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즐 조각이 부족할 때 (3) >
술이 확 깼다.
김 실장이 소속된 회사의 정보가 착착 떠오른다. 태움 매니지먼트. W&U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지만 제법 건실한 회사였지. 배우중심이고. 방송인도 몇 명 있었던 것 같지만, 더 자세한 건 모르겠다.
왜 5개월 차 매니저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머리를 팽팽 돌리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송하 때문이에요?”
김 실장이 소리 내 웃었다.
“송하 씨가 걸그룹 소속이고 계약기간 한참 남은 거 다 아는데, 소송당할 일 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다시 묻자, 김 실장이 담배 연기처럼 뿌연 입김을 뱉으며 말했다.
“뭐,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시던데요. 선우 씨 얘기요.”
“누구한테요?”
“전 그것까진 모르겠구요. 어쨌든 회사에선 선우 씨만 생각 있으면 한번 만나보자고 하시던데. 우리 회사 싼마이 아닌 건 아실 거고, 이거 좋은 제안이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한 거지.
눌러놓았던 미래에 대한 상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혹시 이 일이 미래에 일어날 사고랑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내 의심리스트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어쨌든 내가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조건은 좋지만, 그렇다고 내가 W&U에서 쌓아놓은 것과 넵튠을 두고 옮길 만큼은 아니다. 괜히 간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한데, 당장 회사를 옮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생각 바뀌면 연락 줘요.”
선선히 물러난 김 실장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받아서 대충 지갑에 집어넣는데, 김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 뚫어지겠네요. 먼저 들어갈게요.”
“네?”
김 실장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턱짓한다. 돌아보니 유리문 너머로 이송하가 충격을 바가지로 퍼먹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는지 애꿎은 커피 자판기 버튼만 꾹꾹 누른다.
“얘기 들었어?”
옆으로 가서 물었더니 작은 머리가 좌우로 삐걱삐걱 움직인다.
“아니요.”
“들은 것 같은데.”
“사실 조금 들었어요. 일부러 엿들은 게 아니고, 커피 뽑고 있는데 들린 거예요.”
결백을 주장하며, 이송하가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런데 오빠······.”
“어. 안 옮겨. 생각 없어.”
질문이 다 나오기도 전에 대답했다.
이송하가 소리 없이 웃으면서 원두커피가 찰랑찰랑 담긴 종이컵을 들었다. 그리고 술잔 비우듯 원샷했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2초쯤 후에야 놀랐다.
“너 그거 안 뜨거워?”
“······뜨거워요.”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진다. 입술 사이로 김이 날 것 같다.
얼른 찬물을 따라줬더니 그것도 벌컥벌컥 단숨에 마신다. 얘 좀 이상한데. 자세히 보니 표정은 말짱한데, 눈동자가 물 위에 떠 있는 달처럼 흠뻑 젖어서 흔들린다.
“너 취한 거 같은데. 술 더 마셨어?”
“이 실장님이 주셨어요.”
저 양반이.
이봉준 실장을 쳐다봤더니 그쪽도 이미 눈이 반쯤 풀려있다. 저쪽은 서지준이 알아서 챙기겠지. 왜 벌써 가느냐고 붙잡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이송하와 함께 식당을 빠져나왔다.
운전대를 대리기사에게 맡기고 이송하와 나란히 뒷좌석에 탔다. 히터가 미니밴 안을 뜨끈뜨끈하게 데우자 술기운에 잠기운까지 올라왔는지, 이송하의 머리통이 가느다란 목 위에서 휘청거린다.
이송하의 목에 목베개를 끼워줬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간지러워서, 고개를 돌려 차창을 쳐다봤다. 유리 위로 달라붙은 진눈깨비가 녹아서 주르륵 흘러내린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도 깜빡 잠이 들것 같아서 스트레칭 하듯 허리를 쭉 폈을 때.
이송하의 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곧 끊어진다. 그리고 다시 울렸다. 세 번째가 울렸을 때 이송하의 어깨를 흔들었다.
“송하야, 일어나봐. 이거 급한 전환 것 같은데.”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하길래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도 집이다.
혹시 가족들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한 손으론 이송하를 흔들면서 전화를 받았다. 진동이 멈추기 무섭게 중년 여자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너 대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전화 대신 받았습니다, 송하 매니접니다.”
-매니저요?
“네. 정선웁니다. 송하가 피곤했는지 한잠이 들어서요. 급한 일일까 봐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정선우··· 아, 설날 방송 나오셨던 그분이죠? 송하한테 연기해보라고 하셨다는 분. 저 송하 엄마예요.
나무라는 듯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진다.
-안 그래도 그 방송 보고 직접 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됐네요. 한번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만나서요? 무슨 일이신지······.”
-아무래도 송하 걸그룹, 그거 그만하고 연기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거기 낭비할 시간에······.
그때 옆에서 쑥 뻗어온 손이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두컴컴한데도 이송하의 찡그린 표정이 훤히 보였다.
“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그 말만 남기고 이송하가 전화를 뚝 끊는다. 마침 넵튠 숙소에 다 도착했길래, 대리기사에게 잠깐 양해를 구했다. 그가 담배를 태우고 온다며 자리를 비우자 이송하가 바로 말했다.
“안 만나셔도 돼요. 만나지 마세요. 제가 잘 얘기할게요.”
“혹시 이것 때문에 집 전화 안 받은 거야?”
이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 연휴 때부터 이것 때문에 싸웠어요. 갑자기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아지신 거 같아요. 찾아봤는데 연예인들은 이런 일 비일비재하대요. 꼭 우리 집만 이런 게 아니라.”
“얘기하지 그랬어. 계속 그러시면 나나 실장님이······.”
“제가 해결할게요. 집안 문젠데요, 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엉금엉금 기다가 막 걸음마를 시작한 걸그룹에, 역대급 드라마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멤버. 개인 활동량부터 정산문제.
팀 내 불화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안 문제가 있었구나.
지금은 넵튠도 아주 좋은 흐름을 타고 있고, 계약도 계약이지만 뭣보다도 지금 이송하한테 팀 내 불화 같은 문제가 생기면 이미지에도 전혀 좋을 게 없는데.
설마 미래의 그 사건이 이송하 가족과 연관있는 건 아니겠지.
또다시 의심병이 도지는 중에, 이송하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실 답답해서··· 연휴 동안 계속 오빠한테 전화하고 싶었어요.”
“하지, 왜. 내 번호 알잖아.”
“오랜만에 쉬시는 데 방해되잖아요. 일 얘기하면.”
“그런 건 일 아냐. 다음부턴 전화해도 돼.”
내 말에 이송하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진짜냐고 묻는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덤덤하던 얼굴에 찬찬히 미소가 피었다.
*
진눈깨비를 뿌리던 밤이 거짓말인 것처럼, 아침은 화창했다.
하지만 두툼한 커튼에 가려진 방은 여전히 어젯밤의 스산한 공기가 머물러있었다. 박살이 난 화분과 가전제품, 그리고 책들이 방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멀쩡한 건 화장대 위의 거울뿐이었다.
손채영은 그 난장판 속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고, 눈에는 사나운 기운이 줄줄 흘렀다. 손채영은 누군가 있다면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도 남을 눈빛으로 벽을 노려보았다.
곧, 핸드폰을 집은 손채영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어두운 방 안을 울렸다.
“이러다가 정신병 걸리겠습니다, 팀장님.”
눈도 뺨도 움푹 들어간 조 실장이 핸드폰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쉬지 않고 진동하는 화면에는 손채영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머리를 움켜쥔 그가 맞은편에 앉은 2팀장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앞으론 더 끔찍하게 굴 텐데, 숨통이 턱턱 막힙니다, 숨통이.”
“채영이 지금 뭐 하고 있는데?”
“또 살림살이 때려 부수고 있겠죠. 가서 확인할 엄두도 안 나요.”
조 실장이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2팀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걔 성질머리에 그럴 만도 하지. 뺏으면 뺏었지 누구한테 뭘 뺏길 애야, 걔가?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무더기로, 그것도 자기가 뒷수작 부려서 묻으려고 했던 이송하한테 홀랑 뺏겼으니······ 그러게 애초에 네가 옆에서 간수를 잘했어야지, 임마!”
짜증 섞인 고함에 흠칫 놀란 조 실장이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이 꼴 났는데도 채영이 정말 재계약 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어떤 분인데. 당연히 목줄을 걸어놨으니까 채영이 걔가 살림살이나 부수고 앉았지, 안 그랬으면 벌써 계약서 찢고 나갔겠지. 아니 그런데 대표님은 대체 뭐 때문에 일을 이렇게까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2팀장이 이맛살을 구겼다.
“하여튼 정선우 그놈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조용한 날이 없어.”
쏘듯이 말한 그가 문득 턱수염을 매만졌다. 잠시 후 다시 입이 열렸다.
“어차피 채영이 지금 상태론 한동안 작품 하기 힘들 거고, 너 이참에 이송하 한번 맡아볼래?”
“이송하요?”
시름시름 죽어가던 조 실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안 그래도 본부장님한테 얘기 꺼내려고 했는데, 이송하를 계속 정선우 그놈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안목은 뭐 괜찮은 것 같다마는, 일하는 건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 아냐.”
“그건 그렇죠.”
“이송하 그거, 보면 볼수록 진짜배기 물건인데 채영이처럼 다루기 어려워지기 전에 제대로 된 담당 붙여서 관리해야지. 베테랑이 붙는 게 이송하 본인한테도 좋을 거고.”
“저는 좋습니다.”
조 실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한참을 더 이어졌다.
*
시끄럽다.
실눈을 뜨자 방안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소음의 정체는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었다.
해가 안 뜬 걸 보면 아직 이른 시간인데, 알람을 잘못 맞춰놨나?
더듬더듬 충전기 잭을 빼고 핸드폰을 가져와 보니 알람이 아니라 전화다. 박우정 기자였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었다.
전화 잘못 걸었나?
쩍 하품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자님?”
-아, 선우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그래도 이거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다급한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이주환이라고 아세요? 펀치라인에···.
“랩 하는 놈이요. 알아요.”
곧장 일어나서 불을 켰다. 박우정 기자가 계속 말했다.
-걔 SNS에 좀 전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송하 씨 저격하는 거 같아요.
“잠깐만요, 바로 확인해볼게요.”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서둘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펀치라인 이주환의 SNS를 확인했다. 박우정 기자 말대로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다.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한, 개떡 같은 글이.
우울한 밤.
몇 달간 녹화장에서 스치듯 만나면서, 난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믿었는데. 성공이 뭐길래 사람 눈빛이 그렇게 변할까. 네 얼굴 보는 게 힘들어서 중간에 드라마를 껐다. 내가 미련한 건가.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건가. 참 더럽고 아프다.
“뭐 이런 미친놈이······!”
어이가 없어서 욕부터 튀어 나갔다.
몇 달간 녹화장에서 만났다, 성공, 드라마, 이름만 뺐지 누가 봐도 이송하라고 생각할만한 내용이다. 옆에 뜬 댓글 창을 보니 이미 펀치라인의 팬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이거 빼박 이송하 아니냐. 이송하가 뜨고 나서 쌩깐 거 아니냐.
댓글마다 이송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박우정 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하 씨랑 이주환이랑 정말 뭐 있었어요? 있었더라도···.
“아뇨, 헛소리예요.”
-그럼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 할 텐데. 아이돌 스캔들 터지면 무조건 여자 쪽만 손핸데, 이건 아예 대놓고 엿 먹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지금이 새벽이라 아직 조용하긴 한데 금방 일 커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기자님.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일단 끊고 박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다. 김현조도 통화 중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은 건가? 혹시 몰라서 메시지도 한 통씩 보내놓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건가?
내가 미래에서 봤던 사건. 이 자식이 폭탄인가?
당장 인터뷰해서 해명하라고 했었지. 상황은 딱 맞아떨어진다.
핸드폰을 들고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우뚝 멈췄다.
미래에서는 내가 분명히 상대방을 위협하는 중이었다. 부탁하는 게 아니라고, 같이 흙탕물에서 뒹굴고 싶지 않으면 상황을 바로잡으라고 위협했지. 그동안 상대방은 입도 뻥끗 못 했고.
이게 그 사건이라면, 난 뭘 가지고 이놈을 위협한 거지?
< 퍼즐 조각이 부족할 때 (3)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