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08화 (108/218)

<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6) >

이건 또 웬 개수작이지?

남조윤 이야기가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2팀이요?”

“너 원래 배우 담당하고 싶어 했잖아. 여전히 그런 마음이면 3팀에서 배우는 건 한계가 있지. 그 팀 사람들이 가요 판에서는 베테랑일지 몰라도 이쪽 바닥은 또 한참 다르니까.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빨리 옮겨야지.”

2팀장은 진심으로 내 커리어를 염려하는 척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기도 했다. 드라마 촬영을 하는 동안은 김현조보다 이봉준 실장의 조언이 더 도움될 때가 많았으니까.

“물론 옮기더라도 이송하는 지금처럼 네가 맡아. 실장급은 여력 되는대로 두세 명까지 관리하기도 하니까 다른 배우도 한번 경험해보고.”

이 양반이 어디서 약을 팔아. 내가 물정 모르는 등신인 줄 아나.

“그 다른 배우가, 혹시 손채영 씹니까?”

“그래. 핸들링 참 안 되는 우리 탑스타.”

2팀장이 턱수염을 느리게 문지르며 말했다.

“혼자 이송하랑 채영이를 통으로 담당하는 건 당연히 무리고, 네 사수 겸 능력 있는 실장 하나 더 붙여줄 테니까 나눠서 한번 해봐. 그렇게만 하면, 나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테니까.”

목소리는 짐짓 다정하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송하랑 손채영 씨 관계가 더 나빠질 수도 없을 만큼 안 좋은 건 둘째치고. 전 손채영 씨가 싫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같이 일합니까.”

“왜 못해. 일인데.”

2팀장이 내 쪽으로 조금 더 상체를 기울였다.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손채영이 너한테 관심이 있잖아. 그걸 이용한다고 생각해.”

화가 난 손채영을 달래려고 날 장난감처럼 던져주겠다는 걸로 들린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너한테 득이 되는 걸 따져보라고. 네 커리어도 탄탄해질 거고, 나도 앞으로 널 내 새끼로 생각할 거고.”

하하. 올해 들어 최고의 개소리다.

내 새끼는 무슨. 어쨌든 나 때문에 임주원과의 계약이 순항 중인데. 그런 덕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손채영한테 밀어 넣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작자가.

서로 얼굴 붉히지만 않을 정도의 얕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면 모를까. 애초에 믿고 따를만한 사람은 아니다. 반년 전. 성도원 스캔들 사건 때, 그 로드한테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잘라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네가 데려온 배우, 걔도 너 하는 거 봐서······.”

2팀장의 눈에 살짝 탐탁잖은 기색이 스쳤다.

“까짓 거 계약서도 당장 써줄 수 있어.”

“남조윤 씨는 일종의 보상, 같은 겁니까? 만약 제가 제안을 거절하면.”

“계약도 없지. 어차피 회의 결과 영입은 반대쪽으로 쏠렸어. 안목 좋기로 자자한 놈이 이송하 다음으로 꽂힌 배우래서, 프로필은 별거 없어도 미팅 한번 해보자고 부른 건데. 뚜껑 열어봐도 실망스럽더구만. 그 정도 배우는 메일함에도 수두룩해. 게다가 전 소속사랑 소송까지 갔던 놈을.”

머릿속이 차갑다.

혀를 차던 2팀장은 곧장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만하면 나도 엄청 신경 쓴 거다. 그러니까 2팀으로 와. 알겠···.”

“아뇨.”

내 말에 2팀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확 가셨다.

“너 임마, 채영이 아니었으면 내가 너한테 이렇게 사정 봐주고 챙겨주겠어? 내가 최대한 네 사정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팀에서 계속 일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쪽 똥은 그쪽이 알아서 치우시라고.

까지 말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를 위해 아껴뒀다. 하지만 내 거절만으로도 2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가 흉흉한 기세로 일어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떠먹여 줘도 못 받아먹는 놈이구만.”

웃기고 있네.

내가 할 소리다.

*

“거기, 진행팀! 소품 뜯은 거 빨리빨리 차에 실어줘요!”

촬영이 끝나고 철거 중인 세트장.

남조윤은 소품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나르는 중이었다. 얼굴과 목은 물론,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등허리까지 땀으로 축축하다.

그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허리를 쭉 폈다.

“이거 다 나르면 돼요?”

박스 몇 개를 척척 쌓아 들면서 물었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남조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친구분이 여기 있다고 하시길래요. 스토킹 좀 했어요.”

“뭐하러 여기까지. 전화하셨으면 나갔을 텐데.”

“근처 지나던 중이라, 겸사겸사.”

일당을 받아야 밥값 생기는 사람인데, 하루 공치게 할 수야 있나.

“그럼 잠깐,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것만 날라놓고···.”

“거들어야 빨리 끝나죠. 빨리 끝내야 한마디라도 더 하고.”

어색해 하는 남조윤과 함께 짐을 나르다가, 본론을 꺼냈다.

“잘 안 됐어요. 그거.”

남조윤이 짐을 내려놓다 흠칫한다.

“미팅이요. 결과 나왔는데, 잘 안됐어요.”

짐을 다 나르고, 남조윤은 세트장 뒤에서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구해와 날 앉혔다. 그리고 생수와 김밥 한 줄을 얻어와 내밀며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셔도 됐는데.”

“이건 좀, 직접 얘기하고 싶어서요.”

“괜찮아요.”

그가 먼지가 가득한 맨바닥을 대충 털고 앉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번 겪는 거 아니에요. 저는 오랜만에 어릴 때 찍은 작품 알아봐 주는 사람 만나서 좋았으니까······.”

“이거, 가져가서 한번 보세요.”

식은 김밥 하나를 우물거리며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내밀었다.

“판 프로덕션에서 새로 들어가는 작품인데, 거기 대표님이랑 잘 알거든요. 시나리오에 제가 체크해 놓은 배역이 하나 있는데, 남조윤 씨 마음에도 들면 오디션 잡아볼게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남조윤의 표정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지금 무슨······.”

“꼬드기고 있는 거죠, 지금. 나랑 같이 일해보자고.”

사레가 들렸는지 남조윤이 쿨럭거렸다. 웃으며 생수를 내밀었다.

사실 3팀장에게 허락까지 받고 온 참이다. 넵튠 일에 영향을 안 끼치는 선에서, 일 외적으로 배우 한 명 더 챙기고 싶으니 좀 봐달라고.

“계약서 같은 것도 없고, W&U라는 배경도 못 쓰겠지만, 그래도 혼자 일하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해도, 제가 일은 꽤 잘한다는 소릴 듣는 편이거든요.”

생수 반 통을 꿀꺽꿀꺽 마신 남조윤이 숨을 내쉬었다. 메말라 있던 눈에 다양한 감정이 꾸역꾸역 올라온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남조윤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며 말했다.

“왜, 저한테 이렇게······ 실장님한테는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선택지가 많을 텐데.”

“남조윤 씨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이에요. 확인해보고 싶거든요.”

남조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하게 확인해보려고요. 제 안목이 쓸만한지.”

*

퍽, 이송하가 식칼을 내리쳤다.

도마 위의 주꾸미 대가리가 깔끔하게 잘려나간다. 그 모습을 캠코더로 찍고 옆으로 넘어갔다. 다른 애들도 각각 앞치마를 하나씩 매고 주방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애쓰고 있다.

내일 게스트로 나가는 프로그램에서 도시락을 지참하라길래 그 과정을 찍는 중인데, 이걸 제작진 손에 넘겨줘도 될지 모르겠다. 참 총체적 난국이다. 합숙생활 한 애들이 넷이면, 그중 한 명은 요리를 잘할 법도 한데.

진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주물럭거리던 임서영이 빽 소리쳤다.

“오빠, 쫌! 자꾸 비웃지 마요! 요리는 자신감이란 말이에요!”

“네가 만든 걸 봐, 안 웃겠나.”

볶음밥으로 고양이 얼굴을 만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악몽에 나올 것 같은 괴물을 만들어놨다.

“비전문가가 이 정도면 잘 만든 건데요!”

“그게 잘 만든 거면 내가 찍은 사진은 퓰리처상 감이다.”

“아, 진짜! 뭐, 뭐, 오빠가 하면 이것보다 더 잘할 것 같아요?”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임서영이 멈칫한다. 다른 애들도 하던 걸 멈추고 날 쳐다봤다. 이태희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려다가 망친 달걀을 집어 던지며 물었다.

“요리할 줄 아세요?”

“대충.”

“어어, 아닌데? 오빠 자췻집에서 뭐 안 해먹는다면서요! 고향이랑 형네 집에서 반찬 얻어다 먹는다고 했던 거 다 기억나는데?”

“그거야 귀찮고 바빠서 안 하는 거지. 뭣보다 걸신들린 어린애들 넷이랑 같이 살았는데 요리를 전혀 못 할 리가 있냐.”

“해, 해보세요!”

비닐장갑을 꼈다. 갑자기 이송하가 분주하게 싱크대를 뒤지더니, 뭔가를 찾아와서 내밀었다.

“오빠, 이거요. 이거 입고 하세요.”

앞치마다. 그것도 토끼가 그려진 손바닥만 한 앞치마.

“옷에 뭐 묻으면 안 되잖아요.”

“됐어, 넣어둬. 그걸 입느니 옷 벗고 하는 게 낫겠다.”

뭣보다 네가 그걸 꺼내자마자 엘제이가 캠코더를 들었다고.

실망한 이송하를 물리고 간만에 밥알을 만졌다. 볶음밥을 도시락통에 넣고 고양이 모양을 만들고, 김을 잘라다가 눈코입과 수염도 만들어 붙이고. 뚝딱, 금방 끝났다.

“자, 됐다, 고양이. 쉽지?”

“하나도 안 쉬워요! 그거 하나도 안 쉽거든요!”

다른 애들 도시락도 조금씩 손을 댔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송하가 계속 뒤에서 기웃기웃하면서 내가 뭔가를 할 때마다 감탄하길래.

“그만 좀 쳐다봐라. 뭐 엄청난 거 한다고.”

“제가 보기엔 대단한 거 같아요.”

“아부해도 너 줄 거 없어. 재료 딱 맞춰서 사왔다.”

“그런 거 아닌데. 저 맨날 배고프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이송하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물론, 주변에서 제 할 일에 열중하던 다른 애들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다 치고, 나 소매 좀 걷어주라.”

“소매요?”

“이게 자꾸 내려가서 신경 쓰이네. 너 손에 뭐 묻었으면, 태희···.”

“제가 할게요.”

이송하가 내 팔뚝을 덥석 붙든다. 그리고 옷소매를 착착 접어 올린다. 무슨 소매 접기 장인 마냥 진지한 얼굴로. 섬세하고 보드라운 손이 내 팔을 살짝살짝 스친다. 팔꿈치 아래부터 시작해서 느릿느릿 위로, 위로.

“그만. 어디까지 접을래. 어깨까지 접을래?”

“아.”

무심결에 한 짓인지, 이송하가 눈을 깜빡거리며 떨어졌다.

주방을 나와서 다시 캠코더를 잡았다.

애들 얼굴이 밝다. 배신자가 그런 식으로 잘리고 난 후로 배신감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분위기가 이상했었는데. 복잡한 심경을 속으로 감추고 있는 건지 겉모습만큼은 평소와 다름없다.

임서영이 도시락 뚜껑을 닫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오빠. 있잖아요. 우리 다 오빠랑 일하는 거에 너무 익숙해졌나 봐요. 저번에 현조 오빠 혼자 오니까 되게 어색하던데. 오빠를 자꾸 행운처럼 생각해서 그런가, 뭔가 일도 더 안되는 거 같았어요!”

“일이 안되면 큰일 나지. 인수인계 끝내면 앞으로 나는 큼직큼직한 스케줄만 같이 갈 건데.”

“헐!”

임서영이 깜짝 놀란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다.

멀쩡해 보이는 건 이송하뿐이었다.

“뭘 새삼 놀라. 나 실장으로 승진했잖아. 앞으로 바빠.”

“그, 그렇지, 참. 오빤 이제 실장님이죠. 다시 내려오면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지. 월급도 올랐는데.”

“우리 내팽개치고 따로 무슨 일 할건데요!”

내가 대답하기 전에, 이송하가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바쁘신 거죠. 중국 프로모션도 가야 하고, 차기작도 픽스해서 촬영해야 하고. 드라마 촬영할 때처럼 앞으로 저랑 둘이서 할 일 엄청 많을 테니까.”

“음. 그렇지.”

내 말에 이송하 얼굴이 확 밝아진다.

불현듯, 아까 보고 온 남조윤이 떠올랐다. 정식으로 맡게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앞으론 남조윤도 같이 보게 될 텐데.

다른 애들이야 가수랑 배우랑 노는 구역이 다르지만, 송하는 구역이 겹치니까 아무래도 더 신경 쓰이겠지. 특히나 쟤는 내가 다른 연예인 담당으로 갈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전적이 몇 번이나 있으니까.

얘기해놓을까, 하다가 말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다음에 하자.

지금은 손에 식칼도 들고 있으니까.

“참, 송하 너는 시놉이나 시나리오 본 것 중에 마음에 든 건 없어?”

“재밌게 본 것들은 있어요.”

이송하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갔더니 수북한 종이 무더기에서 몇 개를 꺼내 내민다. 내가 고뇌 끝에 찍어놨던 작품도 끼어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몇 개를 쭉 봤는데, 보다 보니 공통점이 있다.

“전부 다 엄청난 멜로물이네. 이런 게 취향이야?”

“재밌었어요.”

하나, 하나 넘겨보다가 마지막에 있는 시나리오를 보고 멈칫했다.

“이건 좀. 이건 완전 격정멜론데. 만약에 이 작품 하게 되면 너랑 나랑 대본리딩은 못 하겠다.”

이송하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저번엔 매일매일 밤마다 했잖아요.”

나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 이 시나리오 나도 봤는데. 중반부터는 페이지마다 사랑한다, 너 없이는 못 살겠다, 이런 대화가 나오잖아.”

“그게 왜요?”

“내가 상대역 대사를 해야 할 텐데 웃겨서 집중되겠어?”

내 말에 이송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속으로 대본리딩 하는 걸 상상해보는 모양인지, 모양 좋게 뻗은 눈썹과 입 끝이 몇 번인가 움찔거렸다.

이윽고, 이송하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왜요? 그게 왜 웃겨요?”

얘 반응이 왜 이래?

<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6) > 끝

ⓒ 장우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