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2) >
판 프로덕션의 오디션 대기실.
널찍한 공간에 열댓 명의 인원이 모여있었다. 같은 배역으로 경쟁하는 배우들과 매니저가 서로 견제의 시선을 주고받고 있을 때. 대기실 문밖에서 판 프로덕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대기실이에요. 순서 되면 제가 콜하러 올 테니까 여기서 대기해 주시면 돼요, 실장님. 으아, 이거 어색하네요.”
“저도 아직 어색해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실장이라는 사람을 대하는 직원의 어투가 몹시 살가웠다. 대기실 안의 사람들이 닫힌 문을 주시했다. 혹시 급이 높은 배우가 참전하는 건가, 하고 바짝 긴장한 시선들이었다.
곧 대기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후드를 푹 눌러쓴 남자였다. 시선들이 남자의 얼굴을 스캔했다. “누구지?”, “처음 보는데?”, “무명인가 보다. 신경 쓰지 마.” 속닥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견제로 빛나던 눈빛들은 새로운 경쟁자가 무명배우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식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키가 크고 인상이 범상치 않은 남자가 무명배우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배우는 아니었지만, 몇 명은 단숨에 남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사람 아냐? W&U?”, “맞네, 정선우 매니저.”, “뭐야, W&U에서 키우는 신인이야?”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커지자, 정선우가 대기실 안을 쭉 둘러봤다. 떠들던 사람들이 입을 싹 닫았다.
두 사람이 빈 의자를 찾아 앉았을 때.
구석 자리에 있던 매니저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 남조윤······ 아닌가? 맞지?”
“이 바닥 참 좁네.”
남조윤이라고 불린 무명배우가 대답했다. 정선우가 둘을 쳐다보자, 남조윤이 말했다.
“예전 소속사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아.”
정선우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가 다시 물었다.
“조윤 씨 연기 계속 하는구나. 혹시, 소속사가 W&U야?”
엿듣고 있던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시선 속에서, 남조윤이 툭 던지듯 대답했다.
“아뇨.”
“그럼, 왜···?”
매니저가 정선우를 힐긋거리며 말을 흐리자, 정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따라다니는 중이에요. 관심 있어서.”
그 말에 대기실 곳곳에서 긴장 풀린 한숨이 터졌다. W&U라는 거대 소속사를 등에 업고 있다면 마땅히 견제해야 할 대상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흔하디흔한 무명배우일 뿐이었다.
남조윤에게 말을 걸었던 매니저 또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벌써 10분째. 박 감독은 좌변기에 앉아 있었다.
곧 있으면 오디션을 시작해야 할 시작인데, 며칠째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놈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그가 괄약근에 힘을 주며 시간을 확인했을 때였다.
“너, 그놈은 어떻게 꼬셨냐? 그놈도 참 보는 눈 더럽게 없네.”
좀 전부터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대화가 시작됐다.
“미친놈이 회사 뒤집어놓고 나가길래 연기도 때려치울 줄 알았더니. 하긴, 그 나이에 새로운 일 찾는 것도 힘들긴 하겠지. 근데 그렇다고 계속 이 바닥에 붙어있으면 뭐 좋은 꼴 볼 거 같냐?”
“그러게요. 이 바닥에 계속 붙어있으니까 그게 거슬리네. 보기 싫은 놈을 자꾸 보게 되는 거.”
두 번째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한편으론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듣고 있던 박 감독이 대놓고 귀를 기울였다.
“뭐? 새꺄,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너···!”
“왜, 또 주먹질이라도 하려고? 얼마 전에 봤으면 서로 재밌을 뻔했는데 아쉽네. 지금은 얼굴에 흠집 내면 안 되거든. 그쪽 말처럼 보는 눈 없는 실장님이 날 위해서 잡아준 오디션인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 새끼가 근데!”
“그쯤 해둬요. 지금 내 주머니에 칼 있어. 오디션 소품으로 가져온 건데, 댁 말마따나 미친놈이 그거 가지고 또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잖아. 안 그래요?”
그 아슬아슬한 목소리가 귀에 꽂힌 순간.
박 감독은 쾌변과 동시에 유레카를 외쳤다.
“확 꽂혔어요. 운명인 거 같아요.”
박 감독이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김판석 대표가 혀를 찼다.
“운명 같은 소리 하네. 배우 얼굴도 못 봤다며?”
“나가니까 없더라고요. 똥을 중간에 끊었어야 했는데.”
“얼굴도 못 본 배우한테 꽂히긴 뭘 꽂혀. 오디션이나 제대로 봐.”
김판석 대표가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오디션이 이어지는 동안 박 감독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김판석 대표와 다른 심사자들이 호평한 배우도 몇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화장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말투, 몇 마디만으로도 물씬 느껴지던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 그게 너무 강렬하게 남아선지, 어떤 배우를 봐도 그만큼 마음에 차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때.
“다음 차례, 남조윤 씹니다.”
“남조윤?”
김판석 대표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박 감독의 옆구리를 찔렀다.
“박 감독, 이 친구는 성의 있는 척이라도 좀 하고 봐.”
박 감독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프로필을 넘겼다.
“이 배우가 그 친구예요? 이송하 매니저가 데려온다는? 설마 나 몰래 내정해놓고 그런 건 아니죠? 억지로 꽂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거 중요한 배역이니까.”
“배우야 당연히 실력보고 뽑아야지. 그래도 오디션 건성건성 봐서 사람 섭섭하게 만들진 말란 말이야. 정선우 씨한테는 고양이 수호령 일로 고마운 게 많아서 그래. 그리고 그 작품으로 돈 못 벌었으면 이 영화 시작도 못 했어, 임마.”
“알았어요, 알았어. 한번 봅시다.”
박 감독이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오디션 룸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박 감독의 시선은 인터넷에서 스치듯 봤던 얼굴, 정선우한테 먼저 머물렀다. 오디션 본 배우 중에 가장 범죄자 역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다음으로 동행한 배우한테 시선을 돌렸을 때.
박 감독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저쪽도 나쁘지 않다. 범죄자치곤 어중간하게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눈빛에는 제법 거친 맛이 있었다. 배역에 맞춘듯한 차림새도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아직도 화장실의 그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박 감독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 배우도 딱 저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는데.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남조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 감독이 입에 물고 있던 펜을 뚝 떨어뜨렸다.
그가 몇 번 입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혹시 주머니에 칼 있어요?”
고개를 갸웃한 남조윤이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낸 순간.
박 감독은 비로소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조윤이 그 칼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오디션 대사를 쳤을 때. 그는 김판석 대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며 속삭였다.
“저 친구, 저 친구로 하죠.”
***
뭔가 엄청나게 얼떨떨하다.
“화장실이요?”
“거기서 확 꽂혔다네요, 감독이.”
나만큼이나, 김판석 대표도 이 상황이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대체 남조윤이랑 감독이 화장실에서 뭘 했길래 꽂혔다는 거지? 뭔가 상상할수록 이상한 그림만 떠올라서 고개를 저어버렸다. 나가는 대로 남조윤한테 물어봐야겠다.
“사실 진짜 말도 안 되는 배우만 아니면, 단역으로라도 캐스팅은 꼭 할 생각이었어요. 선우 씨한테는 고마운 게 많아서 이번에 좀 갚으려고. 그런데···.”
김판석 대표가 말하다 말고 씩 웃었다.
“어째 이번에도 내가 고마워해야 할 것 같네요.”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긴, 선우 씨가 이상한 배우를 데리고 다닐 안목은 아니지. W&U 소속은 아니라고 했죠?”
“네. 제가 개인적으로 지켜보는 배우예요.”
묘한 눈으로, 김판석 대표가 나를 쳐다봤다.
“몇 달 전에 선우 씨가 송하 씨 데리고 오디션 보러 왔던 거 생각나네. 그때만 해도 송하 씨 아무도 몰랐는데. 몇 달 만에 이렇게 잘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 김판석 대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얘기를 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남조윤 씨가 이렇게 잘될지 누가 알았겠느냐고.”
*
“보도자료는 다 나간 거죠?”
“네, 우리 쪽에서도 돌렸고, 웰메이드 프로덕션에서도 돌렸대요. 방송 시작하자마자 송하 씨 차기작 확정기사 미친 듯이 뜰 거예요.”
김현조의 물음에 홍보팀 여직원이 대답했다.
본방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라운지에 있는 TV 앞에 사람이 늘어났다. 지하에서 연습하다가 부랴부랴 올라온 넵튠 멤버들이 가운데를 차지했고, 나와 신입, 김현조, 홍보팀 직원들이 애들 주변을 둘러싸고 앉았다.
젠장. 이 방송만큼은 원룸에서 조용히, 나 혼자 보고 싶었는데.
“뭐예요? 오늘 뭐 하는 날이에요?”
“그거요, ‘지금부터 우리는’ 본방.”
“아, 그 뉴스 나왔던 그거? 그게 오늘 방송이에요?”
다른 직원들까지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가 보면 월드컵이라도 방송하는 줄 알겠다.
문제는 회사만 이런 게 아닐 거라는 거다. 엄마 아버지를 중심으로 친척들도 우글우글 모여서 TV 앞에 앉아있겠지. 형 집에서도 네쌍둥이들이 학교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방송을 기다리고 있을 거고.
인터넷도 술렁거리는 중이다. 사건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좀 잠잠해졌었는데, 오늘 방송 때문에 또 내 이름이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다.
어떻게 편집이 됐을까. 넵튠 애들 위주의 편집이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길거리를 걷다 보면 얼굴이 따가워서 선글라스를 필수로 들고 다니는 상태다. 가끔은 내가 매니전지 방송인인지 헷갈릴 정도다. 진심으로, 이보다 더한 관심은 필요 없다.
“조용, 시작한다.”
홍보팀 박 팀장의 손짓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그라졌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며, 나는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 얼굴이 많이 나오지 않기를.
맙소사.
“엄마야, 여기 선우 씨 실시간 검색어 2위로 올라갔어요!”
“웬일이야, 어뷰징 기사 헤드라인마다 선우 씨 이름 다 박혔는데요?”
홍보팀 직원들이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었다.
넵튠 애들은 아까부터 웃느라 정신없고, 주위에 몰린 직원들은 나와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소름, 소오름!’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놈의 소름, 자막에도 몇 번이나 떴는지 모르겠다.
“와, 나 팔뚝에 닭살 봐. 정 실장님, 혹시 진짜 뭐 보이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저래?”
“안 보입니다. 저거 예능이에요.”
“선우 씨가 찍었다는 송하 씨 차기작, 제목이 뭐라고 그랬죠?”
“······로열패밀리요.”
“아직 조연은 오디션 보는 중이겠지? 내 배우한테 얘기해볼까 봐.”
환장하겠다. 진짜, 정말로.
프로그램 속에서 나는 엄청난 촉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사고를 막은 능력자처럼 편집됐다. 거기다 내가 넵튠이 음방 1위를 할거라는 말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밀어붙인 드라마와 타이틀곡의 성공까지 늘어놓으며 날 정말로 뭔가 있는 사람처럼 몰아간다.
앞으로 바깥에 어떻게 나다니지. 눈앞이 깜깜하다.
한숨을 내쉬며 무릎에 올려놓은 넷북을 쳐다봤다. 넋이 탈출하기 전에, 모니터링으로 현실도피를 할 생각이었다. 오늘 방송을 미끼 삼아 보도자료를 듬뿍 뿌렸으니까. 이송하의 신작 캐스팅 소식을 함께 터뜨리려고.
그런데. 메인에 뜬 인터넷 기사 헤드라인이 가관이다.
[이송하 차기작 ‘로열패밀리’ 미다스의 손 정선우가 찍은 기대작, 이번에도?]
-웬 미다스의 손? 이송하 신작 언플 엄청 오글거리게 하네.
-지금부터 우리는 본방 보면 이해됨. 오글오글이 아니라 소오오름임.
-뭘 또 소오오름씩이나. 예능 재미로 보는 거지, 진지 먹지 맙시다.
-근데 진짜, 정선우 매니저 붙고부터 넵튠 일 풀린 거 생각하면 저게 그냥 예능으로 안 보임. 넥K, 고양이 수호령, 이태희 타이틀곡 줄줄이 대박, 출연한 예능도 둘 다 대박. 이 정도면 촉 하난 끝내주는 거 맞음.
-헐. 저게 다 진짜면, 평생 쓸 운 다 끌어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 지금이라도 로또를 사, 이 양반아!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망할 작품도 귀신같이 맞춘다는 썰이 있음!
-1절만 하시죠. 그 정도면 신 내림 받아야 함.
-이번 로열패밀리도 잘되면 진짜 미다스의 손 인정합니다.
댓글 창을 몇 줄 읽다가 닫아버렸다. 이송하 차기작에 대한 네티즌들 반응을 보려고 했는데 내 얘기가 더 많다. 이게 잠잠해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니, 잠잠해지기나 할까.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
떠들썩하게 들리던 말소리가 갑자기 훅 멀어진다.
그리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저분한 노이즈를 본 순간, 긴장감으로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미래다. 내가 잠 못 이루고 고민하는 동안 몇 번이나 갈망했던 미래.
뭐지? 신작 드라마에 관련된 미랜가? 지금 타이밍으로 봐선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데.
재빨리 시야에 보이는 걸 살폈다. 바로 앞에 소주잔이 보인다.
술집이구나.
이미 술을 좀 마셨는지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턱을 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원목무늬 테이블과 반쯤 빈 소주병, 그리고 치킨으로 보이는 안주밖에 안 보인다.
힌트가 될만한 걸 찾아서 눈과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사람이 매번 성공해요? 한 번씩 실패할 때도 있는 거지.”
맞은편 자리에서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린데. 누구지? 잡음이 섞여 있어서 아직 정확히 누군지 모르겠다. 몇 마디만 더 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했을 때.
여자가 다시 말했다.
“로열패밀리가 선우 씨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니잖아요.”
<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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