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3) >
······뭐라고? 뭐가 망해?
도끼로 뒤통수를 찍힌 기분이었다. 나는 몇 초간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로열패밀리가 망하게 되는 이유를 알아내는 거다. 그 이유만 알아내면, 그럼 어떻게든 미래를 바꿀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여자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1초가 끔찍하게 길다.
말해라. 얼른. 빨리.
“드라마가 망한 건······.”
그렇지!
여자가 마침내 말을 꺼냈을 때. 그리고 내가 귀를 활짝 열었을 때.
눈앞이 다시 깜깜해졌다.
“우와아, 선우 씨! 이건 파장이 좀 크겠는데요?”
누군가가 내 등을 철썩 쳤다.
노이즈투성이던 시야가 확 선명해졌다. 눈이 시린 하얀색 조명이 내리쬐고 있다. 주변에서 직원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코앞에 보이는 TV 화면에는 임서영과 엘제이의 투 샷이 보인다.
손을 들자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돌아와 버렸다. 현실로.
뭐야, 이게. 정말 예지가 끝난 거야? 그러고 끝난 거야?
“선우 씨 표정이 왜 이렇게 멘붕이에요?”
홍보팀 여직원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네티즌들 난리 난 것 때문에 그래요? 뭐 처음도 아니고, 저녁 뉴스까지 탔던 사람이 새삼스럽게!”
“선우 씨 실검 1위까지 갈 분위긴데요? 어, 잠깐, 지금 로열패밀리도 실검 5위까지 치고 올라왔어요!”
사람들이 계속 내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떠들었지만, 대답할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오로지 조금 전에 본 미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거기서 다 듣고 오지 못한, 그 의문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로열패밀리는 대체 왜 망했을까.
대체 왜?
*
밤을 꼬박 새웠다.
로열패밀리 시놉시스와 대본을 다시 정독하고, 월메이드 프로덕션을 비롯해 드라마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런데도 도저히 모르겠다. 이 작품이 왜 망하는지.
로열패밀리는 주식으로 따지면 우량주 중의 우량주다. 히트 드라마와 영화를 산더미처럼 쏟아낸 웰메이드가 공들이는 작품이고, 중국 쪽 자본이 받쳐주고 있어서 해외로케가 반일 정도로 제작비가 빵빵하다.
연출 잘하기로 유명한 피디에, 유명작가.
대본의 완성도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캐스팅에도 엄청 공을 들이는 중이다. 특히 드라마의 간판인 남주인공 역에는 중화권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한류스타 윤태경이 거론되고 있는데, 협의가 거의 끝나서 도장 찍는 일만 남았다고 들었다.
거기다가 백 프로 사전제작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세세하게 물어뜯어 봐도 망할 이유가 없다.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다. 골수팬들 때문에 사공이 많아져서 북망산을 등반한 뭍나인이나, 작감이 바람나서 뒤집어진 타임슬립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가 갑자기 터지는 거.
그런 거라면 막을 방법이 없다. 또 한 번 미래를 보지 않는 한은.
하지만 미래 예지능력이 타이밍 좋게 날 도와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번에도 뒷북쳤는데. 젠장, 이 미래를 로열패밀리를 선택하기 전에 봤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만 봤어도······.
돌아버리겠네, 진짜. 이제 어떡하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를.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포털의 실시간 인기검색어 1위에는 줄곧 내 이름이 떠 있었다.
정리된 건 하나도 없는데, 아침은 밝았다.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을 챙겼다. 밤사이에도 어제 나간 방송 때문에 메시지가 쏟아지더니, 아직도 시도때도없이 진동하고 있다.
이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공적으로 온 연락들만 대강 살펴봤는데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인터뷰하고 싶으니, 또는 섭외 관련 얘기를 하고 싶으니 시간 될 때 연락 달라는.
어제 방송이 나간 이후로 인터넷이 난리라는 내용도 많고.
미래에서 들은 거지 같은 힌트와 로열패밀리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느라, 방송에 대해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시작된 건, 원룸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방 여자를 마주쳤을 때부터였다. 마주치면 그냥 목인사만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날 힐끔거리더니 불쑥 물어왔다.
“저기, 제가 몇 달째 취업이 안 돼서 죽겠는데, 여름 전엔 되겠죠?”
“아······ 네, 꼭 됐으면 좋겠네요.”
웬 뜬금없는 소린가 싶었지만,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 상태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취업 때문에 엄청 답답한가 보다, 하고.
그다음은 카페인을 때려 붓고 정신을 좀 차리려고 커피숍에 들렀을 때였다.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있던 남녀의 대화가 들렸다.
“음, 뭐 마시지? 오빠, 여기 뭐가 맛있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정 실장이냐?”
깜짝 놀랐다. 내 얘기 하는 줄 알고.
한국에 정씨가 한둘도 아니고 나 말고도 수많은 정 실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남녀가 주문을 마치고 돌아섰다. 눈이 딱 마주쳤다.
“으아아, 깜짝이야!”
“엄마야! 이거 뭐야, 뭐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그거야?”
나야말로 식겁했다.
선글라스 쓰는 걸 깜빡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저렇게 간 떨어지는 반응을 이끌어낼 만큼은 아닐 텐데. 호랑이는 또 무슨······ 설마 좀 전에 말한 정 실장이 진짜 난가?
남녀뿐만이 아니었다. 커피숍의 직원들과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까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수군대는 소리마다 정선우, 정 실장, 두 가지 호칭이 어김없이 끼어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지금까지도 알아보는 사람들이야 있었지만, 그거야 눈썰미 좋은 소수였고. 그중에서도 연예인도 아닌 나한테 아는 척하고 말까지 거는 사람은 더 소수였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나한테 달려들 것 같은 기세다.
‘지금우리’ 프로그램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저어, 안녕하세요.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진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표정을 관리했다.
“아, 네. 뭔데요?”
“저희 올해 결혼할건데요, 식을 몇 월에 올리는 게 좋을까요?”
“······그걸 왜 저한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민까지 휙 날아갈 정도였다.
예비부부가 스타트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재미난 이벤트라도 만난 사람들처럼,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희한한 질문들을 던진다.
거의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다. 당장에 인터넷부터 뒤졌다.
그리고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포털, SNS, 커뮤니티 사이트. 사방에서 내 이름이 바퀴벌레 알 까는 것처럼 증식하고 있었다.
넵튠과 관련된 글도 아니고, ‘지금우리’와 관련된 글도 아닌. 전혀 상관없는 글과 댓글에까지 내 이름이 끼얹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궁금하면 정선우한테 물어봐.
-내가 정 실장인 줄 아나.
-그건 며느리도 몰라, 정선우도 몰라.
맙소사. 이게 뭐야. 꿈인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홍보팀 박 팀장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대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지금 출근 중이지? 빨리 와봐, 빨리!
*
“아이구, 정 실장님!”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었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손을 금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주무른다. 좀 있으면 날 끌어안고 엉덩이도 두드릴 것 같은 기세였다.
“웰메이드 프로덕션 마케팅 담당자분이셔.”
박 팀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소개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테이블에 둘러앉자마자 박 팀장이 말을 꺼냈다.
“자기, 지금 온라인 상황은 대충 알지?”
“오면서 보긴 봤는데요.”
“넵튠 공카에서 활동하는 팬 한 명이 자료를 만들어서 카페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그걸 여기저기 퍼가면서 밤사이에 확 퍼졌어.”
박 팀장이 태블릿을 켜서 그 자료라는 걸 보여줬다.
제목은 [넵튠 매니저 정선우 실장 팩트 정리, 지림 주의]다.
넥스트 K스타부터 시작해서 내가 관여한 작품 리스트와 첨부설명이 엄청 정성스럽게 정리돼있다. 어제 ‘지금우리’ 본방에서 나온 자료화면은 비교도 안 된다. 이건 거의 논문이었다.
심지어 임서영의 어머니가 점 봤던 얘기도 쓰여 있다. 뱀이 복을 물고 오니까 그 뱀을 놓치지 말고 꼭 잡으라고 했다는 무당의 발언, 그리고 내가 마침 뱀띠라는 것까지. 예전에 잡지 인터뷰 때 딱 한 번 말했던 건데.
자료 말미에는 내가 실장으로 승진했다는 정보까지 있었다.
“밑에 댓글들도 봐봐.”
박 팀장이 스크롤을 쭉 내렸다.
-뭐여, 이건. 읽다가 지려서 팬티 두 번 갈아입었음.
-이게 팩트라고요? 진짜? 월드컵 결과도 예측시켜보고 싶다.
-이 자료 진짜예요.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손대는 것마다 잘되니까 W&U에서 다른데 가지 말라고 승진시켜준 거라던데.
-운이 억세게 좋은 걸까, 아님 능력일까? 올해의 미스터리 감인데?
-어느 정도 능력도 있긴 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운빨로 얻어걸린 거겠죠. 잘될 작품, 잘될 노래만 쏙쏙 골라내는 능력이 있으면 뭐하러 실장 하겠음. 바로 회사 차려서 대표하지.
-근데 운빨이 저렇게 좋으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난 거 아닌가요?
-막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 왠지 뭘 물어봐도 정답을 찍을 것 같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 222
“그런 식으로 자기 이름이 퍼지다가 지금 상황까지 간 거야.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무슨 유행어처럼 쓰기 시작한 건 봤지?”
박 팀장은 마치 로또에 당첨된 듯한 표정이었다.
“연예계 쪽 얘기만이 아니라 문화, 사회, 심지어는 정치 얘기에서까지 자기 이름이 막 튀어나오고 있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이거, 하루 이틀 갈 게 아니야. 유행처럼 번질 거 같아.”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저희가 같이 부채질을 엄청 할 거고요.”
웰메이드 마케팅 담당자가 흥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이것도 좀 보실래요?”
마케팅 담당자가 태블릿 페이지를 넘겼다. 또 다른 웹사이트의 댓글 반응들을 잘라놓은 자료가 주르륵 뜬다.
-정선우 실장이 새로 골랐다는 드라마 뭐였죠? 그것도 성공할까요?
-로열패밀리요. 이것도 잘되면 진짜 소름인데.
-고양이 수호령 때는 이송하 연기력 논란 터져서 본방 궁금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드라마 잘될지 안될지 그걸로 겁나 궁금하게 만드네.
“선우 씨가 고양이 수호령 이후에 차기작으로 선택한 게 우리 로열패밀리라, 선우 씨가 화제 되는 만큼 우리 작품까지 같이 홍보되고 있어요.”
마케팅 담당자의 말에,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람들이 드라마 시작하기도 전에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게 꼭 고양이 수호령 시작할 때랑 상황이 비슷하지 않아? 그래서 로열패밀리도 같은 전략을 좀 써보려고.”
“······같은 전략이요?”
“판을 더 키워보자는 거지. 그때처럼.”
돌겠네.
하마터면 목구멍에 꾸역꾸역 차있는 말을 뱉을 뻔했다. 이번엔 전이랑은 상황이 다르다고. 로열패밀리는 망한다고. 지금은 판을 키우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갈지를 고민해야 하는 엿 같은 상황이라고.
마케팅 담당자가 다시 말했다.
“우리 쪽에서도 아무도 예상 못 한 상황이라 회사도 지금 난리가 났어요. 보도자료 하나 돌렸을 뿐인데 이게 웬 횡재냐고. 이건 정말, 로열패밀리 잘되라고 신이 돕는 거 아닐까 싶다니까요.”
“웰메이드는 선우 씨 덕분에 마케팅 비용 세이브하고 홍보 거저 하게 생겼는데, 잘되면 뭐 오는 거 없어요?”
“왜 없겠어요. 홍보가 잘되니까 잠재적 투자자들한테서 문의전화가 얼마나 오는데요. 이러다 PPL로 떡칠하게 될지도 몰라요. 선우 씨가 지금처럼만 도와주시면, 우리가 설마 입 싹 닫겠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선우 씨 차는 있어요.”
농담처럼 말한 박 팀장이 나한테 한쪽 눈을 찡긋한다. 젠장, 누군가 내 숨통을 양쪽에서 잡고 줄넘기를 하는 기분이다.
박 팀장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게 진짜 본론인데, 언론 쪽에서 선우 씨 코멘트 몇 개만 달라고 아주 난리거든. 어차피 우리도 살살 추가 보도자료를 풀어야 할 타이밍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선우 씨 멘트를 두어 개 끼워 넣으려고 하는데. 그냥 간단한 코멘트면 되는데, 어때?”
그리고 마케팅 담당자가 손을 맞잡은 채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이건 꼭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선우 씨가 잘될 것 같은 작품으로 로열패밀리를 선택한 이유가 뭔지. 그리고 이 작품이 얼마나 잘될 것 같은지.”
이거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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