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92화 (92/218)

< 지금부터 우리는 (1) >

아침 7시의 하늘은 음침했다.

새벽부터 마른천둥이 쳐서 잠을 설치게 하더니, 지금은 연기 같은 먹구름이 꾸물꾸물 몰려든다. 먹구름은 동녘의 불그스름한 태양을 먹어치우고 하늘을 온통 회색으로 덮어버렸다.

날씨 한번 죽이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녹화 오늘이랬지? 준비는 좀 했어?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 나간다.

“준비고 뭐고 개뿔 아무것도 없어. 아무래도 제작진이 미친 거 같아. 1시간 뒤부터 녹환데 아직 뭐 하는지도 몰라. 아무리 리얼 버라이어티래도 그렇지, 이건 뭐 맨몸으로 전쟁 나가는 느낌이야.”

물론 굵직한 틀은 제작진이 다 준비해놨을 테니 맨땅에 헤딩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전에 언질은 줄줄 알았다. 넵튠도 예능 새내기고, 나는 아예 일반인이니까.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

-너 그거 나간다니까 애들 들고뛰고 난리 났다. 토요일마다 꼬박꼬박 챙겨보는 프로잖아. 이제 방송 날을 소풍날보다 더 기다리게 생겼어. (삼촌! 나도 바꿔줘, 아빠! 나도! 내가 먼저 말했어!) 들리지?

형한테 다닥다닥 붙어서 핸드폰을 노리고 있는 네쌍둥이 모습이 눈앞에 훤하다. 아침부터 기운들도 좋지. 피가 튀는 전투 끝에 핸드폰을 차지한 겨울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삼촌! 삼촌 연예인 하는 거야? 이제 계속 TV에 나와?

“아니.”

-그럼 삼촌 방송에 많이 나와? 저번처럼 계속 나와? 우리 방송하는 날 친구들 불러서 같이 볼 건데! 엄마가 치킨이랑 피자 시켜준다고 그랬어!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마을회관 나가서 보신다고······!

맙소사.

지난번처럼 수치사 할 것 같은 일은 무조건, 무조건 피해야겠다.

“오빠! 저희 출동 준비 다 끝났어요!”

뒤에서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임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크업 수정을 끝낸 애들이 승합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운전석에 올라타며 쌍둥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삼촌 이제 일하러 간다.”

-멋있다! 삼촌 힘내! 게임 같은 거 하면 꼭 이겨!

“쌍둥이들이에요?”

겨울이의 영혼을 담은 외침이 들렸는지, 뒷좌석에서 이송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1초 후에 귀청이 찢어질 뻔했다. 재빨리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리자 애들 목소리가 승합차 안에 메아리친다.

-삼촌, 누구야? 누군데? (왜, 왜! 뭔데! 뭐야!) 누가 쌍둥이들이에요? 그랬어! 여자 목소리! (넵튠인가 봐! 좋겠다! 나도! 나도 목소리 듣고 싶어) 삼촌, 우리가 학교에서 신곡 엄청 홍보했다고 꼭 전해줘!

야단법석이다. 뒤에서 애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송하가 유난히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빠. 얘기해봐도 돼요?”

“응? 그래, 자. 고막 조심하고.”

핸드폰을 넘겨줬더니 모두 먹이를 발견한 비둘기들처럼 핸드폰에 몰려들어서 한마디씩 건넨다. 녹화를 앞두고 기분전환이라도 될까 싶어서 내버려뒀다. 얼마 전에 사이먼 리랑 출연한 떼 토크에서 왕창 편집된 일로 다들 예능 울렁증이 도진 것 같아서.

한 바퀴 빙 돌아온 전화를 끊었을 때는 거의 5분이 지나있었다.

“오빠랑 닮았어요?”

이송하가 운전석 등받이에 착 붙어서 물었다.

“글쎄. 성격은 확실히 안 닮았고, 생긴 건 조금? 넷 중에 둘이 나 초등학교 때랑 비슷하긴 해.”

“궁금하다. 오빠 미니어처.”

이송하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촬영 세팅이 끝났으니 주차장으로 들어오라는 내용이다. 시동을 걸며 말했다.

“차 문 열리고 등장하는 모습 찍을 건데, 카메라가 처음 내리는 사람 다리부터 틸업으로 올라올 거래. 누가 먼저 내릴래?”

“그럼 다리가 제일 예쁜 사람이 먼저 내려야죠!”

“임서영 빼고 가위바위보 하면 되겠네.”

“난 뭐! 난 왜! 나도 괜찮거든!”

결국은 이송하가 제일 먼저 내리는 걸로 결론 났다.

PBS 방송국 후문 주차장으로 들어가 보니 묵직한 카메라를 잡은 촬영감독과 조명 스텝들, 그리고 6mm 카메라를 어깨에 얹은 VJ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장씬을 찍고 나자 카메라가 바짝 다가온다. 국방색 야상을 걸친 VJ가 앞에서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바로 6층 예능국으로 올라갈게요. 기존 멤버들은 이미 도착해서 게스트 기다리는 중이에요.”

출근 시간 전이라 방송국 내부가 황량하다. 간간이 보이는 직원들은 밤샘했는지 퀭한 몰골이라 카메라를 보자마자 숨느라 바쁘다. 창틈으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까지 들어오니, 방송국이 아니라 좀비 소굴에 침입한 기분이었다.

텅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갔다. 벽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던 임서영이 별안간 내 어깨를 두드린다.

“오빠, 있잖아요.”

“뭐가 있어.”

“왜 오빠랑 같이 녹화한다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안 될까요? 다른 거 녹화할 때는 분명 내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와라! 싶은 느낌? 행운을 업고 온 것 같다고나 할까. 그치?”

애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음. 어째 좀 어깨가 무겁다.

VJ를 따라 도착한 곳은 대회의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시에 죽는다. 띄엄띄엄 앉아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목을 길게 빼고 이쪽을 쳐다본다.

올해로 5년째, 토요일 저녁 시간에 ‘지금부터 우리는’, 줄여서 ‘지금우리’라고들 부르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진행하는 베테랑 방송인들이다. 애들과 함께 인사하자마자 다섯 남자가 솟구치듯 일어났다.

“어, 넵튠! 알지, 알지, 들어와요! 뭐하냐, 상석 비워!”

“게스트 걸그룹이야? 아 쫌! 이런 거 할거면 미리 얘기 좀 해!”

“얘기하면 뭐, 샵 들렀다 오려고? 오징어 씻어봤자 물오징어야.”

“아싸, 난 샵 갔다 왔는데. 어쩐지 오늘은 가고 싶더라.”

게스트로 누가 오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다들 놀라고 좋아하는 모습이 기막히게 자연스럽다. 물론 그 모습은 대회의실 구석구석 배치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는 중이다.

넵튠 애들이 쏟아지는 질문과 관심에 대응하는 동안, 난 군부대에 위문 공연온 남자 발라드 가수처럼 서 있었다. 분위기가 한풀 꺾이고 나서야 그들 중 한 명이 나한테 아는 척을 했다.

“설 특집에 나왔던 매니저 맞죠?”

“네. 정선웁니다.”

프로필이 떠오른다. 황재현. 가수 출신이고, 동네북 큰형 캐릭터.

“태평이 형이랑 케이블방송 같이하는데, 설 특집 시청률 1위 했다고 엄청 자랑하더라고. 그래서 방송 봤는데 재밌던데요. 오늘 잘 부탁해요. 요즘 우리 시청률 계속 하락세라 게스트 빨좀 받아야 돼.”

“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오늘 대체 뭐하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물었더니 황재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냥 날짜랑 시간, 장소만 받았는데요. 뭐 준비하라는 얘기도 없어서 그냥 몸만 왔어요.”

“몸만 오면 되지, 뭐. 우리 몸 굴리는 방송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오기 전에 사전 조사 겸 지난 회차를 몰아봤는데, 기획의도는 멤버들이 매주 새로운 걸 시도하고 보여주는 방송이라고 돼 있지만, 결과적으로 매회 컨셉이 달라지고 매회 뛰어다니더라.

“우리도 아는 거 별로 없어요. 뭔가 리얼한 리액션이 필요한 기획인가 본데? 그런 건 알고 하면 짜고 치는 거 티 나니까 일부러 말 안 해주기도 하거든.”

리얼한 리액션이라.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그래도 걱정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녹화 들어가면 연출진이 달라붙어서 디렉팅하니까. 설마 못할 거 시키기야 하겠어?”

황재현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참, 오늘 신곡 홍보차 나온 거죠? 앨범 챙겨왔으면 하나 줘요. 이따 이동할 때 차 안에서 틀게.”

물론 챙겨왔다. 박스로.

잠시 후 건네주기로 하고 넵튠 애들을 곁눈질했다. 지금우리 멤버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데, 흐르는 공기가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임서영이 재잘재잘 떠들면서 경쾌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연출진으로 보이는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게스트 모실게요!”

게스트가 또 있구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뭐야, 오늘 게스트 또 있어요? 혹시 다른 걸그룹이야?”

“이번엔 배우들이에요. 두 명.”

“여배우면 나 오늘 퇴근 안 해! 오랜만에 무박 2일 찍자!”

“찬성! 그깟 퇴근 반납한다!”

저 사람들 리액션이 나보다 더 리얼하다.

곧 문이 다시 열리고 여자가 언급했던 배우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배우는 배우다.

막 뽑은 쌀떡처럼 따끈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뺨, 박아놓은 것처럼 커다란 눈에 장밋빛 입술. 그리고 종종거리는 짧은 팔다리를 가진 아역배우.

여자애랑 혼혈인 남자애 한 쌍인데 우리 집 네쌍둥이들보다도 어리다. 그래도 이쪽 경력은 꽤 될 거다. 미니시리즈나 일일드라마는 물론 영화에서도 얼굴을 많이 본 애들이니까.

“오빠, 저 촉이 확 오는데요.”

옆에서 임서영이 속닥거렸다.

“혹시 저 아역들 돌보라고 오빠 섭외한 거 아닐까요?”

나도 살짝 의심스럽긴 하다. 스타 매니저 때문에 네쌍둥이 삼촌이라는 게 캐릭터처럼 붙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애티가 풀풀 나는 네쌍둥이들이랑은 달리 저 둘은 느낌이 확 다르다. 뭐랄까,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만큼 어리게 느껴지지 않는달까.

여자애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애교를 떨고 있지만, 일부러 귀여움받을만한 행동과 표정을 하는 게 너무 훤히 보인다. 혼혈인 남자애는 만사가 다 귀찮은 듯한 애늙은이 표정이고.

돌아가며 인사를 한 아역배우 두 명이 내 차례에 와서는 주먹만 한 머리통을 갸웃거린다. 내가 출연자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눈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이제 게스트까지 전원이 모였으니까 본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게스트를 소개했던 여자가 박수치며 시작을 알렸다. 말소리들이 잦아들고 시선이 모이자, 여자가 큐카드 한 장을 꺼낸다.

“왜 아침부터 여기로 모셨는지 궁금하실 텐데, 오늘은 독방에서 개인면담을 먼저 진행할 거예요. 호명하는 순서대로 옆에 있는 독방으로 들어가 주시면 됩니다!”

“뭐야, 뭔데? 이상한 미션 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또?”

“게스트 불러놓고 이상한 것 좀 시키지 마!”

여자는 눈도 깜빡 안 한 채로 제일 먼저 황재현을 호명했다. 그가 찜찜한 얼굴로 사라지고, 곧이어 두 명이 더 대회의실을 떠났다. 개인면담 뒤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지 되돌아온 사람은 없다.

“정선우 씨!”

이름이 불리자마자 일어났다. 우리 쪽에선 처음이라, 넵튠 애들이 먼 길 떠나는 사람 배웅하듯 손을 흔든다.

“오빠! 우리 무사히 살아서 다시 만나요!”

“혹시 독방에서 무슨 일 있으면 비명 질러요.”

“내가 무슨 인당수 끌려가는 심청이냐.”

피식 웃으며 여자 뒤를 따라갔다.

안내된 독방은 어째 분위기가 심상찮다.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조명은 으스스한 보라색이다. 드라이아이스도 좀 깔아줘야 할 분위기다.

안쪽에는 카메라 두 대와 피디, 작가가 나란히 앉아있다.

피디는 지난 회차를 돌려보면서 얼굴을 익힌 메인 피디 배정환이고,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단발머리 작가는 나한테 문자를 보냈던 세컨 작가 송유진이다.

검은 천이 덮여있는 테이블 앞에 앉자, 송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화면보다 실물이 좀 더, 인상이 강하시네요.”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했더니 송 작가가 바로 말을 이었다.

“요즘 저희 방송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평이 많아서 게스트로 신선한 피를 수혈하는 중인데, 스타 매니저 기획한 박 작가님이 선우 씨랑 넵튠을 추천하시더라구요.”

“아, 그분이요.”

“그 프로만큼 재미 뽑자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진짜 그만큼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매번 그렇게 뽑으면 매니저가 아니라 방송을 하셔야죠. 그냥 넵튠 멤버들이랑 같이 자연스럽게 해 주시면 돼요.”

“네, 그런데······ 자연스럽게 뭘 하면 됩니까?”

이렇게 따로따로 부르는 거 보면 누군가의 말대로 미션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몰카 컨셉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이왕 출연하는 거 내가 잘할 수 있을 만한 거면 좋을 텐데. 분량도 챙기고, 원래 목표대로 신곡 홍보도 할 수 있게.

“그럼 먼저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배 피디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세상에는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힘이요?”

“초능력이라고 하죠.”

하마터면 카메라 앞에서 괴상한 표정을 지을 뻔했다.

배 피디가 테이블 위를 덮고 있는 검은 천을 홱 젖혔다. 큼직한 글자가 찍힌 카드 몇 장이 드러난다.

“자, 하나 고르세요.”

배 피디가 카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 장이었지만 내 눈에는 단 한 장만 들어왔다.

‘미래 예지자’라고 쓰인 카드, 한 장만.

< 지금부터 우리는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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