿌리자, 메이크업한 티 안 나게!”

아침인데도 공항은 사진을 찍으러 나온 기자들과 팬들로 붐볐다.

넵튠 애들은 각자 캐리어를 하나씩 끼고선 스타일리스트의 신신당부를 듣고 있다. 그냥 사진 몇 장 찍히는 건데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특히 이송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다 협찬품이다.

“오빠, 오빠. 이거 꼭 MT 가는 느낌이에요!”

잔뜩 들뜬 임서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떠들었다.

MT라. 이번 중국 스케줄이 여러모로 겹쳐있어서 인원이 많긴 하다. 중국 첫 팬 미팅을 위해 넵튠 애들이 다 모였고, 로열패밀리 포스터와 첫 촬영을 중국에서 찍게 돼서 임주원도 동행한다.

고양이 수호령 프로모션 때문에 서지준도 곧 도착할 예정이고.

그래선지 임서영 말처럼 MT 같은 느낌도 든다.

“서지준 씨는 왜 이렇게 안 오지? 우리랑 같은 비행기 아냐?”

“전화해 볼게요!”

누군가 전화기를 들었을 때였다.

안 그래도 우리 쪽을 보면서 떠들썩하게 손을 흔들던 공항 팬들이, 갑자기 더 크게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 서지준 인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감탄하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어? 뭐야?”

옆에서 성 실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스텝들도 놀라서 웅성거린다. 넵튠 애들은 더하다. 특히 MT 가는 것 같다며 들떠있던 임서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썩어버렸다.

나도 눈을 비볐다. 혹시 헛것인가 싶어서.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은, 서지준이 아니었다.

손채영이었다.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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