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 매니저 (4) >
“아, 확실히 괜찮죠, 저 매니저.”
윤 피디가 매니저 측 좌석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매니저, 정선우는 특색 없는 매니저들 사이에서 바로 눈에 띄었다. 아직도 흑역사 공개의 충격이 남아있는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조차 시선이 간다.
박 작가가 같은 곳을 보며 웃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죠. 넵튠 멘트중에 저거 살려야겠다 싶은 건 대부분이 매니저랑 주고받는 멘트들이에요.”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까.”
“느낌부터가 확 달라요. 처음엔 달달 외워온 것처럼 전형적인 멘트만 던지더니, 저 매니저랑 붙고 나서부터는 멘트가 날것 그대로 팔딱팔딱 뛰잖아요.”
분명 초반의 넵튠은 ‘우리 신인 걸그룹이에요.’라고 얼굴에 써 붙여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예능 물을 안 먹은 신인 걸그룹에 엄청난 기대를 걸진 않았으니까.
넵튠에게 기대한 역할은 시청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이송하 뒷얘기를 푸는 것, 그리고 남탕인 출연자들 사이에서 예쁜 비주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드는 것. 그 정도였다.
플러스알파로 젊은 매니저와의 케미로 재미를 좀 뽑아주면 좋고.
그런데 그 플러스알파가 제대로 터진 셈이다.
박 작가의 말처럼, 지금의 좋은 분위기에는 저 매니저의 영향이 지대했다.
박 작가가 손에 들린 매직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신인들 데리고 나오면 의욕이 넘쳐서 오바하는 사람들 천진데, 부담 없이 하잖아요. 말도 툭툭 잘 던지고. 목소리랑 발음이 좋아서 귀에도 쏙쏙 잘 들어와요. 그러니까 자꾸 시선도 가고.”
“이거 참, 기대했던 쪽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고 오히려 큰 기대 안 했던 데서 얻어걸렸네요.”
“그러니까요. 막판에 저 팀 섭외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찔하죠. 그럼 편집실에서 소주 깠을지도 몰라요.”
제작진이 보통 이상은 해줄 거라고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은 줄줄이 죽을 쑤는 중이다. 특히 개그맨 지망생이었다던 김동호는 한파보다 더 싸늘한 개그로 MC들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박태평은 아까부터 김동호에게 말도 걸지 않고 있었다.
윤 피디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도 저만큼만 해주면 바랄 게 없겠는데.”
“태평 씨가 챙겨줄 것 같은데,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챙겨요? 석우 씨도 아니고 태평 선배가요?”
잘못 말한 거 아니냐는 투에, 박 작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눈이 정선우와 그의 좌석 앞에서 낄낄거리는 박태평을 번갈아 쳐다봤다.
“본인 말처럼 잘하는 신인은 아끼잖아요. 제가 보기엔 정선우 매니저가, 태평 씨 마음에 쏙 든 것 같아서요.”
*
스튜디오 촬영이 끝나자마자 민족대이동이 시작됐다.
스텝들과 출연자들 모두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야외촬영을 위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한파, 한파, 하더니 정말 더럽게 춥긴 하다. 한숨을 쉬자 뿌연 김이 흘러나간다. 마치 내 영혼 같다.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찍고 있는 여자 VJ에게 물었다.
“아까 그 흑역사 부분, 편집 안 되겠죠?”
“안 되죠. 제가 담당 피디라도 무조건 쓰죠.”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아까 메인 피디가 입이 귀에 걸린 채 와서는 좋다고 폭풍 격려를 하고 갔으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방송 나간 뒤엔 나한테도 섭외전화가 올 거라나 뭐라나.
벼룩 눈곱만큼도 안 반갑다.
뒤에서 임서영이 내 어깨를 콕콕 찌른다. 귀양 가는 대역죄인, 혹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댕그란 눈을 깜빡거린다. 꼬리가 있었다면 축 처져서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겠지.
넵튠에게 붙은 남자 VJ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광경을 찍었다.
“오빠, 오빠.”
“왜, 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더니 임서영의 낯빛이 밝아진다.
“진짜로, 정말로, 제 주둥이가 미쳤었나 봐요. 상식 퀴즈 없다고 해서 멘붕이던 참에, 이송하 쟤가 너무 잘 맞춰서 우승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니까 마음이 급했어요. 지면 막 큰일 날 것 같더라구요. 으아아, 오빠 괜찮으세요?”
“괜찮지, 그럼.”
“진짜요?”
“어. 카메라 앞에서는.”
“······카메라 없으면요?”
나는 카메라를 힐끔 보고 음산하게 말했다.
“서영아. 만약 내가 설날에 집에 내려갔다가 죽으면 사인은 수치사고, 내 무덤에 꼭 너를 산채로 같이 묻어달라고 할 거야.”
“헉!”
임서영이 팍 쭈그러든다. 영혼이 빠져나가고 종잇장 같은 가죽만 팔랑팔랑 움직이는 느낌이다. 몇 초간 그 모습을 구경하고 난 후에야 움츠린 어깨를 툭 두드렸다.
“농담이니까 목 빼.”
“이번엔 진짜, 진짜죠?”
“너 대신 네 인형만 데려갈게.”
“아, 오빠!”
다시 씩씩해진 임서영이 내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린다.
다른 멤버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들을 하곤 웃고 있다.
슬쩍 VJ들의 표정을 살폈다. 스튜디오에서 시작해서, 이 정도면 임서영 본래 성격이 꽤 드러난 셈이다. 내 눈에는 충분히 호감을 살 만해 보이는데 이게 또 고슴도치 부모 같은 마음일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시선은 어떨까,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다가 쏙 들어갔다.
임서영을 바라보는 VJ들이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보기 좋은 언니, 오빠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때깔 좋은 승합차가 줄줄이 서 있는 방송사 앞 도로변.
우리 팀이 탈 차 앞에는 벌써 선객들이 있다. 장녹수와 김동호가 차 안에서 주고받을 멘트와 리액션까지, 거의 리허설처럼 합을 짜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김동호가 언짢은 눈으로 날 힐끔거린다. 아까부터 저러고 있다. 뭐, 저런 시선이야 넵튠 애들이랑 다니면서 한두 번 받은 게 아니니 별 신경은 안 쓰이는데. 이유를 모르겠네.
내 리액션이 약해서 마음에 안 들었나?
하지만 저 양반의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개그에는 그 리액션이 최선이었다. 출연자들은 물론 MC들까지 몸서리를 치는데 나 혼자 기립박수 하면 그게 더 웃기지 않겠느냐고.
어쨌든 여기서는 내가 막내인 것 같아서 헛기침하고 말을 꺼냈다.
“운전은 제가···.”
“하면 안 되지.”
뒤에서 박태평이 불쑥 튀어나왔다.
“스튜디오에서 룰 들었잖아요. 차에 타자마자 서로 처지가 바뀌는 거라니까. 연예인들은 매니저가, 매니저들은 연예인으로.”
그러면서 우리한테 이름표를 나눠준다. 넵튠 애들이 받은 이름표엔 내 이름이 있고, 반대로 내 이름표에는 애들 네 명의 이름을 갈아 끼울 수 있게 돼 있다.
나 혼자 애들 네 명 흉내를 내란 말이지. 바쁘겠구만.
애들은 어쩌고 있나 봤더니,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 모의 중이다.
박태평이 쭉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정선우 씨랑 김동호 씨는 연예인이니까 탈락, 나는 MC니까 탈락, 남은 사람 중 한 명이 운전대 잡으셔야겠네.”
“어, 저희 차 같이 타고 가세요?”
김동호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묻자, 박태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가는 거, 분량 많이 나올 것 같은 팀에 붙어가려고.”
“감사합니다! 저희가 개그 몇 개 더 준비했는데 한번······!”
“하지 마! 안 그래도 추운데 얼어 죽어!”
버럭 소리친 박태평이 가만히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쪽 팀 말고, 이 팀.”
덧붙인 말에 김동호의 얼굴이 꾸깃꾸깃해진다.
분량 많이 나올 것 같은 팀이라. 무려 까칠하기가 사포 같은 박태평의 평가다. 제작진 반응이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변했을 때부터, 그리고 김현조의 흐뭇한 표정이 짙어졌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한 것 같다.
운전은 장녹수가 맡았다. 선택지가 없었다. 넵튠 애들한테 운전대를 맡길 수는 없었으니까.
임서영이 맨 뒷좌석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린다.
“저도 면허증 있는데. 혹시 이런 일 있을까 봐 땄어요.”
“아냐, 넣어둬. 네건 면허증이 아니라 신분증 대용이야. 네가 운전하면 우리 클로징 장소는 경찰서 아니면 응급실이야.”
애들부터 다 태우고 마지막으로 나도 타려는데, 갑자기 차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박태평이 배를 잡고 웃고 있다. 차 안에 설치한 카메라를 의식한 게 아니라 진짜 폭소였다.
뭔 일인가 싶어 올라탔다가 주르륵 미끄러질 뻔했다.
옹기종기 붙어앉은 애들 표정 때문에.
하나같이 입은 굳게 다물고, 눈에는 힘을 빡 주고 있다. 최선을 다해 오만상을 찌푸린 표정들이다. 박태평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넷이서 그러고 환불받으러 가면 딱 좋겠다고 떠들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뭐해?”
“오빠 표정 흉내 내는데요.”
웃음을 참는지, 임서영이 파르르 입술을 떨며 말했다.
“너희 나한테 뭐 불만 있냐. 내가 언제 그런 표정을 했어?”
“거울 보세요.”
엘제이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참, 하더니 자기가 거울을 보고 씩 웃는 표정을 짓는다.
“거울은 내가 봐야지. 틈틈이 웃는 연습.”
“나도 웃는 연습.”
임서영이 신나서 합세한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는데, 이태희가 나한테 핸드폰을 들이댄다.
“이건 찍어야 돼.”
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눈이 웃고 있다.
더 신난 임서영이 훈수를 둔다.
“언니, 사진 잘 나오게 찍으면 안 돼. 오빠 맨날 우리 사진 발로 찍잖아.”
그만해, 이것들아!
말이 목까지 찼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한숨이다. 혀를 내두르며 차에 올라탔다. 박태평은 오만상을 한 애들 사이에 끼어든 나를 보고 더 크게 웃는다. 저 양반 저러다가 토하겠다.
그때 뒷좌석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엔 다행히 이송하다. 또 뭔가, 하고 긴장하던 것을 풀었을 때.
이송하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했다.
“차에 타면 안전벨트부터 매야지.”
그 뒤론 개판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그 뒤로 촬영을 계속하는 동안 애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내 흉내를 냈고, 나도 영혼을 담은 4중 인격 연기로 보답했다.
그건 뭐랄까. 이쪽에서 폭탄을 던지면 저쪽에서 미사일을 쏘고, 이쪽에서 다시 핵을 발사하는 것 같았달까. 결과적으로 양쪽 다 풍비박산이 났다는 소리지.
너무 개판이라 이거 방송 괜찮겠나 했는데, 사람들 반응은 좋았다. 나를 따라다니던 여자 VJ는 연신 버릴 게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래, 방송만 재밌게 잘 빠진다면, 그래서 넵튠의 공중파 입성이 성공을 거둔다면 목적은 이룬 셈이니까.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린 내 이미지야, 뭐. 늘 그랬듯이 잠깐 떠들썩하다가 얼마 안 가 조용해지겠지. 그럴 거다. 꼭 그래야 할 텐데.
어쨌든 녹화가 끝나고 우리한테 남은 건, 제작진의 따듯한 미소.
본인이 하는 주말 예능에 꽂아 주겠으니 나도 꼭 같이 나오라는 박태평의 공수표.
그리고 이불 속에서 하이킥 좀 해야 할 기억들이었다.
아, 참. 하나 더.
우승상품인 최고급 한우 세트는 우리가 탔다.
역대급 흑역사로 남을 것 같은 예능녹화를 끝내고 며칠 뒤.
예능 출연의 보상으로,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이제는 용과 인어공주와 동급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날. 잊어먹고 기다려야 찾아오는 그 날. 그나마도 몇 번이나 신기루처럼 사라져서 분통 터지게 했던 그 날.
휴일이다.
오늘을 위해 이틀 전부터 완벽한 계획을 세워놨다.
제일 먼저 조조 영화를 보고 영화관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는다.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연달아 본 다음에 다시 저녁 식사와 커피 한잔으로 컨디션을 회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기대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관람할 예정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뻐근할 정도로 행복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팝콘과 커피를 샀다. 그리고 커플이나 친구들끼리 온 쌍쌍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래 혼자 즐기는 영화가 최고지. 그렇고말고.
사실은 하루에 영화 네 편을 같이 달려줄 친구가 없다.
“티켓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관 직원의 기본멘트가 천사의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모바일 티켓을 보여줬다. 시간대별로 영화 티켓이 네 개나 있는 걸 확인한 직원이 나를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경쾌한 걸음으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스크린에서는 한창 이동통신사 광고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내 영혼의 보금자리 같은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할까, 진동으로 할까. 김현조가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하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쉬라고 장담했지만······ 이놈의 매니저 생활이 워낙에 피치 못할 일이 많아야지.
무음으로 해놓으면 오히려 연락 왔을까 봐 신경 쓰느라 집중이 안 될 것 같다. 제일 작은 진동으로 하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진동이 울렸다.
왠지 확인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냐, 세상이 나한테 그렇게 잔인할 리가 없어.
스팸 전화이기를 바라며 노려보듯이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02로 시작하는 앞번호를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는데, 젠장. 가운데 번호가 익숙하다. 어느 팀인지는 몰라도 회사 번호였다.
“여보세요?”
몇 초간 고민하다가, 문 쪽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귀에 익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선우 매니저님 맞으시죠? 휴일인데 정말 죄송해요.
1분 안에 사소한 용건만 말하고 끊어주면 된다.
“무슨 일이세요? 넵튠한테 뭔가···.”
-아뇨, 넵튠 일은 아니구요. 여기 2팀인데, 오늘 다른 스케줄 땜빵 좀 급하게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3팀 쪽에는 저희 팀장님께서 따로 얘기하신다고, 곧장 픽업하러 가면 된다고 하시거든요.
어쩐지 예감이 안 좋더라니.
당장 ‘지지직, 지지직, 잘 안 들리네요.’ 같은 말이라도 날리며 전화를 끊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회사에 직원이 몇 명인데 모처럼 휴일인 사람한테 스케줄을 떠넘기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일단 김현조한테 전화해서 무슨 상황인지 물어······.
-자세한 사항은 조 실장님이 다시 연락해서 말씀하실 거예요.
잠깐, 누구? 조 실장?
나는 막 공포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기분 상태로 되물었다.
“······그 땜빵 스케줄이, 누구 스케줄인데요?”
-손채영 씨요.
< 스타 매니저 (4)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