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1) >
내가 생각했던 타이밍은 아니지만, 별수 없지.
이렇게 된 거 남조윤에 관해 설명하려고 마음을 굳혔다.
“며칠 전에 너희 스케줄 못 따라갔던 날 만난···.”
“으아아!”
별안간 임서영이 소스라치며 괴성을 질렀다. 혈색 없는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까지 한다.
“배, 배, 배···!”
“배?”
“배신자!”
뇌가 우뚝 멈췄다. 내가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호칭인데.
“어, 어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오빠가!”
“잠깐, 너 좀 진정하고. 내가 뭘 어쨌···.”
“이, 이 상황에 어떻게 진정을 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 좀 봐! 오빠 진짜 너,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사람도 아냐! 더러운 세상!”
그러니까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
이게 대체 웬 난리야. 내 말이 이만한 후폭풍을 불러올 말이었나?
애들이 뭔가에 단단히 충격을 받은 건 확실했다. 임서영은 내 양쪽 팔뚝을 부여잡고 짤짤 흔든다. 오빠가 어떻게 그러느냐고 서럽게 소리치면서. 누가 보면 내가 나라 팔아먹은 놈인 줄 알겠다.
이태희와 엘제이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정말 나한테 배신이라도 당한 애들처럼.
그리고 이송하는······ 쟤는 뭐가 저렇게 원통한 거야?
임서영처럼 대놓고 터뜨리지는 않지만, 오히려 쟤 상태가 더 심상찮다. 당장에라도 맨바닥에 엎드려서 땅을 칠 것 같달까. 저대로 내버려두면 악령으로 진화할 것 같달까.
나한테 뭔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한 것 같은데. 그걸 또 뭣 때문인지 꾸역꾸역 참고 있는 게 보인다. 손에 든 이온음료 페트병만 우그러뜨리면서.
나는 이송하를 곁눈질하면서 물었다.
“왜들 이래. 뭣 때문에 이러는지 알아듣게 얘길 해봐.”
임서영이 득달같이 소리친다.
“전 손채영 싫어요!”
“······나도 싫어. 그런데 이 시점에 그게 왜.”
“거짓말! 싫으면 왜 손채영이랑 일한다는 건데요!”
“누가?”
“오빠요!”
“내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임서영이 멈칫한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굴러다녔다. 그 뒤로 엘제이와 이태희의 얼굴에 뭔가 이상한데, 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어, 오, 오빠가···.”
“야, 그만해, 멍청아. 아닌가 봐.”
뒤쪽에서 엘제이가 임서영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이태희가 나서서 물어왔다.
“오빠가 새로 맡았다는 배우가, 손채영 아니에요?”
“아니야.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듣고 온 거야?”
“그게······.”
이태희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듣고 나니 더 기가 막힌다. 내가 핸드폰을 꺼내서 손채영이 뭐라고 저장돼있는지 보여주고, 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종지부가 찍혔다.
“서영이 너 나보고 뭐랬더라. 뭐, 배신자? 사람도 아냐?”
내 시선이 따가운지, 임서영이 움찔움찔하며 내 눈치를 본다.
“저어기요, 오빠. 저는 정말로 오빠가 손채영한테 홀린 줄 알고 머리가 그냥 하얘져서. 진짜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시, 심신미약 상태였으니까 못들은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택도 없다.”
“으아아, 잘못했어요!”
임서영이 내 팔을 잡고 매달렸다. 그래도 오해가 풀려선지, 발을 동동 굴러도 아까보다는 표정이 밝다. 이태희와 엘제이도 경직돼있던 어깨를 편안하게 늘어뜨린 채 임서영의 행태를 구경했다.
“내가 맡겠다고 한 사람은 남조윤 씨라고, 며칠 전에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남배우야. 우리 회사 소속이 아니라서 내 개인적인 일인 거고.”
남조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송하를 살폈다.
다행히 악령으로 진화하는 건 막았다. 점점 정화되고 있다. 아직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긴 하지만.
보다가 이송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송하가 흠칫 놀란다.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곧바로 이송하가 고개를 푹 숙인다. 아니, 아예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다.
“송하야, 넌 왜 그러고 섰어. 손채영 생각나서 그래?”
“아, 아니에요. 저 괜찮,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니긴, 얼굴 좀 봐봐.”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황한 목소리가 나를 밀어낸다.
저건 대체 무슨 반응이지. 손채영 때문이 아니면, 남조윤 때문인가?
날 잘 따르는 데다가 배우니까, 내가 저 이외에 다른 배우랑 일한다고 하면 다른 애들보다는 더 신경 쓸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래도 저건 반응이 희한해도 너무 희한한데.
고개를 갸웃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애가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페트병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더니 게걸음으로 피한다. 그리고 아까부터 대기상태로 서 있던 신입사원, 이관우의 등 뒤로 쓱 들어갔다.
“너 왜 그래? 이리 나와봐.”
“안 되겠어요. 저 지금 마음이 심란해서 얼굴 되게 이상해요.”
덩치 큰 신입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꼬리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빙빙 두 바퀴를 돌았다.
“네 얼굴은 랩을 뒤집어씌워도 안 이상해, 그러니까 나와 봐봐.”
“안 돼요. 지금은 이런 얼굴하고 있으면 안 되는 때란 말이에요.”
신입의 어깨 뒤에서, 이송하가 망했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세 바퀴째를 돌면서 다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그게 무슨 땐데.”
“그런 게 있어요. 저한텐 좀 중요한 거예요.”
이해하려고 노력해봤다. 안 되겠다. 내 정신세계로는 무리다.
그냥 확 잡아서 끄집어낼까, 고민하는데 엘제이가 물었다.
“둘이 지금 뭐 해요?”
“송하한테 물어봐라. 뭐 하는지.”
다른 애들이 보기에도 우리 꼴이 어이가 없는지, 표정들이 해괴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신입을 쳐다봤다. 신입은 등 뒤에 이송하를 숨긴 채, 옴짝달싹 못 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다.
그 모습이 영 거슬려서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신입이 더 굳는다.
젠장. 처음으로 들어온 후배라 이미지 관리 잘하고 있는데. 망했네.
“관우 너, 잠깐만 비켜봐.”
“안 돼요. 비키지 마세요.”
이송하가 재빠르게 말했다. 냉큼 비켜서려던 신입이 우뚝 멈춘다.
“비켜보라니까.”
“아, 안 돼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신입 뒤에서, 이송하의 목소리만 삐져나왔다. 안 되겠다. 잡아서 꺼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송하가 홱 돌아서서 반대방향으로 도망쳤다. 헬스장 문에 몸통박치기를 하다시피 하며 들어간다. 나는, 아니 나를 비롯한 모두가 흔들리는 헬스장 문을 쳐다봤다.
“쟤가 대체 왜 저러는 거 같아?”
“오빠가 이송하 전문가잖아요. 오빠가 모르는 걸 우리라고 알겠어요?”
내 물음에 엘제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임서영이 옆에서 ‘그 날인가? 호르몬이 막 날뛰나?’ 하고 중얼거렸다.
“가보세요. 저희보다 오빠가 가보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태희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할 말이 떠올라서 신입을 쳐다봤다.
“대행사 측에 전화해서 오늘 대학축제 행사, 스탠바이 시간 다시 확인해봐. 변경사항 없는지.”
“네, 실장님.”
신입의 널찍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엔, 내가 비켜달라고 하면 좀 비키고.”
여자 탈의실 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딱 멈춘다.
“송하야, 너 그 안에서 혼자 뭐해.”
“옷 갈아입는데요.”
숨어있는 중이면서, 대답은 재깍재깍 한다.
“그래? 그럼 기다릴 테니까 갈아입고 나와봐.”
“오빠 먼저 가세요. 저는 한 삼십 분쯤 걸릴 것 같아요.”
“옷을 만들어 입게?”
“그게, 속옷이 없어진 거 같아서 찾고 있어요.”
어떻게든 나를 먼저 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변명이다.
“너 혹시 내가 다른 배우랑 일한다고 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그런 것도 조금 있어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집에서 같이 시나리오 얘기하고, 오빠 집에서 밥도 먹고, 저보다 더 친해 보여서 좀 부러웠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전 오빠 일하시는 거 방해 안 할 거예요.”
“송하야.”
“지금 이건, 그러니까 그냥 제가 좀, 속이 좁아서···.”
“아냐, 속이 좁긴. 신경 쓰일만하지. 나도 네가 신입 뒤에 붙어있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좀 심란하던데.”
“···진짜요?”
바닥을 기어가던 이송하의 목소리가 벌떡 일어난다. 탈의실 문 너머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다음 스케줄까지 두 시간쯤 남았는데 차에서 시나리오 얘기 좀 할까?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드라이브하면 기분전환도 될···.”
“갈래요.”
문이 벌컥 열렸다.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이송하가 성큼성큼 나온다.
“너 찾던 건 찾았어?”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빨리 가요, 오빠. 시간 아깝잖아요.”
슬그머니 눈을 피한 이송하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재촉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송하가 환하게 웃으면서 따라왔다.
*
웰메이드 프로덕션의 성 부장이 말했다.
“국내에선 PBS 수목 편성 받았고. 중국 쪽도 YKTV에 선판매 다 끝났어요. 사전제작 끝나는 대로 한국, 중국이랑 홍콩, 대만에서도 동시 방영될 거고.”
그의 옆으로는 한중합작 드라마 ‘로열패밀리’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멀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웰메이드 프로덕션의 직원들이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물론 내 옆에도 김현조와 3팀장, 그리고 이송하가 자리 잡고 있고.
“송하 씨는 어떻게 봤어요? 1, 2부 대본 보낸 거.”
화려한 귀걸이를 달고 있는 40대 여자, 장 작가가 물었다.
초짜였던 고양이 수호령 홍주미 작가와는 달리, 저쪽은 이미 칠 년째 히트작을 줄줄 뽑아내고 있는 유명 작가다. 회당 작가료가 4천만 원이 넘는다던가.
시선이 집중되자 이송하가 과일 안주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재밌어서 받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사실 선, 실장 오빠랑 대본리딩까지 해봤어요. 주연 커플이 두 쌍이라 스토리도 풍성하고, 로맨스 복수극이라 다음 내용이 엄청 궁금하더라구요.”
말하면서 내 쪽을 힐끔 쳐다본다. 잘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이송하의 입가에 언뜻 편안한 웃음이 떠오른다.
이송하는 그 뒤로 캐릭터에 대한 감상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담담하던 표정에 들뜬 기색이 어릴 때까지. 계속 이송하를 평가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장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레나룻부터 털을 덥수룩하게 기른 우 감독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송하 씨 전작 보니까 영어를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하던데. 중국어는 어때요? 한류스타 여배우 역이라서 중국어 대사가 좀 있는데?”
“간단한 회화는 할 수 있어요. 연습생 때부터 레슨받았거든요.”
이송하의 대답에 감독이 호오, 하고 감탄했다. 3팀장이 덧붙였다.
“요즘은 아이돌이건 배우건 해외 활동, 특히 중국활동은 필수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나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중국어랑 영어 레슨을 받는 중이다. 나중을 위해서.
“그럼 넵튠은 언제쯤 중국활동 시작할 계획이세요?”
“고양이 수호령 중국 방영시기 맞춰서 팬 미팅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이번 앨범이 대박이 난 데다가, 송하가 드라마 때문에 중국에서 반응이 괜찮아서요.”
웰메이드 프로덕션 쪽 사람들의 표정이 한층 더 좋아졌다.
감이 좋다. 사전제작 드라마니까 스케줄 조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 그럼 잘하면 영화촬영이랑 병행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는데, 성 부장이 내 빈 잔에 양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정 실장님, 올해 방영하는 한중합작 드라마가 몇 편인지 알아요?”
“일곱 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로열패밀리까지.”
“맞아요. 더럽게 많지. 그중에서 우리 작품이 제일 잘돼야 하는데.”
잔을 부딪친 후에, 성 부장이 킬킬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 작품도 고양이 수호령처럼 잘되라고 힘 좀 넣어 줘 봐요.”
“네?”
“들었거든요. 정선우 실장님 안목이 무슨 신들린 것 같다는 얘기. 고사상에 돼지머리 올려놓고 대박 나게 해달라고 비는 것보다, 정 실장님 말이 더 효과가 좋을지도 모른다던데.”
그는 내 입에서 이번 드라마가 잘될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떨어졌다.
그 후로도 미팅 분위기는 줄곧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송하가 드라마 로열패밀리에 최종 캐스팅됐다.
*
이송하가 웰메이드 프로덕션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날 저녁.
나는 남조윤을 데리고 판 프로덕션을 찾았다.
“이상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남조윤이 물었다.
“계속 쳐다보시길래. 오디션이니까 배역 스타일로 입은 건데.”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본 거예요. 배역이랑 싱크로율만 따지면 오디션 볼 것도 없겠는데요. 배우가 아니라 진짜 범죄자 데려왔느냐고 하겠는데.”
남조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 있다.
작은 머리를 푹 덮고도 남는 시커먼 후드점퍼. 그 속의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고, 눈은 반쯤 내리감고 있다. 날렵하게 뻗은 턱이 껌을 씹느라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보면 볼수록 괜찮네. 사실 이 배역이 남조윤 씨 분위기랑 잘 어울려서 탐은 났는데, 너무 대놓고 미친놈 스타일이라 몰입이 잘 될까 걱정이었거든요. 남조윤 씨는 좀 점잖은 편이잖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조윤이 벽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는 내 어깨 위에 팔을 얹고, 범죄모의라도 하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요, 실장님. 잘할 테니까.”
후드 밑으로 입 끝이 슥 올라갔다.
“저 나이 먹고 사람 된 거예요.”
< 안갯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1)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