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20화 (120/218)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2) >

거울 벽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리딩실.

그곳은 가식과 견제로 가득 찬 사교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본과 생수, 수제 쿠키가 가지런히 놓인 중앙테이블에는 조연 롤의 연예인들이, 가장자리 간이의자에는 매니저들이 앉아서 속닥거렸다.

“서은교 지하 분장실에 있던데. 왜 안 올라오지?”

“이송하가 안 왔잖아. 더 늦게 등장하려고 수 쓰는 거지, 뭐.”

“그렇게라도 해야 덜 쪽팔리지. 4명 주인공체제라고 해도, 대본 나온 거 보면 이송하가 메인이고 서은교가 서브 같던데? 솔직히 신인한테 밀린 거 아니야? 이송하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싶을걸?”

“아이고, 첫 상견례부터 신경전 장난 아니겠는데?”

“둘이 싸움이 되나? 서은교 등쌀에 어린애가 버티기나 하겠어?”

“화장실에 처박혀서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벌써 불쌍하네.”

“에이, 그래도 뒤에 W&U가 있는데 대놓고 까겠어요?”

“소속사로 따지면 서은교도 만만찮지.”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 건너 불구경을. 정확하게는, 잘나가는 여배우들의 기싸움을.

배우들도 매니저들도 몇 번이나 리딩실 문 쪽을 곁눈질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두 명이 예의 차린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사람들은 어지간한 경호원보다 몸집이 큰 이관우를 보고 한번 놀라고, 이송하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연예인 비주얼에 익숙한 이들도 놀라게 할만한 외모였다.

“죽인다. 광고 쪽에서 블루칩이니 뭐니 하는 이유가 있구만.”

“진짜 숨 막히게 생겼네. 근데 같이 온 사람이 정선우가 아니네?”

로드, 실장, 팀장, 다양한 직함을 가진 매니저들이 속닥거렸다.

“스캔들 난 거 때문에 이송하 담당에서 까였나?”

“박도진이랑 성도원 사건이 줄줄이 터져서 이송하 스캔들은 완전히 묻혔는데 뭘. 아쉽네. 유명한 스타 매니저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뭘 아쉬워. 매스컴 좀 탔다고 연예인 병 걸렸다던데.”

“어, 왔다, 왔어!”

음소거를 누른 것처럼, 속닥이는 소리가 싹 사라졌다.

매니저 두 명을 대동하고 들어오는 여자. 붓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와 양갓집 규수 같은 단아한 분위기.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화제가 돼서 시상식의 여인이라고도 불리는 여배우. 서은교였다.

서은교는 쏟아지는 인사를 받으며 걸어왔다.

그리고 이송하 앞에서 우뚝 멈췄다.

“이송하 씨?”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송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은교는 팔짱을 낀 채로 이송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짧은 침묵 위로 심상찮은 공기가 내려왔다.

리딩실 안의 모두가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이관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는 즐겨 봤던 연예계 배경의 드라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선 반드시 시비가 붙곤 했다.

수위 높은 인신공격이나, 물 싸대기 따위가 동반된 시비가.

침묵을 깨고 서은교가 물었다.

“원피스 예쁘네요. 김석문 디자이너 시즌 한정판이죠?”

“주는 대로 입어서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맞는 것 같아요.”

평범한 대화였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구나, 라고 이관우가 안도했을 때.

“앞으론 입지 마세요.”

서은교가 명령하듯 말했다.

“내가 그분 옷 자주 입어요. 그러니까 이송하 씨는 입지 마세요. 촬영장에서 의상 겹치면 안 되니까. 김석문 디자이너도 이송하 씨보단 내가 입는 걸 더 선호할 걸요. 내 말 알아들었어요?”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관우의 눈알이 분주히 움직였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저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서은교의 매니저들은 태연해 보였다.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다른 배우나 매니저들도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면박을 당한 이송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도망갈까, 아니면 흥분해서 들이받을까를 기대하는 얼굴로.

이송하가 바로 대답을 안 하자, 서은교가 비아냥거렸다.

“왜 말이 없어요? 기껏 구한 한정판 입지 말라니까 아까워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선배 말이 아니꼬워요?”

“이게 협찬받은 거라서요.”

서은교가 멈칫했다.

“협찬? 김석문 디자이너가 협찬을 했다구요?”

“네.”

어디선가 작게 웃음소리가 샜다.

당황하던 서은교가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눈 똑바로 뜨고 말하는 것 좀 봐. W&U에선 선후배 개념도 없나 봐요? 아니면 아이돌은 원래 그래요? 혹시 메인 여주인공 땄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기세등등한 거라면 착각이에요. 내가 그 배역을 못 따고 밀린 게 아니라, 내 이미지가 재벌가 금지옥엽 역할에 딱 맞아서 지금 배역에 낙점된 거니까.”

그리고는 이송하를 홱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어디서 아이돌이 굴러들어와선. 격 떨어지게. 안 그래요?”

마지막 물음은 다른 조연 배우들에게 향했다.

배우들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어떻게 처신해야 촬영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순탄할까를 재는 눈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서은교 같은 사람한테 찍히면 앞으로가 괴로울 게 뻔했으니까.

계산을 끝난 배우들이 대부분 서은교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송하는 힐끔거리는 시선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이관우가 문자를 보냈다.

-실장님! 서은교 씨 때문에 큰일 났습니다!

***

설마 십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겠냐 했는데.

생겼다네. 그것도 큰일이.

신입한테 문자를 받자마자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리딩실이 있는 층에서 낯익은 얼굴들과 마주쳤다. 여우 같은 인상에 안 어울리게 서글서글한 성 실장. 그리고 임주원.

임주원이 덩달아 뛰며 물었다.

“어, 왜 뛰어요? 우리 늦었어요?”

“아뇨, 송하랑 서은교 씨랑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요.”

“벌써 시작했네, 시작했어.”

성 실장이 알겠다는 듯 혀를 찼다.

리딩실 문을 벌컥 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본다. 인사를 하고 재빨리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큰일이라길래 지렁이라도 날아다니는 줄 알았더니.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하다.

서은교를 중심에 두고 예쁘장하고 잘생긴 배우들이 바글바글 모여 떠들고 있다. 무슨 여왕벌과 추종자들처럼. 그리고 이송하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뭐야, 이건.

설마하니 대놓고 따돌리는 건가? 여기가 중학교야?

“오빠, 저 여깄어요.”

내가 저를 못 찾는 줄 알았는지, 이송하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든다. 여전히 손에는 그놈의 지렁이 젤리 봉지를 쥐고 있다. 이송하의 뒷자리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너 괜찮아?”

“뭐가요?”

“아냐. 괜찮으면 됐어.”

먹던 지렁이를 계속 먹으라고 두고, 신입한테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여긴 중학교보다 더하다.

옆자리에서 같이 듣던 성 실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 바닥엔 이런 일 비일비재해요.”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해요. 기싸움 하는 거 보면 유치해서 진짜.”

이송하 옆자리에 앉은 임주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혼자일 때라면 몰라도 이번엔 나랑 같이하잖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한솥밥 먹는 사인데 우리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가 믿음직하게 말했을 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유들유들한 미소와 떡 벌어진 체격. 윤태경이다. 연예인들의 연예인. 여기저기서 모셔 가려고 혈안이 돼 있는, 귀한 한류스타의 등장에 리딩실이 시끌벅적해졌다.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인사가 오갔다.

임주원이 윤태경과 악수하며 감탄했다.

“헬스 열심히 하시나 봐요.”

“아, 감독님이 상의 탈의 씬이 많다고 해서요. 대본 받고부터 계속 닭가슴살이랑 셰이크만 먹으면서 관리하고 있어요.”

“······탈의 씬이 많대요?”

“네. 임주원 씨는 없어요?”

놀리듯이 씩 웃으면서, 윤태경이 임주원을 위아래로 훑는다. 그러고는 좀 떨어진 자리로 가서 앉는다.

홀로 남은 임주원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지금 저 자식이 나 무시한 거예요?”

“아니, 무시하기보다는.”

“실장님. 왜 난 벗는 씬이 없어요? 내가 몸매가 별로예요?”

임주원이 심각하게 물었다. 반소매 티를 걷어 배를 내려다보면서.

성 실장이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주원 씨는 스키니한 꽃미남 스타일이고, 윤태경 씨는 짐승남 스타일이잖아. 둘이 매력 어필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이씨, 나도 지금부터 관리하면 복근 만들 수 있어요. 감독님한테 나도 벗는 그림 넣어달라고 얘기 좀 해줘요.”

기싸움이 유치하다더니, 임주원의 눈이 이글이글 탄다.

근데 이거 좀 묘하다. 서은교 주변에도 사람들이 우글우글. 윤태경 주변에는 더 우글우글. 그리고 이송하와 임주원은 단둘이 덩그러니 앉아있고.

뭐지. 이 낙동강에 오리알 두 개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그림은.

성 실장이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이거 분위기 이상하게 돌아가네.”

분위기는 계속해서 이상하게 돌아갔다.

리딩실 안이 꽉 찼을 때, PBS 드라마 국장과 CP가 들렀다.

“아이고, 우리 한류스타 윤태경 씨! 계약서 도장 찍었다는 소리 듣고 내가 춤을 췄다니까. 우린 윤태경 씨만 믿어요. 잘 부탁해요.”

그들은 ‘우리 한류스타 윤태경 씨’의 어깨를 두드렸고.

“어이구, 우리 시상식의 여신! 은교 씨, 올해 드레스는 꼭 우리 PBS 연기대상 레드카펫에서 입자고. 작품만 잘되면 우리가 상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우리 시상식의 여신’의 손을 금덩어리라도 되는 듯 부여잡았다.

임주원과도 악수하긴 했지만, 온도차이가 확 났다. 윤태경 때와 비교하면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송하 차례에 와서는 온도가 영하로 뚝 떨어졌다.

누가 봐도 이송하 캐스팅을 탐탁지 않아 하는 태도였다.

국장과 CP가 나가자 서은교의 콧대가 피노키오 뺨치게 솟구쳤다.

“캐스팅은 웰메이드 프로덕션에서 했으니까요.”

성 실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송국 입장에선 1안이었던 손채영 대신 송하 씨를 선택한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죠. 그래도 방송국은 뭐, 상관없어요. 지금 상황에선 다른 쪽이 갑이니까.”

“네? 원래 방송국이 갑 아닙니까?”

신입, 이관우가 물었다. 성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로열패밀리쯤 되면 상황이 다르지. 웰메이드가 중국자본 끌어와서 제작비 빵빵하지, 대본 좋고 연출 좋지. 거기다 윤태경까지 잡았으니까. 서은교도 중국에서 인지도가 꽤 있고. 공중파 어디로 가져가든 바로 편성 내줄 작품이잖아.”

“그럼 갑은 웰메이듭니까? 아니면 배우? 윤태경이나 서은교?”

성 실장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웰메이드야 이제 작품 잘되라고 정화수 떠놓고 빌어야 하고. 배우들은 계약하기 전에나 갑이지. 일단 도장 찍고 나면 처지가 바뀌어.”

“그럼 갑은······.”

“감독이랑 작가지.”

내가 툭 던지듯 말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갑을 따지자면 그 두 사람이다. 이 거대한 배의 키를 잡은 베테랑들. 그리고 갑 중의 갑은 둘 중에서도 대본을 쓰는 장 작가고.

그 손끝에서 극 중 캐릭터의 매력이 왔다 갔다 하고, 출연 씬 분량이 좌지우지되니까.

성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맞아요. 다른 배우들이나 방송국은 무시해도 돼. 어차피 작품만 잘되면 호떡 뒤집듯이 태도도 뒤집을 사람들이니까. 문제는 장 작가님이죠. 우 감독님이야 대본에 충실하게 찍는 스타일이라. 무조건 작가님한테 잘 보여야 돼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제작진이 도착했다.

두 명한테 시선이 집중된다.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덥수룩한 우 감독. 그리고 알 굵은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 반지까지 세트로 착용해서 오늘따라 더 번쩍거리는 장 작가.

다른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유난히 장 작가한테 사람들이 몰린다. 우리도 인사를 하러 일어났을 때였다.

“아, 정 실장님!”

성큼성큼 걸어온 우 감독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친 수염이 내 뺨을 스쳤다. 닭살이 쭉 올라온다. 나도 놀랐지만, 이송하는 나보다 더 놀란 눈치다. 배척당하는 와중에도 태연하던 애가 지금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있다.

우 감독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들었어요. 늦지 않게 진흙탕에서 발 뺀 거, 실장님 덕분이라고.”

“아, 그거요.”

일단 좀 떨어져서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듣는 귀가 많으니 박도진 얘기를 대놓고 하기 좀 그런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이라고 생각했다가, 불쑥 떠오르는 게 있어서 엉거주춤 우 감독 등에 손을 얹었다.

감독과의 친분을 좀 과시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과연 시선이 따갑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매니저들도 이쪽을 쳐다보면서 수군거린다. ‘둘이 왜 저렇게 친하지?’, ‘얼마나 친한 사이지?’ 같은 의문이 얼굴에 잔뜩 쓰여있다.

그렇게 한참 부둥켜안고 있는데, 이쪽을 묘한 눈으로 보던 서은교가 빙긋 웃으며 장 작가한테 달라붙었다.

“저 캐스팅하신 게 작가님이시라고 들었는데, 정말 감사해요.”

“배역 이미지가 은교 씨랑 잘 맞아서, 대본 쓸 때부터 은교 씨 생각하면서 썼어요.”

장 작가가 대답했다. 서은교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장 작가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치 이쪽 보란 듯이.

그리고는 장 작가한테 사근사근 말했다.

“작가님, 이송하 씨가 갑자기 주인공급으로 올라와서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대신 제 씬을 늘려주셔도, 그러니까 씬을 저한테 좀 몰아주셔도 괜찮아요. 제가 소화할게요.”

얼씨구. 저 여왕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우 감독에게서 떨어져나왔을 때였다. 장 작가가 내 쪽을 쳐다봤다. 시선이 부딪친 순간, 장 작가의 눈이 살짝 휘었다.

장 작가가 어깨를 털어내며 말했다.

“서은교 씨. 내가 입봉작가예요?”

“네?”

“어디서 안 좋은 것만 배워서, 작가한테 씬을 늘리라 마라야?”

< 물리고 물리는 갑을관계든, 신경전이든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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