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즐 조각이 부족할 때 (2) >
편집증 환자가 이런 기분일까.
앞으로 내가 누군가를 위협할 만한 사건이 터진다는 것. 그 사실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눌러앉은 후부터는, 계속 주위의 사람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손채영, 심경택 선생은 손에 도끼만 들려주면 기쁘게 나랑 이송하를 토막 낼 작자들이고. 찜찜하다 못해 썩어가는 배신자도 있고.
악수하고 헤어졌지만 바로 멱살 잡을 일이 생겨도 안 이상한 고준태 피디. 넵튠과 임서영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슈가캣. 볼 때마다 깔짝깔짝 거슬렸던 펀치라인 놈.
그 외에도 이송하 논란 때는 신나서 비웃다가 일이 잘 풀리니까 운 좋다고 구시렁거리던 사람들······.
이건 뭐, 의심스러운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폭탄을 찾으려고 둘러봤더니 사방이 지뢰밭인 꼴이랄까.
대체 이 지뢰밭에 깔린 수많은 지뢰 중에, 뭐가 터질 폭탄일까?
“야. 너 요즘 집안에 우환 있냐?”
회의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김현조가 뜬금없이 물어왔다.
“아뇨, 무사 평안한데요.”
“그럼 연애문제라거나, 아니지, 너한테 여자가 있을 리가 없고.”
“나 참, 있을 리가 없는 건 또 뭐예요. 있을 수도 있지.”
“지금 네 스케줄에 연애가 되면 네가 내 선배다.”
김현조가 낄낄거리며 한 말에 3팀장이 합세한다. 자기들은 몇 년째 솔로라느니, 이게 바로 네 미래라느니. 창창한 내 앞날에 엿가루 튀는 소리를 하고 있다.
바쁜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거야, 이 양반들이.
썩은 얼굴로 쳐다봤더니 김현조가 턱을 괴곤 씩 웃는다.
“실실 쪼개고 다녀야 정상인 시기에 혼자 심각하니까 그러지, 임마. 넥스트 K스타 막방도 별 탈 없이 잘 끝났고. 고양이 수호령은 역대급 드라마로 종영한 데다가 2차로 중국에서도 지금 난리라고 하고. 순풍에 돛단 것처럼 잘나가고 있구만.”
“그래. 팀장급 회의 때마다 블랙아웃으로 번 돈 넵튠한테 쏟아부어서 족족 말아 처먹었다고, 2팀장 그놈의 새끼가 꼭 한마디씩 했었는데. 이젠 어깨 쭉 펴고 회의 들어간다니까.”
맞다. 내가 넵튠 일을 맡은 이래로 가장 잘 풀리는 시기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넥스트 K스타 막방은 훈훈하게 끝났고, 고양이 수호령도 어제 극찬세례를 받으며 종영했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나 타임슬립 같은, 원래 기대작으로 꼽혔던 드라마들이 줄줄이 폭망한 덕에 그쪽 시청자들까지 다 쓸어담아서, 아주 신드롬을 일으키며 끝났다.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기자들은 고양이 수호령을 올해를 대표할 드라마로 꼽고 있고, 시청자들은 통장을 줄 테니 감독판 DVD를 내놓으라며 청원 중이다.
이송하 개인의 이미지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만약 케이블이 아니라 공중파였다면 올해 연기대상은 서지준, 신인상은 이송하 몫이었을 거라는 평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 김현조의 다크서클이 눈에 띄게 흐려진 것도 당연하다. 3팀장이 흥겨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도 당연하고.
나도 그랬을 거다.
스릴러 뺨치는 미래를 보지만 않았더라면.
“따로 신경 쓰이는 것들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대충 둘러대려는데, 김현조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손채영이랑 심경택 선생 때문에?”
“뭐, 그런 것도 있구요.”
틀린 말은 아니지.
3팀장이 다리 한 짝을 다른 쪽 허벅지에 턱 얹고 혀를 찼다.
“복덩이 저거도 참, 어떨 때 보면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 그게 뭐 신경 쓰일 일이냐. 백 년 묵은 똥 덩어리가 쑥 내려갈 일이지. 심경택 선생은 제대로 털면 먼지가 우박처럼 쏟아질 위인이라 우릴 물어뜯진 못 할 거라더라.”
“그 양반 교수로 있던 학교도 관둔다 그러던데? 학생들 사이에서 찌라시가 돌았다나.”
그건 몰랐는데.
“소문 짜하게 퍼져서 신인들 개인레슨도 뚝 끊겼을 거고. 사실 지금까지 그 양반이 개인레슨 해 처먹은 것도 손채영 이름 안 팔아먹었으면 턱도 없었을 텐데, 손채영이랑 파투났으니 그나마도 쫑났지.”
“이래서 인생 한방이라니까. 앞으론 뭐 해먹고 살까, 그 양반.”
“이 바닥에선 끝났지, 뭐.”
3팀장과 김현조의 미소에서 탄산이 톡톡 튄다.
“이건 애피타이저고, 더 속 시원한 소식은 따로 있다.”
김현조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테이블 한쪽에 있던 서류봉투를 집었다. 뭐가 들었는지 봉투 귀퉁이가 터질 만큼 두툼하다.
한 뭉텅이의 서류를 꺼낸 김현조가 내 쪽으로 밀었다.
“자, 청바지 브랜드 광고. 송하한테 들어온 거.”
“원래 손채영이 찍던 거다, 그거.”
3팀장이 추임새처럼 덧붙였다.
김현조가 이번엔 훨씬 두꺼운 뭉치를 꺼낸다. 시나리오다.
“이건 채문호 감독 새 영화. 송하 오디션 한번 보고 싶다더라.”
“이것도 원래는 손채영한테 먼저 들어왔던 작품이고.”
그 뒤로도 광고 기획안,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시놉시스가 툭툭 튀어나왔다. 분야는 다양하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 손채영이 찍던 거라거나, 찍기로 논의 중이었던 것들이라는 거.
나는 지뢰나 폭탄에 대한 생각을 머리 구석에 처박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서류들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 맙소사.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종잇조각이지만 내 눈엔 다이아몬드보다 더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3팀장이 콧잔등을 긁으며 웃었다.
“너도 보면 알겠지만, 지금 송하한테 들어오는 것들하고는 배역이나 투자규모가 천지 차이야. 물론 드라마나 영화는 내부회의도 하고 오디션도 봐야 하겠지만, 이런 건 원래라면 송하 정도 급에는 오디션 기회도 안 오는 거거든.”
나도 몇몇 감독들로부터 시나리오나 시놉시스를 받았지만, 이렇게 굵직굵직한 배역은 없었다. 이런 건 수차례 작품을 하면서 확실하게 검증된 배우들한테나 돌아간다.
손채영 같은 배우들.
“정말 이게 다 송하한테 넘어왔다구요? 그게 가능해요?”
“원래라면 불가능하지. 뭍나인을 거하게 말아먹긴 했지만, 손채영쯤 되면 드라마 하나 망했다고 광고랑 작품이 뚝 끊기고 그러진 않아. 그런데 이렇게 많은 게, 그것도 송하한테 넘어온 거 보면······.”
“대표님이 나서서 손을 쓰신 거라고 봐야지.”
3팀장과 김현조가 번갈아 대답했다.
그리고 3팀장이 묘한 눈길로 날 쳐다봤다.
“본부장님 얘기가, 이거 네가 딴 거라던데?”
“······제가 땄다구요?”
“뭐,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데 대표님이 그러셨다더라. 이거 정선우가 딴 거라고.”
문득 지난날 백한성 대표와 했던 전화통화가 떠오른다.
입바른 사과 같은 게 아니라 손채영한테 대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내 말에, 백한성 대표가 대답했었지.
대가는 고민해보겠다고.
김현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손채영한테는 이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악몽일걸?”
쫑파티라는 게 드라마 하나를 끝내고 그간의 회포를 푸는 자리다 보니, 드라마의 성공 여부에 따라 쫑파티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뭍나인의 경우는 아예 쫑파티도 안 했다고 기사가 떴었지.
반면 고양이 수호령의 쫑파티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간 숨 가쁜 일정에 쫓겨 달려온 촬영팀은 한풀이라도 하듯 폭탄주를 위장 속으로 쑤셔 넣었다. 프로덕션과 TVL 측 직원들도, 연예인들도 허리띠를 풀고 부어라, 마셔라.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해, 그리고 흥분에 취해 떠들었다.
“선우 씨! 여기, 여기! 이쪽으로 와서 한잔해요!”
이송하 옆자리로 돌아온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다들 오늘 술주정은 내 이름 부르는 걸로 통일했나. 아까부터 여기저기서 엄청 불러댄다. 돌아보니 이번엔 매니저들 몇 명이 둘러앉아 있는 테이블이다.
“정선우 오늘 바쁘구만.”
앞자리에서 이봉준 실장이 낄낄거렸다. 둥글둥글한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옆자리의 서지준이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라 아까부터 몇 번이나 대신 술잔을 비우더니, 취기가 올라오는지 얼굴도 불콰하다.
“그러게요. 어째 사람들이 점원보다 저를 더 찾는 것 같네요.”
“좋은 거야, 좋은 거. 이 바닥 인맥으로 굴러가는데, 너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증거지. 흘러넘치는 매니저 중 한 명에서 인맥이 될만한 사람으로. 예능 이미지 덕분에 접근하기 편해진 것도 있을 거고.”
그러면서 또 낄낄거린다. 이젠 내 얼굴만 봐도 웃긴다면서.
혀를 차며 옆을 바라봤다. 이송하가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건배할 때마다 술도 제법 마신 것 같은데 아직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이송하의 젓가락이 멈춘 건 테이블 아래서 진동이 올라왔을 때다.
집이라고 쓰여 있는 걸로 봐선 가족인 것 같은데. 이송하는 한동안 화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더니 전화가 끊어지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안에 시끄러우면 나가서 통화하고 와.”
“괜찮아요. 지금은 안 받는 게 나아요. 술도 마셨고.”
내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소곤소곤 말한다.
부모님이 좀 엄한 편인가, 생각하는데 매니저들 테이블에서 또 내 이름이 튀어나온다.
“송하야, 나 저쪽 테이블에 좀 가봐야겠다.”
“네, 잠깐만요.”
이송하가 자기 앞에 놓인 술잔과 젓가락, 그리고 앞 접시를 바리바리 챙기기 시작한다. 따라 나설 기세길래 얼른 어깨를 짚었다.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저쪽에 맥주, 소주, 콜라까지 부어서 대접째 마시는 거 안 보여? 그냥 이 실장님하고 있어.”
도로 앉은 이송하가 이봉준 실장을 쳐다본다. 작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내 이름을 노래처럼 부르고 있는 테이블로 가는데, 뒤에서 이봉준 실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이송하. 너는 네 매니저 보는 표정이랑 날 보는 표정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술이 확 깨네.”
무슨 표정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지만, 이송하 뒤통수만 보인다.
“어어, 선우 씨, 여기 앉아요, 앉아.”
“난 선우 씨가 그렇게 재밌는 사람인 줄 방송 보고 처음 알았네!”
빈자리에 앉자마자 스타 매니저 얘기부터 나온다. 한동안 그게 내 명함대용이 될 모양이다. 분명 시청률은 12프로였는데, 체감상으론 전 국민이 다 본 것 같다. 어느 테이블을 가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긋지긋한 흑역사 얘기부터, 좀 접근하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는데 방송 보니 사람 괜찮아 보이더라는 립서비스까지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화제가 전환됐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겠다, 이송하 씨는 CF 쓸어담을 일만 남았네요. 엄청 찍겠던데요? 광고주들이 딱 좋아할 스타일이잖아요.”
“이것저것 많이 좀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웃으며 대답했더니 누군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야, 저거 찍어 올리면 고깃집 CF도 들어오겠는데요. 무슨 고기를 저렇게 우아하게 먹나 그래. 그림낭비다, 그림낭비.”
“······우아요?”
폭탄주가 도로 나올 뻔했다.
돌아보니 이송하는 여전히 연예인들 사이에 파묻혀서 폭풍 젓가락질 중이다. 워낙 분위기가 먹고 들어가서, 뭘 하고 있어도 그림이 좋긴 하다. 그래도 쟤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 우아하다는 말은 쏙 들어갈 텐데. 복스럽다면 모를까.
폭탄주가 몇 바퀴 더 돌아갔다.
다 매니저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 얘기로 화제가 넘어간다.
담당하는 연예인이 차기작으로는 뭘 생각하고 있는지, 이번에 너무 대박이 나서 시놉시스는 많이 들어오는데 고르는 게 문제라든지.
판 프로덕션에서 내가 고양이 수호령을 시놉시스만 보고 골랐다는 얘기를 떠들어댄 바람에, 나한테 다음 작품 뭐 생각해놓은 거 있느냐고 은근히 캐묻는 사람도 많았다.
삐쩍 마른 주 실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선우 씨는 이송하 잘 키워봐. 연기 좋지, 운때도 잘 맞았지, 쑥쑥 잘 키우면 또 알아? 나중에 걸어 다니는 1인 기업 될지. 그럼 회사 좆같을 때 데리고 나가서 앗싸리 기획사 하나 차리면 되잖아.”
“그게 말이 쉽지. W&U가 구멍가게도 아니고, 어차피 경력 쌓는 동안 담당연예인 몇 번씩 바뀔 거 아니에요.”
김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든다.
옆에서 다른 매니저들도 하나둘 말을 더했다.
“그거야 서로 잘 맞으면 계속 같이 갈 수도 있지. W&U에도 서지준 씨랑 이봉준 실장 같은 경우도 있고. 이 실장이 나가자고 하면 서지준 씨는 따라갈걸?”
“그런데 이송하 씨는 선우 씨가 지금 나가자고 해도 따라갈 분위긴데. 사이 좋잖아. 보니까 선우 씨가 테이블 옮겨 다닐 때마다 쳐다보더라고. 선우 씨 이름 크게 들릴 때도 한 번씩 쳐다보고.”
“그랬어요?”
내 물음에 주 실장이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꼭 애들 놀이터에 내놓으면 잘 놀다가도 엄마 아직 있나 한 번씩 돌아보잖아. 뭐 그런 거 같더라니까. 지금도 보네.”
고개를 돌렸다가 이송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서로 눈을 한 번씩 깜빡이고 동시에 웃는데, 그걸 알아챈 이봉준 실장이 이송하의 팔을 두드리면서 뭐라고 말한다. 뭔지 몰라도 이송하가 귀담아듣고 있다. 또 이상한 얘기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슬슬 다시 저쪽 테이블로 옮겨갈 타이밍을 보고 있을 때였다.
빈 잔을 내려놓은 김 실장이 내 등을 툭 건드린다.
“선우 씨,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잠깐 볼래요?”
“저한테요?”
가깝던 사이는 아니라 의아하게 쳐다봤더니, 안경 너머로 김 실장의 눈이 씩 웃는다.
술기운도 가라앉힐 겸 아예 식당 밖으로 나갔다.
축축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2월도 끝물이라 날이 좀 풀렸는지, 눈 대신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김 실장이 잠깐 뜸을 들이고 말했다.
“선우 씨, 이건 위에서 얘기가 나와서 난 전달만 하는 건데요.”
“네. 얘기하세요.”
“혹시 우리 회사로 옮길 생각 없어요?”
“······네?”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술기운에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김 실장이 다시 말했다.
“무조건 지금보다 좋은 조건에, 실장으로. 어때요?”
< 퍼즐 조각이 부족할 때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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