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5) >
까, 깜짝이야. 놀라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뭐지? 갑자기 왜 받았지? 욕할 상대가 필요한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야, 정떨어지게 생긴 얼굴, 맞는데.
날 정떨어지게 생긴 얼굴이라고 저장해놨어? 일단 그건 내가 이겼···.
현실 도피성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안 들려요? 3초 안에 대답 없으면 끊어요. 삼, 이, 일, 뭐냐니까요?
끊는다며!
작게 혀를 차며 앞쪽을 살폈다. 2팀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다. 계속 신호가 가는 중인 줄 아나 본데. 2팀장 전화도 씹은 손채영이, 이유야 어쨌든 내 전화를 받았다는 게 어떻게 보일까.
음. 안 받은 걸로 하자.
결단을 내리고 전화를 뚝 끊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태연한 척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는 때였다.
“끊기 전에 목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젠장, 누구야. 저 쓸데없이 귀 밝은 인간.
“여자 목소리 같았는데.”
의심의 시선들이 내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쏟아졌다. 돌연 손이 떨렸다. 급성 수전증이라도 왔나 했는데, 진동이었다. 눈알만 슬쩍 내려서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2팀장이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다가왔다.
“누구야?”
누구긴, 이 구역의 미친년이지.
진동은 멈추지 않고, 2팀장은 당장에라도 핸드폰을 확인할 기세다. 일단 모른척하긴 글렀다.
“누구냐니까?”
“손채영 씨요.”
“뭐?”
다들 눈이 툭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어찌나 해괴한 얼굴들을 하고 날 쳐다보는지, 핸드폰이 아니라 손채영 머리채라도 쥐고 있는 느낌이다. 2팀장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나섰다.
“걔가 왜······ 아니, 일단 받아. 받아봐, 얼른! 끊기기 전에!”
뜸을 들였더니 2팀장이 손짓 발짓을 하며 재촉한다. 미간을 구기고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금 이 통화가 무척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야, 본인 맞네. 혹시 팀장님인가 했더니.
손채영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통에, 객실이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2팀장이 입을 벙긋거린다. 뭐라는 거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봤더니 2팀장이 부산스럽게 핸드폰에 메모를 써서 내민다.
[스피커폰!]
아.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자마자 손채영 목소리가 객실을 메웠다.
-잠깐, 팀장님이 시켰어요? 지금 팀장님이랑 같이 있어요?
2팀장이 재빨리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럼 뭐예요? 왜 전화했어요?
내가 손채영한테 전화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개뿔, 아무것도 없다.
2팀장이 다급히 메모를 적어 내민다.
[지금 어디냐고 물어봐! 그것만 알아내!]
“지금 어디예요?”
-그건 왜 물어요?
그러게. 2팀장도 당황했는지 핸드폰 화면에 메모를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다른 직원들이 옆에서 입을 벙긋거린다. 무슨 코미디 무성영화도 아니고. 누군가가 자기 핸드폰에 뭔가를 휘갈겨 쓰고 내밀었다.
[보고 싶어서?]
“보···.”
이 양반이 돌았나. 하마터면 따라 읽을 뻔했잖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더니 실장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제야 나와 손채영이 오작교가 아니라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사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
-뭐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왜 또 먹통이야. 핸드폰 좀 바꾸라니까 이 거지 같은 핸드폰은 왜 계속 들고 다니는 거야? 보, 뭐요?
손채영의 말투와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다. 듣자하니 멘탈이 폭발한 조 실장이 밴에서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고, 손채영이 진짜 길거리 한복판에서 내려서 사라졌다는 것 같던데.
소리를 꽥 안 지르는 걸 보면 밖인가? 별다른 소음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입만 벙긋거리고 있길래 대충 둘러댔다.
“본 것 같아서요.”
-뭐라구요?
“방금, 길에서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내가 생각해도 근본 없는 헛소리긴 하다. 2팀장의 표정이 격해졌다. 손채영이 이 상황을 눈치채고 전화를 끊을까 봐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주둥이가 멋대로 움직인 척했다.
잠깐동안 말이 없던 손채영이 코웃음을 쳤다.
-나 지금 집이에요. 비슷한 사람은 무슨. 나 같은 얼굴이 길에 흔한 줄 알아요?
나 참. 주변은 난장판인데 폭풍의 핵은 집에 있구만.
2팀장을 쳐다봤다. 핸드폰으로 조 실장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모양인데, 표정에 안도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제 더 얘기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됐고, 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때였다.
손채영이 묘하게 기꺼운 듯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해요.
본론?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그냥 얘기하라구요. 뭔지 알겠으니까.
뭘?
-소꿉놀이 얼마나 가려나 했더니, 이제 현실이 좀 보여요? 나랑 일···.
“아, 배터리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 뒷얘기까지 스피커폰으로 듣고 싶진 않다. 지난번 그 어이없고 정신 나간 제안의 후속판일 게 분명하니까. 그때 분명 확실히 거절했는데. 이 여자의 정신세계는 알 수가 없다.
다시 전화가 올까 봐 아예 전원까지 꺼버렸다.
황당해 하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특히 2팀장.
“너 임마, 전화를······.”
“죄송합니다. 그, 숨이 막혀서요.”
“뭐?”
나는 최대한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채영 씨랑 안 좋게 부딪친 이후로 내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중이거든요.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게, 영혼이 덤프트럭에 치이는 느낌입니다.”
2팀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댁도 나랑 손채영 관계는 알 만큼 알 거 아니야.
“그 정도야? 통화하는 거 보니까 그 정도로 나쁘진 않던데?”
“나쁜 게 맞습니다.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는데요.”
“그래도 대화는 되잖아, 대화는. 너 말이다, 당분간 채영이랑···.”
“지난번 손채영 씨가 제 담당 옮겨달라고 했을 때 대표님께서 제 사정을 봐 주셨으니 망정이지, 그때 옮겼으면 전 회사가 아니라 정신과에 출퇴근하고 있었을걸요.”
백한성 대표를 팔았다. 넵튠이나 3팀장 이름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이게 더 잘 먹히겠지. 대표가 내 의사에 맡기겠다고 얘기한 마당에 2팀장이 무작정 밀어붙이긴 힘들 테니까.
“아, 그랬었지. 대표님이······.”
2팀장이 혀를 차며 나한테서 아쉬운 시선을 뜯어낸다. 제안을 제대로 뒷발로 걷어찼다고 나를 지금보다 더 안 좋게 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낌새는 아니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채영이니까. 2팀 직원들마저도 인간 자연재해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자는 태도던데. 요즘 들어 손채영이 더욱더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다.
2팀장이 혀를 차며 내 팔뚝을 두드렸다.
“그럼 다음에 또 이런 문제 생기면 그때그때만이라도 좀······.”
분명 미팅 시작 전까지만 해도 아쉬운 말을 해야 하는 쪽은 내 쪽이었는데, 입장이 좀 바뀌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다시 타이밍이 온 것 같은데. 벼르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기에 최적의 타이밍.
“알겠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는데요.”
“뭔데.”
“관심 가는 무명배우가 있는데, 프로필 보여드려도 될까요?”
“배우? 누구?”
2팀장에게 남조윤을 간단히 소개했다. 넵튠 애들을 방송 PD들한테 PR했던 때처럼 입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줄줄 나왔다. 2팀장은 남조윤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듯했지만, 내 말에는 줄곧 관심을 기울였다.
“뭐, 네 안목이 소문에 반만 돼도 어처구니없는 걸 들이밀진 않겠지.”
중얼거리던 그가 말했다.
“보내 봐. 프로필.”
이튿날, 남조윤의 번호를 알아내서 프로필을 받았다.
전화로 잠깐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계약에 대해 캐묻지도, 뭔가를 강하게 어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돌아온 건 예의를 갖춘 인사뿐이었다. 좋게 봐줘서 감사하다는.
그의 프로필을 2팀장에게 전달해놓고 나는 나대로 일상에 다시 뛰어들었다. 배신자가 빠진 자리를 수습하는 일부터 실장급 인수인계까지, 정신없이 바빴다.
2팀장한테서 반응이 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웬걸, 프로필을 보낸 지 하루 만에 연락이 왔다. 미팅을 잡자고.
내가 남조윤을 다시 만난 건 미팅을 앞두고 그를 데리러 갔을 때였다.
햇빛 몇 줄기가 흘러드는 좁은 골목. 남조윤은 꼭 자기처럼 버석하게 마르고 금이 간 돌계단을 내려왔다. 첫 만남 때보다는 차림새에 신경 쓴 게 보이는 모습으로.
빗질한 듯한 머리도 그렇고. 빛바랬던 티 대신 입은 얌전한 회색 와이셔츠도 그렇고. 본인 옷이 아닌지, 셔츠는 품이 크고 슬랙스는 짧아서 밑단 아래로 복숭아뼈가 훤히 보이긴 했지만.
“저기······.”
보조석에 올라탄 남조윤이 어렵게 입을 뗐다.
“지난번에도 부탁할까 하다가 참았는데.”
“네, 얘기하세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론 목이 탄다.
계속 신경이 쓰이던 중이었다. 혹시라도 남조윤이 크게 기대를 하고 나왔을까 봐. 순조롭게 미팅까지 잡히긴 했지만, 그래도 전속 계약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실치 않으니까.
하지만 남조윤의 입에서 나온 건 계약 얘기가 아니었다.
“저 시나리오, 가는 동안 잠깐 봐도 괜찮을까요?”
“시나리오요?”
“네. 처음 보는 작품들이라서요.”
그의 관심은 뒷좌석 한편에 놓인 영화 시나리오 뭉치에 쏠려있었다.
“편하게 보세요. 크랭크인 전인 작품들이라 외부유출은 안 되지만, 여기서 보는 건 괜찮으니까.”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남조윤이 시나리오를 손에 쥐었다. 그게 국보급 물건이라도 되는 듯,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다.
메마른 황무지에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변화였다. 그는 생생하게 깨어난 눈으로 시나리오만 쳐다봤다. 회사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미팅이나 전속 계약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시나리오를 놓고 내릴 때의 표정은 얼마나 아쉬워 보이던지. 미팅 약속만 아니었다면 그냥 반나절이고 한나절이고 보고 있으라고 했을 거다.
남조윤을 2팀 직원에게 보내고, 나는 사무실에서 내가 할 일을 마저 했다. 손은 바쁜데 진도는 지지부진하다. 미팅 때문에 영 집중이 안 된다.
입사하자마자 내 담당으로 뚝 떨어진 넵튠과는 달리, 남조윤은 내 손으로 데려왔다는 책임감 때문인가.
어쨌든 초조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2팀장도 그에게서 뭔가를 보길 바라면서.
“희한한데요.”
누군가 등 뒤에서 불쑥 말했다. 여우처럼 찢어진 눈. 그 사람이었다. 임주원 미팅 때 나한테 살갑게 굴었던 성 실장.
“뭐가 희한해요?”
“뭐냐면, 잠깐만요. 내부고발하기엔 장소가 좀.”
웬 내부고발?
사무실 내 직원들을 훑어본 성 실장이 밖을 턱짓했다. 곧장 우리는 으스스한 한기가 살갗을 비벼대는 장소, 비상구 층계참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 실장이 계단을 툭툭 털고 앉으며 말했다.
“저도 남조윤 씨 프로필 봤는데, 그거 원래라면 미팅까지 올 만한 프로필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희한하다는 거죠.”
“미팅까지 올 프로필이 아니라구요?”
미간을 좁히며 묻자,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배우, 전 소속사랑 소송으로 끝났던데요.”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소속사가 문제가 많았던 곳이라서.”
“사정은 별로 안 중요해요. 안 좋게 보인다는 게 중요하지.”
성 실장이 제스처를 하며 설명했다.
“프로필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오거든요. 추천받았거나 캐스팅 매니저들이 골라온 프로필. 그중에서 전속 계약을 할만한 배우를 찾는 건데, 한두 사람 취향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압도적으로 괜찮은 배우가 있으면 모를까, 보통은 회의로 덜 괜찮은 사람을 빼는 작업을 해요.”
“뺀다구요?”
“얘는 평판이 좀 그렇더라, 빼고. 얘는 어디 수술했다더라, 빼고. 다 좋은 배우들이니까 사소한 거 하나만 거슬려도 빠지는 거예요. 전 소속사랑 소송으로 끝났다? 당연히 빠지죠. 그러니까 원래라면 미팅까지 올 프로필이 아니었다는 거고.”
하지만 남조윤은 지금 회의실 안에서 미팅 중인데.
“둘 중 하나예요. 팀장님이 남조윤 씨한테서 특별한 뭔가를 발견했거나. 아니면 달리 원하는 게 있거나. 근데 아무래도 두 번짼 거 같거든요.”
성 실장이 이게 본론이라는 듯,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분명 원하는 게 있을걸요. 정 실장님한테.”
미팅이 끝나고 남조윤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남조윤은 들어갈 때와 똑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 마련해 주셔서.”
“뭘요. 제가 원해서 한 건데.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내 말에 남조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조윤이 계약에 대해 크게 기대하다가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했던 건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저 사람은 W&U와의 계약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기대한 건 나뿐이었다.
남조윤이 몇 걸음 떼다가 나를 돌아봤다.
“다음번 알바비 받으면 제가 밥 살게요. 그리고 혹시 그때, 아까 보다만 시나리오 계속 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조윤은 웃는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2팀장이 나를 빈 회의실로 불렀다. 머릿속이 바쁘다. 성 실장의 귀띔이 사실이라면. 저 양반이 나한테 원할만한 거야, 당장 떠오르는 게 하나뿐이니까.
궁리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2팀장이 들어왔다. 커피 두 잔을 들고.
받긴 받았는데, 원두커피가 오늘따라 사약처럼 보인다.
내가 2팀장이 던질 말을 받아칠 준비를 하며 커피로 입술을 축이고 있을 때,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2팀장이 불쑥 말했다.
“너 말이다, 이제 2팀으로 옮기는 게 어때?”
<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5)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