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81화 (81/218)

< 스타 매니저 (5) >

“누구요?”

-손채영 씨요.

이건 또 뭐야. 왜 이 이름이 튀어나오는 거지?

2팀 땜빵을 3팀인 나한테, 그것도 오래간만에 쉬고 있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손채영이 날 지목한 건가?

한기가 덮쳐온다. 차라리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 낫지, 데려가려고 안달인 건 더 소름 돋는다.

불현듯 지난번에 봤던 미래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손채영을 담당하고 있던, 내 정신건강을 위협한 미래.

저번에 손채영의 제안을 거절한 걸로 그 미래가 바뀌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내가 본 것만으로는, 어떤 연유로 내가 손채영을 담당하게 됐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땜빵 일을 받아들이면 그 미래로 가는 길에 진입하게 될 것만 같다. 오늘 휴가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내 행복한 인생계획도 같이 날아갈 것 같다고.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가 멀찍이 뗐다가 하며 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엘리베이터라 그런지 잘 안 들리네요. 나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여보세요?

회사 전화를 끊고 김현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3팀장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같이 있나? 회의 중인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둘 다 나랑 손채영 사이를 알 만큼 아는데. 내가 손채영 스케줄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한테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단 말이야. 어쩌면 이 둘도 아직 이 일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김현조한테 문자를 보내놓고 머리를 굴렸다.

2팀 직원한테 뭐라고 둘러댈까. 아파서 골골거리고 있다고 할까, 부모님 뵈러 지방 내려왔다고 할까. 아니면 차라리…….

다시 전화를 걸었다.

늘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재까닥 전화를 받는 앤데 오늘따라 신호음이 길다. 신발 뒤축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기다리던 중, 몽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오빠 맞으세요?

“어, 송하야.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니에요, 일어났어요.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리고 이불에서 빠져나오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 자연스럽게 이송하의 모습이 그려진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귀에 핸드폰을 딱 붙이고 있겠지.

“혹시 오늘 다른 약속 있어? 바쁜 일이나.”

-없어요. 내일 촬영할 씬 연습하려고 했는데 안 해도 돼요. 벌써 많이 해서.

“그래? 내가 너 보러 갈 구실을 좀 만들어야 하는데, 어디 아프고 싶은 데는 없고?”

잠깐의 침묵 후에 이송하가 말했다.

“갑자기 토할 거 같아요.”

건너편에서 웩, 소리가 들렸다.

영화 표를 취소하고 그 돈으로 치킨을 샀다.

그리고 넵튠 숙소로 피난 갔다.

2팀 직원한테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당황한 게 여기까지 전해지더라.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쩔 거야. 땜빵이고 뭐고 내 담당인 이송하가 아파서 옆에서 지켜봐야겠다는데.

당장 내일 아침부터 또 촬영장을 뛰어다녀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한숨을 푹 쉬었더니 저쪽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넵튠 숙소에 들어간 뒤에야 김현조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역시 회의 중이었다. 2팀장도 같이 들어간 회의. 그 회의가 끝난 후에야 2팀장이 손채영 스케줄 땜빵 얘기를 꺼냈단다.

뭐, 조 실장이 나를 좋게 봐서 이참에 기회를 주고 싶었다느니, 휴일에 일하는 대신 본인이 책임지고 휴일을 다시 빼줄 생각이었다느니. 2팀장이 뭐가 문제냐는 양 헛소리를 쏟아내서 두 팀장이 오랜만에 한판 하는 중이라나.

처음 전화받고 바로 손채영 픽업하러 갔으면, 이왕 간 거 바쁜데 그냥 땜빵 하라고 했을 확률 백 프로다.

김현조도 오늘은 재난상황이었다며 내 피난을 인정해줬다. 그리고 휴일은 근시일 내로 하루 더 빼기로 했다.

“그럭저럭 재난상황은 종결된 거 같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침대에 누워 색색거리던 이송하가 고개를 돌린다. 뺨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보기만 해도 처연하고, 이마는 축축하게 젖어있다. 당장 업고 응급실로 날라야 할 것 같다.

저 뜨끈뜨끈해 보이는 뺨은 침대 밑에 깐 전기장판 때문이고, 식은땀은 임서영이 분무기로 뿌린 흔적이라는 걸 아는데도.

“끝났어요? 이제 안 가셔도 돼요?”

“응. 고맙다.”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때도 저한테 오세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일어나라. 이럴 필요 없다니까. 누가 확인하러 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연기를 이렇게까지 실감 나게 해. 진짜 죽이라도 해 먹여야 할 것 같이.”

“오빠, 죽도 만들 줄 아세요?”

“당연히 알지. 왜, 해줘?”

이마를 닦으며 일어나더니만 도로 드러누울 기세다.

“농담이야, 농담. 치킨 사왔어. 치킨 안 먹을 거야?”

“아.”

고민한다. 내 참, 이게 뭐라고 고민하고 있냐.

아쉬워 보이는 이송하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열린 문 사이로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니만, 이미 테이블에 치킨을 중심으로 먹을거리들을 가득 세팅해놓고 있다.

늘 앉던 소파에 앉자, 임서영이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오빠, 오늘 휴일인데 또 망쳐서 어떡해요? 진짜 드러워서 출세해야지 안 되겠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참, 오빠, 오빠, 우리 이번에 찍은 예능 있잖아요. 그걸로 오빠가 확 뜨면 회사에서도 막 이래라저래라 안 하지 않을까요?”

“난 됐으니까 너부터 확 뜨세요.”

내 말에 임서영의 안색이 칙칙해진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돌더니, 소파 위에 굴러다니던 쿠션을 꽉 끌어안고 말했다.

“으아아, 안 그래도 겁나 죽겠어요. 설날에 내려가면 온 가족이 다 모여서 보기로 했는데! 분명 엄청나게 기대하고 계실 거란 말이에요. 근데 몽땅 편집되고 재미없게 나가면 어떡하죠?”

“걱정 마. 피디님이 발가락으로 붙여도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오빠 가족들도 보신다면서요!”

“생각하는 걸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쓸데없는 생각은 치우고 설 연휴에 며칠이나 쉬게 될지만 신경 쓰고 있다. 김현조를 중심으로 최대한 연휴 스케줄을 빼고 있긴 한데, 방송 바닥이 남들 쉴 때 쉬는 곳이 아니다 보니 명절 연휴라도 다 챙겨 먹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단다.

“너희는 연휴에 어쩌기로 했어?”

다른 애들한테 물었다.

내 다리 근처에 앉아서 치킨을 뜯던 이송하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저도 집에 가요.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하셨어요.”

“잘됐네.”

“스타 매니저도 같이 볼 거예요.”

희미하긴 하지만, 목소리에 분명 들뜬 흔적이 있다.

이송하 부모님은 이송하가 연예인을 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었지. 안되는 걸 왜 자꾸 하려고 하느냐고. 이제는 ‘안되는 거’라는 생각도 바뀌었을 거다. 지금의 이송하는 누가 뭐래도 핫한 연예인이니까.

벌써 캔맥주 하나를 딴 이태희가 말했다.

“전 그냥 숙소에 있을 거예요. 오갈 데 없는 몸이라.”

“뭐? 왜 오갈 데가 없어? 집은?”

“부모님이 여행 가신대요. 연휴 동안은 잠이나 보충하려구요.”

깜짝이야. 집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머리 닿으면 자는 애가 잠을 더 보충해? 아예 겨울잠 자게?”

안심하며 농담을 던졌더니 이태희가 맥주를 마시며 웃는다.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엘제이가 이어서 말했다.

“저도 숙소요. 뭐 엄청난 날이라고 미국까지 가요.”

아, 엘제이 부모님은 미국에 계시댔나.

그래도 둘이 남아있으면 외롭진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엘제이가 갑자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운동이나 하죠, 뭐. 정 심심하면 임서영 방에서 놀면 되고.”

“뭐?! 야, 안돼! 내 방에서 뭐하려고! 문 딱 잠가놓고 갈 거거든!”

“그거 3초면 따.”

“너, 너, 그거 농담이지? 또 그냥 장난치는 거지?!”

임서영이 들어가기만 하라고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 특집 망할까 봐 땅을 파더니, 엘제이 말 때문에 그건 다 잊었나 보다. 그리고 엘제이는 잔뜩 흥분한 임서영을 툭툭 건드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쟤들은 참 정말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또 잘 어울린단 말이야.

한쪽에선 평소처럼 시끌시끌하고, 방목하는 리더는 잘 논다는 듯이 맥주를 홀짝거리며 쳐다보고 있고. 그리고 막내는 야무지게 치킨을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내 손에 다리 하나를 쥐여주고.

나는 익숙한 공기 속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갑자기 엘제이가 말했다.

“아, 영화 못 보고 오셨다면서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선택지?”

엘제이가 리모컨을 흔든다.

“1번은 IPTV로 신작 영화 보기. 2번은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1편부터 몰아보기. 그거 지금 볼맛 나겠던데요.”

우린 만장일치로 2번을 선택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스트레스가 싹 풀렸거든.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아니, 상당히 괜찮은 휴일이었다.

우리한테 떨어진 명절 연휴는 2박 3일이었다.

공식 연휴보단 짧지만, 그만큼 스케줄을 뺀 것도 전화기 붙들고 개고생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김현조와 나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큰일이 아니라면 절대 서로를 찾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연휴가 시작하던 날.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났다.

고속도로 교통체증이 심했는데도 짜증은커녕 콧노래가 났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가족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내 몸을 꽉 얽매고 있던 줄을 하나씩 끊어내는 느낌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는 게 얼마 만이더라.

도심에서 벗어나 한참, 고층 건물이 드문드문한 군 시내를 지나서 또 한참, 겨울이라 메마른 논밭이 가득한 황톳빛 시골 길을 또 한참 찾아 들어간 후에야 부모님이 터를 잡은 마을에 도착했다.

낯익은 얼굴이 아니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쳐다본다.

차를 대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편에 있는 화단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쌍둥이들이 와서 심어놨다는 모조 트리가 그대로 남아있고, 그 옆의 작은 개집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늘어져 자고 있다.

먼저 내려온 큰형 식구가 집에 있는지 마당까지 떠들썩하다.

“저 왔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부침개 냄새가 기분 좋게 반겼다. 그리고 동글동글한 덩어리 네 개가 우르르 몰려와서 철썩 달라붙는다. 배에 하나, 등에 하나, 양팔에 하나씩.

“삼촌!”

“그래, 내 새끼들.”

정화되는 기분이다. 머리통을 한 번씩 쓰다듬어주는데, 셋째 놈인 가을이가 개구지게 웃었다.

“우리가 왜 삼촌 새끼야? 우리는 아빠 새낀데?”

“생물학적인 건 넘어가자, 좀. 너희 반은 내가 키웠어.”

“아닌데,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컸는데?”

“이래서 조카들한테 잘해줘도 소용없다더니. 너희 장난감 중에 내 알바비로 산 게 몇 갠데. 먹을 거 엄청 사왔는데 이건 삼촌 혼자 먹는다. 너희는 삼촌이 사온 걸 먹을 자격이 없어.”

그제야 내 양손에 들린 쇼핑백을 눈치챘는지 쌍둥이들이 앞다투어 말을 바꾼다.

“아냐, 난 삼촌 새끼 할래!”

“나도!”

그러면서 밥 달라는 제비 새끼들처럼 파닥거린다.

애들한테 쇼핑백을 넘기고 다른 가족들한테도 인사했다. 형이랑 형수님은 여전했다. 거실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던 형이 안경을 벗으면서 웃었다.

“너 얼굴 잊어버리겠다.”

“위험하다 싶으면 아버지를 봐. 나랑 똑같잖아.”

형수님이 깎고 있는 배를 드시던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형수님이랑 엄마가 어깨까지 떨며 웃었다.

짐을 풀며 살펴보니 아버지도, 엄마도 이곳 생활이 잘 맞는지 서울에 있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진 것 같다.

엄마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살 빠진 것 좀 봐라. 매니저라는 게 원래 이렇게 바쁜 거래니? 자식 하나 잃어버린 줄 알았네.”

“이제 회사 들어간 놈이 자리 잡으려면 바쁘게 살아야지.”

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눈을 흘긴다.

나도 배를 한 조각 먹다가, 문득 생각나서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서류봉투에 넣어온 빳빳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버지, 이거요.”

“뭔데?”

“장윤옥 선생님 사인이요.”

아버지 이름에다가, 건강 쾌차하시라는 멘트까지 같이 받았다. 잘 웃지 않는 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엄마랑 형수님한테는 몇 장 받아온 서지준 사인을 내밀었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서지준은 나이를 불문하고 잘 통했다.

그때 형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선우 너, TV 나온다며?”

“맞아요, 참. 뭐였지? 스타 매니저? 그런 거 나온다면서요. 진작 얘기 하시지. 어머님께 듣고 알았어요.”

형수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는 딱 네 형수한테만 얘기했어.”

“야, 선우 너 TV 나오냐?”

“그렇게 됐어요, 작은 아빠.”

“선우야! TV 나온다면서? 너 매니저 일 하는 거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큰오빠가 그렇게 걱정하더니만, TV에도 나오면 성공한 거 아니야? 근데 요즘은 매니저들도 TV 나오고 그러니?”

“그냥 어쩌다가 한번 나가게 됐어요, 고모.”

“선우야, 정말 TV 나오냐? 스타, 스타 뭐라고?”

“스타 매니저.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선우야, 너!”

“네, 맞아요.”

예상했던 바다.

엄마는 형수님한테만 얘기했고, 형수님은 누구한테만 얘기했고, 누구는 또 누구한테만 얘기했고.

특집 방송 시작을 앞뒀을 때쯤에는 작은집 식구들부터, 이거 같이 보려고 시댁 갔다가 일찍 왔다는 고모들 식구까지.

거실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 스타 매니저 (5)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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