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16화 (116/218)

< 수면 아래에서 오가는 것, 거래 (3) >

막 통화를 마쳤을 때였다. 기계음과 함께 옆쪽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엘리베이터를 잡을 때 저쪽 버튼도 눌렀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나한테는 낯선 얼굴인데, 날 보고 눈이 커지는 걸 보니 저쪽은 날 아는 눈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회사 빽이 좋긴 좋네. 멀쩡한 기사 하나 순식간에 뭉개버리고.”

그 머저리 기자다. 깨닫자마자 문틈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회사 빽? 멀쩡한 기사? 정성스럽게 써 갈겨놨던 개소리를 삭제한 게 유감스러운 모양인데, 유감이라면 이쪽이 더 많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혹시 송하나 저한테 악감정 있어요?”

“악감정은 무슨. 내 기사 때문에 심기 안 좋은 건 알겠는데, 그게 내 일이에요. 그리고 일거수일투족이 기삿거리 되는 게 연예인이고.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텐데.”

“사생활이 기사화되는 거야 연예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 쳐도. 아예 터무니없는 소설을 갖다가 기사라고 올리는 건 악감정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제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내 말에 머저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MSG 좀 친 건 내가 인정하겠는데, 그게 터무니없는 소설은 아니죠.”

“그럼 대체 어떤 부분이 사실인데요?”

“내 참. 정정기사 쓰게 생긴 것도 짜증 나는데. 위에서 거래가 왔다 갔다 하니 힘없는 평기자 나부랭이인 나야 까라는 대로 까겠는데. 그래도 뭐 본인까지 모른 척을 해요. 둘이 그런 사인 거 다 아는데.”

“아. 당사자도 모르는 ‘그런 사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그걸 몰라서······.”

짜증스럽게 말하던 머저리가 멈칫했다.

그리고 곧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보면서 더듬거린다.

“저, 혹시······.”

“혹시?”

“아니, 아니에요. 난 진짜 둘이 사귀는 사인 줄 알았는데. 정선우 씨 반응을 보니까 내가 착각을 좀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약 그런 거면 내가 쓴 게 소설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두서없이 말하던 머저리가 덧붙였다.

“정선우 씨한테는.”

라운지에서 한참 기다렸는데도 이송하는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백한성 대표랑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가?

엘리베이터를 쳐다보고 있는데, 김현조가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송하는 관우한테 데려다 주라고 했냐? 잘했어. 지금은 따로···.”

“아뇨. 아직 대표실에서 안 내려왔는데요.”

“무슨 소리야, 십 분쯤 전에 얘기 끝났다던데.”

그럼 얘가 어딜 간 거야?

전화를 걸었더니 신호만 가고 안 받는다. 분명 7층에서 밑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없었는데. 어디 있느냐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7층으로 올라가 봤다. 이송하 머리꼭지도 안 보인다.

비상구 문도 열어봤는데 거기도 텅 비어있었다. 도로 문을 닫으려던 때. 저 아래 층계참에서 낯익은 머리꼭지를 발견했다.

이송하다.

양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서,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온 세상 고뇌와 번민은 저 혼자서 다 끌어안은 것처럼. 한숨을 쉬는지 가느다란 어깨가 들썩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멈칫했다. 이송하가 소매로 눈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양손으로 제 뺨을 찰싹찰싹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쟤 지금 울고 있었던 건가?

“죄송해요, 오빠. 화장실 다녀오느라고 늦었어요.”

진짜 화장실에 들렀다가 왔는지, 얼굴이 말끔하다.

“대표님이랑은 무슨 얘기 했어?”

“오빠 말대로였어요. 스캔들 조심해라. 연애하지 마라.”

이송하가 살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얘가 내 앞에서 연기하는 건가.

거짓말을 했다가도 금방 들키고 이실직고하길래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좀 전에 비상구에서의 모습을 못 봤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너······.”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직원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뭔 말을 못하겠네. 이런 타이밍에 이송하랑 둘이 사라지기도 그렇고.

일단 신입을 시켜 숙소로 보내놓고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송하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스캔들 때문에 곤란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오빠. 다 저 때문이에요.”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기자 때문이지.”

“만약에요. 만약에 오빠가 제 담당을 안 하게 되더라도 넵튠은 계속 담당하시는 거래요. 그리고 저 대신, 저보다 나은 배우를 맡길 거라고 했어요.”

“뭐?”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면··· 제가 붙잡았던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니까.

뭐?

미니밴 안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느 때처럼, 몇 번 가기도 전에 신호가 끊어졌다.

-오빠?

“이제 듣는 사람도 없으니까, 아까 했던 얘기 계속하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송하가 짐짓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계속 못 가게 붙잡아서 그렇지, 오빠한테 관심 있는 다른 배우들도 있잖아요. 손채영 말고도 더 있대요.

“그래서?”

-만약에 오빠가 담당을 바꾸시면, 저보다 경력도 좋고 더 유명한 배우를 맡길 거래요. 그러니까 제가 오빠 붙잡았던 건 다 잊어버리고,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갔길래, 팀 옮기는 얘기만 나와도 안절부절못하던 애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도 뭔가가 울컥울컥 올라온다.

내 뱃속 한 부분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핸들을 툭툭 두드리다가 말했다.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네. 개인스케줄은 같이 못 해도 넵튠 활동은 계속 같이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빨리 성공하면 오빠를 다시 뺏어, 아니, 오빠만 괜찮으시면 그때 다시 같이······.

얼씨구.

“그래. 마음에도 없는 소린 잘 들었고, 이제 진짜 네 생각을 말해봐.”

-이게 제 생각인데요.

“아닌데.”

-맞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뭐야? 왜, 나랑 일하기 싫어?”

-아니요!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소리였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랑 일하기 싫은 게 아니라,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다 망쳤어요. 저 때문에 스캔들이 나서······.

“그러니까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대표님이랑 무슨 얘길 했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도 생각이 있으니까 맡기라고 했잖아.”

잠시 말이 없던 이송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이 있으셔도 아마 안 될 거예요.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꽤 괜찮은 생각이거든.”

-그래도 안 될 거예요. 대표님이······ 사진을 보셨어요.

“사진? 무슨 사진?”

-스캔들 기사에 후속으로 나가려던 거 대표님이 못 나가게 막았대요.

아까 데일리 팩트 기자가 거래 어쩌고 하더니.

“너랑 내 사진? 우리가 켕길 게 뭐가 있어. 무슨 사진인데?”

또 잠깐동안 망설이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한다.

마치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제가 오빠 잘 때······.

“내가 잘 때?”

-성추행하는 사진이요.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네가 뭘 어쨌다고?”

-성추···.

“아니, 그 단어는 쓰지 말고 말해봐.”

제대로 들은 게 맞구나.

-지난번에 새벽 스케줄 있던 날, 오빠가 잘 때 몰래 얼굴을 만져봤었는데 그게 찍혔어요.

“얼굴을 왜, 아니, 당황스럽긴 한데, 뭐가 묻었었다거나.”

-이, 입에 손가락을 넣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 그래.”

-죄송해요, 오빠.

이송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언을 마쳤으니 이제 목을 치라는 듯이. 당장 이송하한테 묻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지난번에도 한번 물어보려다가 삼켰던, 그것부터.

“송하야. 너, 혹시 나 좋아하······.”

곧바로 고함이 고막을 때렸다.

-아니요!

*

“정정보도 떴던데. 진짜로 스캔들 루머인 거 맞아요?”

정혜성이 포크로 브라우니 위의 크림을 떠먹으며 물었다.

“진짜죠, 그럼.”

“아깝네. 새로운 일 들어와서 좋아했더니.”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하지만, 내 말을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날 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철철 흘러넘친다. 파파라치랑 사적인 얘기를 계속해봐야 좋을 게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료는요?”

“아, 그거요.”

정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마약 스캔들 캐고 있는 거. 내가 이거 궁금해서 밤에 잠을 못 잤거든요.”

“귀 밝은 친구들이 많아서요.”

“희한하네. 저도 좀 알아봤는데, 정선우 씨랑 특별하게 친한 기자는 지투데이 박우정 기자 정도던데. 이게 수습딱지 간신히 뗀 새끼 기자한테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고. 누굴까.”

“그건 말 못하겠네요. 비밀이라서.”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혜성은 몇 번 더 찔러보는 질문을 던지다가, 포기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핸드백에서 립스틱 하나를 꺼냈다.

“자요.”

“제가 바란 건 자룐데.”

“그거 USB예요.”

“아.”

립스틱 뚜껑을 열어 보니 정말 USB가 들어있다. 챙겨온 노트북에 꽂아서 확인해보자 내가 원하던 사진이 주르륵 뜬다. 빼도 박도 못할 사진들은 아니지만, 내가 써먹기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유출될 수도 있으니까 핸드폰이든 노트북이든 따로 저장하진 마세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B컷이에요. 혹시라도 정선우 씨가 다른 기자한테 넘길지도 모르니까.”

“다른 기자한테 줄 선물이 필요했으면, 그냥 제가 아는 정보만 알려주고 취재하라고 했겠죠. 파파라치랑 원수져서 저한테 좋을 게 뭐 있다고.”

“뭐, 이제 정선우 씨 차례네요.”

정혜성이 손에 든 포크를 빙빙 돌리며 물어왔다.

“성도원 씨 한번 알아보세요.”

내가 거래로 써먹을 수 있을만한 것 중에 가장 리스크가 적고, 영향력은 큰 정보다. 과연 정혜성의 눈이 번쩍 뜨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니까, 빨리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덧붙이고, USB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정혜성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스타써치 쪽에 제대로 된 자료 넘기고 정보 샜다는 얘기도 했으니까, 하루 이틀 안으로 기사 터질 거예요. 그럼 어차피 로열패밀리 주인공으로 거론되던 것도 엎어질 텐데, 굳이 지금 그 자료가 필요한 이유가 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제대로 생색 좀 내려고요.”

*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김현조부터 찾았다. 정혜성이 하루 이틀을 얘기하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니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실장님, 급하게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

“팀장님이랑 홍보팀 박 팀장님, 아니, 대표님 지금 회사에 계세요?”

물었더니, 김현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그가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어. 지금 다 한방에 있을 걸. 대표실에.”

“대표실에요?”

“웰메이드 프로덕션 쪽에서 사람이 왔거든. 오보라고 정정기사까지 나가고 했는데도, 스캔들이다 보니까 그쪽에선 신경이 쓰이나 보더라고.”

타이밍 한번 좋네.

“마침 잘됐네요.”

“응? 뭐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그쪽이랑도 관련 있는 얘기라서요.”

내 말에 김현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야, 너 하려는 게 스캔들 얘기면, 일단 조금만 기다려봐. 영훈이 형이 얘기 잘해본다고 했으니까. 너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알겠는데. 이번 일은 네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제 스캔들 얘기가 게 아니라, 보여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보여줄 거?”

“네, 이거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보여주자 김현조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네가 지금 정신상태가 매우 안 좋구나, 하는 얼굴이다.

“USB예요, USB.”

노트북에 꽂아 내용물을 보여줬다.

고개를 갸웃하며 사진 몇 장을 넘기던 김현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야. 이거, 이거 혹시···!”

“그 사람 맞아요.”

“맙소사.”

곧장 7층으로 올라갔다. 중요한 일이니까 당장 나와보라는 김현조의 메시지 폭탄을 받은 3팀장이 대표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와 김현조를 번갈아 보고 혀를 찼다.

“그래. 너희들 지금 답답한 건 알겠는데···.”

“그거 아냐, 형.”

“이게 용건이에요.”

3팀장에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뭔데?”

“제대로 된 스캔들이요.”

내 말에 3팀장이 의아해 하며 화면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장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잠깐, 이거···!”

“걔 맞대.”

아직 반쯤 정신이 없는 김현조가 말했다. 3팀장이 입을 벌렸다.

“맙소사.”

“그러니까.”

화면에 시선을 처박고 있던 3팀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복덩이 너, 이거 어떻게, 아니, 확실한 거야?”

“네.”

“들어가자.”

침을 꿀꺽 삼킨 3팀장이 대표실 문을 활짝 열고 먼저 들어갔다.

열린 문 너머로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웰메이드의 성 부장과 마케팅 담당자. 맞은편에 앉은 본부장. 왜 저기 끼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옆에서 웃고 있는 2팀장.

그리고 백한성 대표까지.

3팀장이 백한성 대표한테 낮은 목소리를 전달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내 쪽으로 쏠렸다. 마지막으로 백한성 대표가 날 쳐다봤다. 느긋하던 얼굴에 희미하게 놀란 표정이 떠올라 있다.

나는 성큼 문 안으로 들어갔다.

< 수면 아래에서 오가는 것, 거래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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