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03화 (103/218)

<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1) >

저 사람들은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다 들었나?

몇 초 동안 머릿속이 홱홱 돌아갔다. 내가 무슨 말실수한 건 없는지부터, 지금 이 상황이 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까지.

물론 개판으로 보이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녹음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특별히 말실수는 안 한 것 같고, 지금도 멱살 잡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배신자니까.

나한텐 별로 나쁠 거 없겠는데.

동시에 배신자도 상황파악이 끝났는지 재빨리 내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씨발’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좆됐다는 기색이 역력한 저 얼굴을 보고나니 풍랑을 맞은 것처럼 흔들리던 가슴이 차분해진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나 원, 정리가 안 되네.”

나와 배신자를 나란히 앉혀놓고, 3팀장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이 바닥에서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는데, 이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은 또 처음이다. 그럼 지금까지 둘 다 속으론 딴생각하면서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고, 얘기하고······ 요즘 어린애들하고 무서워서 일 하겠냐? 이것 좀 봐라, 어? 얘 넋 빠진 것 좀 봐.”

그가 옆을 턱짓했다. 박 팀장은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준 상태라, 옆자리에는 김현조밖에 없다. 김현조는 아까부터 줄곧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이게 현실인가?’ 하는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3팀장이 배신자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반년 동안 감쪽같이, 아주 계획적으로 우릴 속인 거란 말이지? 아까 나한테 했던 말도 다 거짓말이고?”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볼 셈인지, 배신자가 입술을 핥고 대답했다.

“속인 게 아니라, 저는 다만 사회생활을 잘 해보려고 노력···.”

“다 들었으니까 그만해, 임마. 소름 끼친다.”

3팀장이 배신자의 말을 뚝 잘랐다. 아까부터 헛웃음을 짓고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눈빛이 냉랭하다. 늘 유쾌한 사람이라 직장 상사라기보다는 편안한 옆집 형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편안한 분위기가 아니다.

3팀장이 이번엔 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너는, 그동안 혼자서 이놈 관찰하고 있었던 거고?”

“그게, 저도 백 프로 확신한 게 아니라 무작정 말씀드리기가 좀.”

“얌마, 사이먼 리한테 뭘 들었다며? 그때라도 얘기했어야지!”

“아. 그건 거짓말인데요.”

배신자가 홱, 날 돌아봤다.

3팀장도, 넋 빼고 있던 김현조도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배신자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그냥 혹시나 싶어서 떠본 건데, 이 자식이 걸린 거예요.”

“이, 씨발 새끼가 진짜···!”

왈칵, 핏대를 올리던 배신자가 주춤했다. 열 받아서 눈알이 벌건데, 그 와중에도 3팀장과 김현조 눈치는 보이는지 꾸역꾸역 눌러 참는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의자가 날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3팀장이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깨뜨렸다.

“안 되겠다. 선우 너는 일단 나가서, 아니, 너 오늘은 퇴근해라.”

“네?”

“너희 둘 붙여놓고 어디 얘기 하겠냐. 따로 연락할 테니까 그냥 집에서 머리나 식히고 있어. 그동안 이놈 이거 정리 좀 하게. 대체 사이먼 리랑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그것부터 시작해서.”

3팀장이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김현조도 고개를 끄덕인다.

힐끔 배신자를 보니, 이젠 가식을 떨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뚝뚝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떤 이야기가 더 오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다시 출근했을 때 배신자의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는 것. 앞으로는 이 회사에서 저놈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것 말이다.

이튿날 아침.

휴일 같지 않은 휴일을 보내던 중, 마침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퇴사 처리됐다. 앞으론 그놈의 자식, 볼일 없을 거야.

핸드폰 너머로 김현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렸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뭐, 동화 속 해피엔딩만큼이나 당연한 결말이지. 3팀장과 김현조도 작곡가한테 협박까지 한 놈을 회사에 계속 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

“실장님, 사이먼 리는 어떻게 됐어요?”

-망할 놈, 끝까지 입 다물더라. 영훈이 형이 어젯밤에 직접 사이먼 리 만나서 얘기해봤는데, 그쪽도 똑같대. 대체 건영이 그놈한테 무슨 약점을 잡힌 건지 이상한 거래 같은 건 없었다고 딱 잡아뗐다더라고.

음울한 목소리. 어찌나 기운이 없는지 듣고 있기 딱할 정도다.

하긴, 이번 일로 가장 충격받은 사람이니까.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후배한테, 그것도 착하다고 철석같이 믿던 후배한테 뒤통수를 풀스윙으로 얻어맞았으니. 인생에 회의가 안 들면 다행이다.

-그놈이 너한테 연락 안 하든?

“저도 연락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잠잠하네요.”

그놈의 살기등등하던 눈빛을 생각하면 연락이 아니라 칼을 들고 찾아와도 놀랍지 않다. 그래서 나도 듬직한 야구방망이를 하나 장만했지. 웬만하면 휘두를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만.

나는 9시를 막 넘긴 시계를 보며 물었다.

“저는 언제부터 다시 출근할까요? 새벽부터 애들 스케줄 있는데.”

-그건 내가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애들한테 건영이 그놈 얘기도 해야 하니까. 다들 믿기나 할지 모르겠다. 직접 보고 들은 나도 아직 어안이 벙벙한데.

애들이 알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혀를 차며 반응을 상상하는데, 김현조가 계속 말했다.

-너 이따 저녁에 2팀이랑 같이 임주원 만난다며. 2팀장님이 계속 너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이참에 그쪽 일 도와주고 빚이나 지워놔. 출근은 내일부터 하고.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주원과의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다. 여유시간이 생긴 셈이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금쪽같은 시간을 원룸에 처박혀서 보낼 수야 있나. 배신자가 잘려나갔다는 희소식도 들었겠다, 영화라도 감상하면서 오늘을 기념해야지.

영화관 어플을 켜보니 새로 개봉한 영화가 수두룩하다. 점심 거르고 좀 빠듯하게 움직이면 세 편은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영화를 먼저 볼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행복해졌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나는 미니밴을 끌고 달리고 있다. 영화관이 아니라, 경기도 파주로.

보조석에는 웬수 하나를 태우고.

“야, 사회라는 데가 무섭긴 무섭네. 정선우가 얻어터지고 다니고.”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웬수들 가운데, 그나마 제일 사람에 가까운 놈. 김태웅이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입가를 손으로 쓸어보자 살짝 찢어진 곳이 아직 따끔하다.

“얻어터지긴 누가 얻어터져. 한 대씩 치고받은 거지.”

“지금 너 표정 겁나 살벌하거든요. 왜, 고소는 안 했냐?”

“진단서는 떼놨다. 이것도 다친 거라고 전치 2주는 떼주더라.”

“진짜? 너 진짜로 고소하려고?”

“아니, 그 자식이 먼저 고소할까 봐 대비용으로.”

김태웅이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멈칫, 다시 날 바라보며 묻는다.

“잠깐, 근데 선글라스는 왜 쓰고 왔냐. 너 혹시 눈탱이도······.”

“아니거든. 선글라스 안 쓰면 사람들이 알아봐.”

연예인이 아니니까 사진이나 사인 따위를 바라고 다가오는 사람은 없지만, 멀리서 수군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 쓰인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로 밖을 돌아다닐 땐 선글라스를 쓰는 게 버릇이 됐다.

“맞다, 너 이제 유명인이지. 저녁 뉴스에 나온 유명인.”

덩치 산만한 놈이 소녀팬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깜빡거린다. 젠장, 뒷목에 소름이 쭉 올라왔다. 내가 욕을 하든 말든 한참을 유명인, 유명인, 하고 노래를 부르던 놈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돌아보니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야, 근데 너 진짜 무리하는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몇 번을 묻냐.”

내 말에 김태웅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사실 난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 안 했단 말이야. 근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놈이 오케이하고 바로 나오니까 당황했잖냐. 뭐 중요한 일 있는데 캔슬하고 온 건 아니지?”

“영화 캔슬하고 왔다. 피눈물을 흘렸다는 것만 알아둬라.”

내 말에 김태웅이 과장스럽게 입을 막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화를 포기하고 온 거냐? 삼시세끼 밥보다 영화를 더 챙기던 놈이? 날 위해서?”

“내가 총 맞았냐. 너희 어머니 부탁이라 온 거지.”

“매정한 놈. 사랑이 식었구만.”

“헛소리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나 자세히 얘기해봐.”

실실거리며 농담을 던지던 김태웅이 한숨과 함께 본론을 꺼냈다.

“그게 말이다. 우리 둘째 이모한테 덜떨어진 막내딸이 하나 있는데, 걔가 연예인 지망생이거든. 이모도 말리다가 포기하고 저러다 안되면 말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걔가 무슨 듣도보도 못한 회사랑 계약한다는 거야. 그거 땜에 난리가 나서 이모가 엄마한테 매달리고, 엄마가 나한테 부탁하고, 결국 내가 너한테까지 연락한 거지.”

김태웅이 또다시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회사가 진짜 제대로 된 데가 맞나만 좀 들어봐 주라. 그리고 넌 일하면서 연예인 많이 봤을 거 아니냐. 걔 지금 독립영화 촬영 중이라니까, 딱 보고 쟨 안 되겠다 싶으면 나한테 말 좀 해줘.”

“일단 알았으니까 눈치 좀 그만 봐, 임마. 징그러워 죽겠다.”

“미안해서 그러지, 새꺄. 너 이런 부탁 많이 받을 거 아니야.”

부탁이라. 몇몇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놈의 말대로, TV에 얼굴이 나가고 난 뒤로 연락을 몇 번이나 받았다. 내용은 비슷비슷하다. 내 딸이, 동생이, 조카가, 그 밖의 누구누구가 연예인 지망생인데 엄청나게 괜찮은 애니까 한번 보라고.

국내 연예인 지망생이 백만 명이라더니. 내 주변에도 흘러넘쳤다.

내 얘기를 들은 김태웅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야, 그런데 네가 봐서 괜찮으면, 그럼 바로 연예인 되는 거냐?”

“그럴 리가 있냐. 몇 년짜리 계약서가 왔다 갔다 하는 문젠데. 원래 신인발굴은 캐스팅 매니저라고,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어. 거기서 프로필 몇 개 가져오면 위에서 또 회의를 얼마나 하는데.”

그렇게 신중하게 영입해도 성공하는 경우보단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W&U처럼 큰 회사의 푸쉬를 받아도 마찬가지다. 무명에서 누구나 알아보는 스타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바늘구멍보다 좁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길이 비포장도로로 변했다.

독립영화 촬영 장소를 찾아 한참을 덜컹거리며 들어갔을 때였다. 저 앞쪽에 우르르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자 둘, 남자 셋이다. 머리가 긴 여자 둘이 우리 쪽을 보고 손을 휘젓고 있다.

“저거 혹시 히치하이킹이냐? 이런 데서?”

“인사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더니 여자 둘이 지친 얼굴로 다가왔다. 어디서부터 걸어온 건지, 선선한 봄 날씬데도 불구하고 이마와 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하다.

“저기요. 이거 혹시 스텝 차량이에요? 저희 오후 씬 촬영하러 온 배우들인데, 맞으면 좀 태워주세요!”

배우라는 말에 옆에서 김태웅이 목을 쭉 뺀다. 나도 서 있는 사람들 면면을 자세히 봤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서. 예전에 여유 있을 때는 독립영화도 제법 챙겨봤었으니까.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은 없었다.

“스텝은 아닌데, 촬영장 가는 건 맞습니다. 타세요.”

“감사합니다! 연기하기도 전에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배우들이 감사인사를 퍼부으며 올라탔다. 금방 뒤쪽에서 자그맣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촬영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태우러 온다더니 대체 왜 안 와?”

“또 이성현 데리러 갔나 보지, 뭐.”

“걔만 배우고 우린 뭐, 배경이냐? 감독님 너무한 거 아니야?”

“감독님이라고 별수 있어? 이성현이 상업영화에 올인하겠다고 빠져버리면 당장 주연 바꿔서 새로 찍어야 하는데.”

다시 출발하려고 핸들을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백미러로 향한다. 무명배우의 설움을 토로하는 예쁘장한 여배우들이 아니라, 제일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밟혔다.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데도.

내가 저 남자를 어디서 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거울 너머로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떠올랐다. 저 사람을 어디서 봤는지.

< 매니저와 연예인에게 중요한 것, 궁합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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