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면 아래에서 오가는 것, 거래 (4) >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대표실엔 웬일이냐?”
먼저 포문을 연 건 2팀장이었다.
미팅을 방해한 셈이니 다른 때라면 더 직설적인 말과 눈초리가 날아왔을 텐데. 지금의 2팀장은 상당히 흡족해 보인다. 꽉 막혔던 변비가 쑥 내려가기 직전인 사람처럼.
웃는 얼굴을 보니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시선을 돌려 웰메이드 쪽을 봤다. 성 부장과 마케팅 담당자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친다. 내가 화제가 된 덕분에 드라마 홍보를 거저 했다며 좋아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손에 쥔 것 없이 이 광경을 봤으면 비위깨나 상했겠는데.
지금도 불쾌함 때문에 입 끝이 비틀린다.
“웬일이냐니까?”
“일하러 왔는데요.”
“뭐?”
“제 일이요. 송하랑 로열패밀리 드라마 건으로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태연히 얘길 꺼냈더니 웰메이드 사람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2팀장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런 상황에 태평하게 무슨, 지금 네가 할 일은 사태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거···!”
“편하게 앉아. 서 있지 말고.”
백한성 대표가 뚝 자르고 말했다. 그가 날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번 보자.”
“대표님.”
2팀장이 표정관리 안 되는 얼굴로 입을 다문다. 백한성 대표한테 대거리는 못 하겠는지 나만 못마땅히 쳐다본다. 저 양반은 이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아니,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뭐, 피차일반이다.
백한성 대표에게 노트북을 건네고 빈자리에 앉았다.
그가 작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 동안 대표실 안에 껄끄러운 침묵이 흘렀다. 처음엔 다들 노트북의 내용이 궁금한지 곁눈질을 했지만, 모가지를 빼고 훔쳐보긴 그랬는지 시선들이 곧 내 쪽으로 집중됐다.
본부장 빼고. 그는 거리낌 없이 모가지를 빼고 훔쳐보고 있다.
웰메이드 마케팅 담당자가 미안한 얼굴로 나한테 사정을 늘어놓았다.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해요, 정 실장님. 요 며칠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긴 했는데, 스캔들이라는 게 양날의 검이라서요. 여배우가 스캔들이 나면 드라마 몰입도가 떨어져서 극 중 케미가 죽을 수도 있거든요.”
성 부장이 입맛을 다시며 거들었다.
“우리야 정정보도까지 나갔고 문제 있겠냐 싶은데,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라 투자자들은 걱정이 많더라고요. 잠잠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이송하 씨 대외적인 스케줄을 다른 분이 대신 맡아주시면 우리도 투자자들 달래기가 좀 수월할 것 같고.”
“그런 거라면야 뭐 당연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2팀장이 화색을 띠었다. 잠잠해질 때까지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아예 이송하 담당을 갈아치우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보인다.
2팀장이 백한성 대표의 반응을 살폈다. 백한성 대표는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다. 기껍게 웃는 얼굴로. 그 웃음을 긍정의 웃음으로 해석한 모양인지, 2팀장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스캔들 문제는 계약서에도 명시된 부분이니까, 우리 쪽에서도 더 뒷말 안 나오게 신경 써야 하는 게 맞고. 우리가 웰메이드랑 일 한두 번 같이 한 사이도 아니고.”
2팀장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이건 뭐, 이렇게 자리까지 마련할 필요도 없는 문젠데.”
“그래도 W&U 내부 인사문제 아닙니까.”
“배우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담당 실장 바뀌는 건데요 뭘. 내부회의 거쳐서 문제없이 정리하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저도 신경 써서 케어하겠습니다.”
“팀장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저희도 안심입니다.”
백한성 대표 뒤에 서 있는 3팀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주 놀고들 앉았구만, 하는 표정이다. 내 표정도 저럴 거다. 하지만 3팀장도 나도 대화를 가로막지 않았다.
왜냐면, 꽤 재밌는 화제로 넘어가길래.
“뭐, 이 문제는 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남주인공 캐스팅에 온 신경을 쏟아부어도 부족하실 텐데. 촬영일정 생각하면 서둘러서 캐스팅 확정하고 도장 찍어야 할 텐데요.”
2팀장의 말에, 성 부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얘기도 꺼낼 생각이었습니다. 이거, 윤태경이랑 박도진 둘이 오케이 했을 때는 이게 웬 횡잰가 싶었는데,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제작진도 투자자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긴, 둘 다 놓치기 너무 아까운 카드라 그럴 만도 하죠. 한류스타 풀에서는 탑 중의 탑들이니까.”
흥미롭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증거자료는 백한성 대표한테 넘겼으니 급할 것도 없고. 그 ‘너무 아까운 카드’ 중 하나가 사실은 이집저집 패가망신시킬 카드라는 걸 밝혔을 때 저들의 반응이, 특히 2팀장의 반응이 무척 기대되기도 해서.
“팀장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성 부장의 물음에 2팀장이 턱수염을 문질렀다.
“윤태경도 사람 좋고, 박도진도 지난번에 식사 한번 같이 했는데 인성 괜찮은 친구였어요.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하는 게 아깝긴 하지만, 그 두 명이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드라마 성공이야 떼놓은 당상이죠, 뭐.”
“그건 그렇죠. 캐스팅 안 된다고 앓는 소리 하는 곳들이랑 비교하면 우리야 배부른 고민이죠.”
배부른 고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패가망신이 코앞에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이 흡족해하며 웃는 동안, 나도 웃었다. 하하하.
내가 비죽 웃는 걸 봤는지 마케팅 담당자가 물어온다.
“정 실장님 촉은 어때요? 어느 쪽이 되면 잘될 것 같으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런 와중에도 웃고 있으니까 속이 없어 보이나.
언짢은 기색이 드러났는지, 담당자가 아차 싶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핀다. 꺼낸 말을 주워담으면서 사과하길래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게 제 용건이었으니까요.”
“네?”
“제가 보기엔 무조건 윤태경 씨로 캐스팅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마케팅 담당자와 성 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2팀장은 ‘저놈이 또 무슨 헛소린가’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가 백한성 대표의 손에서 본부장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 노트북을 홱 쳐다봤다.
“잠깐. 정선우 너 설마, 좀 전에 말한 네 일이라는 게 로열패밀리 남주인공 캐스팅 건은 아니지?”
“맞는데요.”
“맞다고?”
“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저 양반의 복장을 뒤집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2팀장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렸고, 웰메이드 쪽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들을 힐끔거린 2팀장이 소파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저 사람들이 없었으면 당장 고함이라도 터졌을 태세다.
그가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론이랑 주변 사람들이 미다스의 손이네, 촉이 좋네, 떠들어대니까 네가 지금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임마, 너 이게 네가 함부로 나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인 줄 알아?”
나는 힐끔 백한성 대표를 바라봤다. 마침 그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속을 파악하기 어려운 눈빛이다. 비슷한 걸 찾는다면 긍정적인 흥미에 가까워 보인다.
‘어디서 저런 물건이 굴러들어왔을까.’ 같은 느낌이랄까.
그의 뒤에 있는 3팀장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내가 혓바닥을 놀려도 스리슬쩍 넘어갈 분위기 같아서, 웃으며 말했다.
“뭐, 말씀대로 제가 왈가왈부하고 나설 문제는 아니지만. 이러다가 드라마 말아먹을 판이라 잠자코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럼 송하까지 피해를 보잖습니까.”
“뭐? 뭘 말아먹어?”
“만약 박도진 씨가 캐스팅되면 이 드라마 말아먹을지도 몰라서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그런가. 다들 자기가 잘못 들은 건지 의심하는 것 같다. 2팀장이 턱수염 난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대는 사이,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성 부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드라마를 말아먹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로열패밀리가 왜요?”
“스캔들이 터질 거라서요.”
“스캔들? 스캔들이라면.”
중얼거리던 성 부장이 날 보고 미간에 금을 긋는다.
“이송하 씨랑···.”
“그건 루머고요. 그리고 그 정도 스캔들로 드라마가 망하겠습니까. 열애설 따위가 뭐 큰일이라구요. 마약 스캔들 정도는 돼야 큰일이죠.”
대표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특히 2팀장이 가장 볼만했다. 나는 그의 멍청한 표정을 실컷 감상하다가, 노트북을 들고 있는 본부장을 바라봤다.
본부장이 혀를 내두르며 물어왔다.
“그럼 이 사진에 찍힌 놈이 진짜 박도진이야?”
“네. 박도진 맞습니다.”
“어이구야. 한중합작 드라마에 약쟁이 주연이라. 방송 중에 터졌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드라마는 시원하게 말아먹을 뻔 했구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본부장 옆으로 모여들었다. 노트북 클릭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 충격이 겹겹이 떠올랐다.
“이게, 이게 뭐야? 이거 박도진 그놈 맞아?”
“마, 맞는 것 같은데요. 흐릿하긴 해도 얼굴 윤곽이나 이목구비가.”
“맞는 것 같은 게 뭐야! 경희 씨는 이거 알았어?”
“알았으면 벌써 말씀드렸죠! 저도 처음 봐요!”
“이런 미친놈이 숨길 게 따로 있지······!”
성 부장과 마케팅 담당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동안, 2팀장은 화면에 얼굴을 박은 채로 입만 달싹거렸다. 중간에 혼란과 당황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눈으로 날 바라보길래 어깨를 으쓱했다.
아예 그들에게 노트북을 떠넘긴 본부장이 날 보고 말했다.
“복덩이, 넌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는데?”
“음.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조용하던 백한성 대표가 덧붙였다. 3팀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쥐도 새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이런 걸 구해왔어?”
“쥐나 새는 몰라도 파파라치는 알더라구요. 파파라치 직통이에요.”
내 말에 본부장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파파라치? 이걸 파파라치한테 직접 받았다고?”
“너 뭐 기자를 만나니 뭐니 했다더니만, 그게 이거 때문이었어?”
김현조한테 들은 게 있는지, 3팀장이 물었다.
음. 아무래도 지금이 생색내기를 시작할 타이밍인 것 같다.
“송하한테는 중요한 차기작이라 문제 될 건 없는지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찜찜한 정보가 귀에 들어와서요. 혹시나 싶어서 수소문하고 캐보니까 이런 게 툭 튀어나오더라구요.”
“이런 신통방통한 놈을 봤나.”
곁으로 다가온 본부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그때 더듬거리는 소리와 함께 2팀장이 끼어들었다.
“이게, 그, 박도진이 맞다고? 이 사진들로는 백 프로······.”
현실부정을 하는 것 같길래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해줬다.
“그건 B컷입니다. 파파라치 손에는 더 제대로 나온 사진도 있어요. 아마 곧 터질 겁니다. 박도진이 로열패밀리에 캐스팅되면 한창 화제성 높았을 때 홍콩 스타써치에서 터뜨릴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저 때문에 정보가 새서 더 빨리 터뜨리려는 것 같더라구요.”
내가 아는 정보를 늘어놓았다. 웰메이드 쪽 두 명의 낯빛이 시시각각 노랗게 뜨더니, 스타써치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는 그야말로 사색이었다.
온갖 감정이 북받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가, 백한성 대표를 쳐다봤다가. 한참을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던 이들이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정 실장님, 대표님, 일단 저희가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손을 꽉 움켜쥐더니, 백한성 대표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대표실을 뛰쳐나간다. 문밖에서 통화소리가 멀어졌다.
박도진 계약문제를 당장 올스톱시키고 섭외 건이 언론에 새나가지 않도록 꽉 틀어막아라. 투자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수습해야 하니 서둘러 전체 회의를 소집해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이제 대표실에 남은 건 나와 백한성 대표. 본부장과 3팀장.
그리고 벌건 낯으로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는 2팀장뿐이었다.
3팀장이 입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
“뭐, 박도진이랑 식사를 같이 했는데 인성이 괜찮은 친구였어? 인성은 염병, 만약 우리가 그놈이랑 전속 계약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고, 생각만 해도 등골이 다 오싹하네. 이제 그 안목 어디 믿겠냐.”
통렬한 비웃음에도 2팀장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대거리는커녕, 이 상황을 어떻게 면피할지 대책 마련에 급급한 얼굴이다.
백한성 대표가 소파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2팀장.”
“네, 네, 대표님.”
“이제 이송하 문제는 2팀에선 손 떼. 담당 얘기도 꺼내지 말고.”
느긋한 말투로 못을 박은 백한성 대표가 날 보며 말했다.
“이송하 건에 한해서는, 2팀에도 저기 정선우보다 더 능력 좋은 실장은 없을 것 같으니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뒤.
2팀장은 도망치듯 가장 먼저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속이 다 시원하다. 한동안은 저 양반 꼴 안 봤으면 좋겠는데.
본부장과 3팀장은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물론 얘깃거리는 나다. 그들이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요령껏 둘러대면서 USB와 노트북을 챙겼다. 그리고 백한성 대표를 쳐다봤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등허리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묘한 시선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백한성 대표한테 내 위치에 대한 확답을 받고 나서, 이송하한테 오늘의 승전보를 전해주러 갈 계획이었다. 앞에 앉혀놓고 캐물어 봐야 할 것도 있으니까.
내가 말을 꺼내려던 때였다.
“두 사람은 이만 나가서 볼일 보고.”
백한성 대표가 먼저 말했다.
“정 실장은 남아서 나랑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모처럼.”
< 수면 아래에서 오가는 것, 거래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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