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91화 (91/218)

< 행운의 상징 (3) >

예능 녹화는 언제쯤 잡히려나. 컨셉은 또 뭘까.

지난번 스타 매니저는 운이 엄청 좋았던 거니까, 이번에도 그 정도를 바라는 건 과욕이겠지. BGM이나 15초로 끊은 뮤직비디오를 노출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프로그램 안에서 자연스럽게 노출할 방법이 있으면······.

“오케이, 컷!”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촬영감독이 흡족한 얼굴로 외쳤다.

나는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털어냈다. 며칠째 틈만 나면 같은 생각을 하고 또 반복하는 통에, 머리통이 목 위에 얹고 다니기 벅찰 만큼 무겁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수십 명의 스텝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환호했다. 지면용, TV용, 그리고 마케팅용 비하인드 촬영까지 하느라 온종일 바빴던 넵튠 애들도 잔디밭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시간을 확인하는데, 촬영감독이 작은 눈을 빛내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배경이 좋아서 멤버들이 묻힐까 봐 걱정했는데, 이건 뭐 손댈 데도 없겠어요. 넵튠은 멤버 전원이 비주얼라인이라더니 카메라만 대면 그림이라 버릴 게 없어요.”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잘 찍어주셔서 그렇죠.”

“신곡 컨셉도 참 좋던데. 노래도 좋고, 반응도 좋고. 축하해요. 요새 광고판에서도 넵튠 이름이 제법 들리던데. 고생 많이 한 그룹으로 아는데 이제 빛 보겠네요.”

요즘 어딜 가나 듣는 소리다.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신경 쓰며 감사와 겸양의 멘트로 받아쳤다. 이대로 대화가 끝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감독이 넵튠 애들을 곁눈질하며 말을 더한다.

“촬영도 만족스럽게 끝났겠다, 우리끼리 친목 도모 겸 뒤풀이 어때요? 저기 업체 쪽 양반들도 같이. 멤버들 술 좀 마셔요? 원래 그런 자리에서 3개월 단발 광고가 6개월이 되고, 1년이 되고 한다고.”

이것도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소리고. 걸그룹 애들을 그런 자리에 밀어 넣는 회사가 있긴 한 모양이지만, 우리 방침은 철벽이다.

“아, 내일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오늘은 좀 힘들겠는데요.”

다음 기회를 잡아보자고 공수표를 날리고는 감독한테서 멀어졌다. 같이 기대하고 있었는지 광고 업체 쪽 직원들도 입맛을 다시고 있다. 이 바닥에는 딸뻘인 걸그룹 애들을 옆에 끼고 놀아보려는, 나잇값 못하는 양반들이 참 많다.

“저어기, 오빠.”

애들한테 다가갔더니, 임서영이 쭈뼛쭈뼛 날 부른다.

“왜?”

“저희 바로 스케줄 없죠?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그 말 하는데 뭘 그렇게 망설여? 광고촬영이라 언제 끝날지 몰라서 스케줄은 통으로 빼놨으니까 괜찮은데, 숙소로 가서 잠 좀 자는 게 낫지 않겠어?”

내일 스케줄도 빡빡한데. 나야 배신자와 바톤터치하고 한숨 돌리겠지만, 얘들은 잠이 부족하건 말건 높은 하이힐을 신고 최고의 컨디션인 것처럼 무대 위를 뛰어다녀야 한다.

“잠도 좋긴 한데, 오늘 아니면 또 이런 데 못 오잖아요.”

임서영이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촬영현장을 바라본다.

햇볕을 받아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잔디밭. 흐드러진 벚꽃나무와 벚꽃잎이 소복하게 쌓인 고즈넉한 연못. 광고촬영을 위해 로케이션 매니저가 고르고 골랐다는 정원은 동화책 삽화처럼 아름답다.

광합성 하는 식물처럼 누워있던 이태희가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잠깐 릴렉스하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벚꽃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오랜만이고.”

“오빠도 잠깐 쉬세요. 요즘 계속 피곤하신 것 같아요.”

이송하까지 한마디 거든다. 엘제이는 별말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지만, 이미 몸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잔디밭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자, 그럼.”

광고팀 측에 양해를 구하고 잠깐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애들이 잔디밭에 엎드려 쉬는 동안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알아서 음원 사이트 어플을 누른다.

아까 봤을 때와 변동 없는 음원 순위를 확인하고 혀를 찼을 때.

눈앞에 그림자가 내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엘제이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로 날 쳐다보고 있다.

취미 삼아 운동을 하는 애답게 어지간한 스케줄은 거뜬히 해치우는데 오늘은 좀 평소와 다르다. 갑갑해 보인달까, 아니, 갈증이 난 것처럼 보인달까.

광고상품인 탄산수가 주위에 널려있어서 하나 건네려는 찰나.

“오빠 때문에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중이에요.”

뚝 떨어진 탄산수가 바닥을 굴러간다.

“나 때문에, 뭐?”

“그, 웃어봐요, 좀. 다 대표님보다 오빠 눈치를 더 보고 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매만지다가 눈을 껌뻑였다.

“나를? 왜?”

엘제이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버릇처럼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벤치 등받이 위에 걸치더니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한테 실망한 것처럼 보이니까.”

“······뭐?”

“실망했잖아요. 우리 음원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서. 앨범 줄줄이 말아먹고 눈칫밥으로 산 세월이 얼만데 그걸 모르겠어요?”

말이 혓바닥 위에서만 맴돌았다.

“태희 언니야 자기 자작곡이 타이틀이니까 쉽게 얘기 못 꺼내는 것 같고, 이송하 쟤는 땅이나 파고 있고. 임서영 저건 오빠가 음원차트 확인할 때마다 비 맞은 쥐새끼처럼 찌그러지고.”

꼬아 올린 다리를 흔들거리며 엘제이가 쯧, 혀를 찼다.

“그래서 괴롭히는 재미도 없어요. 제일 큰 활력소였는데. 요즘 욕구불만이 해소가 안된다구요, 해소가. 이러다 사고 칠지도 몰라요.”

농담처럼 끝내긴 했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시선을 돌려 다른 애들을 바라봤다. 이태희와 이송하가 나른하게 누워서 이야기 중이고, 임서영은 벚꽃잎을 모아다가 애들 위에 뿌리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최근에 애들이 내 앞에서 경직돼 있었던 것 같다. 내 행동을 신경 쓰고 있는 줄 몰랐는데.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아니, 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평소와 같다고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미안. 나한테는 정말 좋은 곡인데 순위가 낮은 게 아쉬워서, 내가 욕심이 나서 그런 거야. 너희한테 실망한 게 아니라. 다른 애들이 내 눈치 보는 줄 몰랐어. 고맙다, 알려줘서.”

“눈치는 나도 봐요. 내가 원래 남 눈치 보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시큰둥하게 말한 엘제이가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애들 틈으로 들어가 임서영의 머리를 잡아당긴다. 임서영이 쟁알거리다가 힐끔 내 쪽을 쳐다본다. 언제부턴가 이태희도, 이송하도 날 보고 있다.

반사적으로 웃었다.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고민이 흩어진다.

마음이 좀 조급했다. 내가 현재를 바꾸는 건 더 좋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선데, 현재를 바꾼 탓에 오히려 안 좋아진 상황이 생기니까 무조건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미래에 몰두하느라 현재를 못 봤나 보다.

애들은 정말 많이 노력했고, 지금 성적도 충분히 기뻐하고 뿌듯할 만큼 성공한 성적인데. 내가 산통을 다 깰 뻔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애들 쪽으로 다가가 잔디밭에 앉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싶을 만큼 선명한 시선들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기지개를 쭉 켜고 잔디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같이 벚꽃 구경이나 실컷 하고 가자. 여의도 벚꽃길엔 사람들 많아서 다 같이 못 갈 테니까. 너희 알아보고 사람들 벌떼처럼 몰리면 어떡하냐. 앨범 대박 난 건 좋은데 그런 건 좀 아쉽네.”

내 말에 주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곧 이송하가 데굴 굴러서 내 쪽으로 좀 더 다가온다. 그리고 임서영이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말했다.

“있잖아요, 오빠. 엄마랑 통화했는데 어제 외출했다가 가게에서 우리 노래 나오는 거 두 번이나 들었대요.”

“진짜? 나도 좀 싸돌아다녀봐야겠다. 아, 시간이 없지, 참.”

“그리고 우리 팬 페이지 회원 수도 엄청 늘었어요. 거기 채팅하는 날 몰래 들어가 보면 팬들이······.”

임서영의 목소리에 점점 생기가 실린다. 곧 다른 목소리, 그리고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우리는 거의 한 시간을 잔디밭에 드러누운 채로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다. 내가 첫 앨범이라 욕심을 많이 부린 것 같다는 얘길 한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좀 더 떠들썩해졌다.

느긋하게 누워서 흔들리는 벚꽃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여유 있게 가자.

미래 때문에 너무 조급해하고, 전전긍긍하진 말자고.

그런데 그건 그거고.

예능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운이 좋다면 스타 매니저 때처럼 대중들의 좋은 반응을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슈가캣이 이고 다니고 있는 저 콧대도 확 꺾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오랜만이네.”

슈가캣 멤버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다. 하나같이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들이다. 힐끔 임서영을 살펴보니 영혼 없는 얼굴로 마주 인사하고 있다.

오늘 음악방송 스케줄에 슈가캣 컴백무대가 있다길래 이런 상황을 예상하긴 했다. 했지만, 알고 봐도 입맛이 뚝 떨어진다.

슈가캣 한샛별이 송충이 털 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웃었다.

“너 사이먼 리 선생님이랑 예능 나간 거 봤어. 진짜 열심히 하던데, 너무 편집돼서 아깝더라. 혹시 또 예능 나가는 거 있어? 우리도 모니터링해줄게.”

모니터링 같은 소리 하고 앉았다.

임서영 속을 더 긁기 전에 내보내려고 일어나는데, 별안간 먼저 일어난 엘제이가 살짝 열려있는 대기실 문을 닫는다. 그리고 슈가캣을 보며 대뜸 묻는다.

“음방엔 뭐하러 왔어?”

“뭐하러 오긴, 우리 컴백무대 하는 거 몰라?”

“앨범 나왔나 봐?”

다닥다닥 붙은 슈가캣 멤버들이 울컥한 표정을 짓는다.

“음원차트 안 보고 사니? 우리 노래가 너희 위에 있거든?”

“아, 그거. BYG 노래에 피처링 한 거?”

누가 들어도 비웃는 말투에 한샛별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나는 슬쩍 대기실 안을 둘러봤다. 카메라 없으면 됐지, 뭐. 문 닫았으니 시끌벅적한 밖에 들릴 일도 없고.

임서영만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 이태희와 이송하도 말릴 생각 따윈 없어 보인다.

“너 한글 못 읽어? 우리 노래에 BYG가 피처링한 거야!”

“그래? 난 4분짜리 노래에 BYG 파트가 반이 넘길래 반댄 줄 알았지. 밖에 BYG 팬들 우르르 온 거 보면 무대도 같이 서나 본데, 누가 보면 너희는 백댄서인 줄 알겠다? 슈가캣이라고 화면에 네임 수퍼 크게 박아달라고 해.”

“야!”

한샛별이 빽 고함쳤다. 다른 멤버가 애써 코웃음을 친다.

“부러우면 비아냥거리지 말고 너희도 블랙아웃한테 피처링 해달라고 하든지. 뭐가 어떻든 우린 음방 1위 할 거야.”

“그러든가. 할 말 끝났으면 가.”

엘제이가 턱짓한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너희 백댄서처럼 보이는지 아닌지 내가 생방 때 모니터링해줄게.”

슈가캣은 잠깐 더 캥캥거리다가 쫓겨나듯 나갔다. 나는 늘 임서영과 티격태격하는 엘제이를 보고 고양이를 연상했었는데, 오늘은 고양잇과 맹수를 본 것 같다.

엘제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임서영을 보고 눈썹을 올린다.

“왜? 뭐?”

“······아냐.”

임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엘제이가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대형가수나 컴백 했으면 좋겠네. 쟤들 1위 못하게.”

*

젓가락이 시뻘건 육회를 집었다.

최건영은 육회를 몇 점 맛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연락은 없대?”

“명함은 줬는데 연락 없다더라. 어차피 끝난 얘기지.”

맞은편의 남자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정선우가 있으면 손채영이랑 계약하는 데 좀 도움될 거라길래 제시한 조건인데, 보아하니 손채영은 W&U에서 쉽게 못 나오겠더만. 백대표 그 사람이 무섭긴 무서운가 봐.”

“연락도 없었단 말이지.”

최건영의 쭉 뻗은 눈썹이 설핏 찌푸려진다.

“연락했으면 이직 생각하는 것 같다고 소문이나 내려고 했더니.”

“그런데 그 친구도 참 대단하네. 네 옆에서 거의 반년을 멀쩡히 일하는 거 보면.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지. 스포트라이트는 오히려 그 친구가 다 받는다면서?”

“그래도 이번엔 내가 이겼어. 음원 성적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최건영이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웃었다.

보조개가 패는 천연덕스러운 웃음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랑 타이틀곡 하나씩 들고 와서 더블 타이틀이랬지?”

“어. 이대로 사이먼 리랑 예능 한두 개 더 돌다 보면, 회사 홍보전략도 사이먼 리 곡에 집중되겠지.”

“그런데 너. 사이먼 리, 그 사람하고는 뭐가 왔다 갔다 한 거야?”

“왔다 갔다 하긴. 열심히 노력해서 설득한 거지.”

“너한테 노력이라는 건 수단 방법 안 가린다는 거 아니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최건영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너 같은 놈한테나 당연한 거지.”

남자의 말에 최건영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고 이 바닥에선 나 같은 놈이 성공하는 거고.”

*

스케줄을 마치고 원룸에 도착했을 땐 늘 그렇듯 한밤중이었다.

하품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내일은 오전 스케줄은 배신자가 할 테니 알람 시간은 좀 늦게 맞춰도 될 것 같아서 조정하려는데, 드르륵 진동이 울린다.

얼마 전에 문자를 보냈던 그 작가다.

-매니저님, 실장님 연락받았어요. 그럼 섭외 픽스된 걸로 알고 진행할게요. 컨셉이 좀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는데 너무 걱정하진 마시구요. 우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스타 매니저만큼만 뽑아봐요!

< 행운의 상징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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