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76화 (76/218)

< 여러모로 역대급 드라마 (5) >

“……!”

살벌한 소리가 났다.

나름 피하려고 시도한 모양이었지만, 눈사람 머리통은 정확하게 손채영의 머리통을 들이받았다.

아주 제대로다. 집에 고만고만한 애가 넷이면 눈싸움쯤은 이골이 나는데, 저 정도 작품은 나도 처음이다.

손채영의 이마 위에 뭉개진 눈이 달라붙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안면 근육이 일그러질 때마다 눈 부스러기들이 후두둑 추락했다.

“내가 던지지 말라고 했지. 너 내가 우습니?”

손채영이 이마를 느릿하게 닦았다.

두 번째라, 비명도 못 지르고 한참 굳어있었던 지난번보다는 반응이 빠르다.

분위기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상찮았다.

“……송하야, 이리 와.”

뒷수습할 생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긴 했지만, 당장 내 눈앞에서 손채영이 이송하 머리채 잡는 꼴은 못 보겠다.

이송하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눈덩이를 얼마나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 손이 얼음장이다.

손채영이 다시 이송하를 보며 말했다.

“지난번엔 그래, 저 사람은 맞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먼저 손 올렸다고 쳐. 그런데 지금은 뭐야. 까마득한 선배 얼굴에 다짜고짜 눈덩이를 집어 던져? 너 내 인내심 시험하니?”

댁 인내심은 시험까지 할 필요도 없어.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송하가 내 몫까지 들이받았으니 나는 수습을 해야지. 힐끔 보니 손채영 턱으로 눈 녹은 물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다.

내키진 않지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런데 그걸 보자마자 이송하가 손을 척 내민다. 눈덩이를 쥐고 있느라 물기에 젖은 손을.

저요, 저요, 저한테 주세요, 라고 말하는 눈빛이다.

결국에 손수건은 이송하 손에 들어갔다.

손채영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내가 본부장님이나 대표님한테 한마디 하면 일 커지는 건 시간문제……!”

“하세요. 그럼 저도 할 거예요.”

이송하가 대꾸했다.

“뭐?”

“저도 그쪽이 저한테 무슨 짓 했는지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다닐지도 몰라요.”

손채영만 눈이 돌아간 게 아니었다. 이송하가 한술 더 떴다.

잠깐 멈칫했던 손채영이 무시무시하게 노려봤다.

“너 지금 나랑 진흙탕에서 개싸움 한번 해보자는 거야?”

“저번에도, 이번에도, 시작은 그쪽이 먼저 했어요.”

“얘길 하고 다녀? 해 봐, 난 모르는 일이라고 할 거야. 이거 사건 터지면 회사에서 보도자료를 내 편에서 쓸 것 같니, 네 편에서 쓸 것 같니?”

“그건 두고 봐야 알죠. 저는 아직 계약기간도 많이 남았고.”

“이게 진짜, 따박따박!”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눈덩이를 열댓 번씩은 주고받았다. 바닥은 이미 진흙탕이다.

뒷일을 생각하면 일찌감치 이송하를 말렸어야 하는 게 맞는데, 이런 경우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더럽고 치사해도 그게 맞는데.

왜 나는 이 와중에 이송하가 대견한 거지.

천하의 손채영을 앞에 놓고 한마디를 안 지잖아. 장족의 발전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건가?

이송하의 말이 먹히긴 먹힌 건지 손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말을 바꾼다. 말투가 한층 여유로워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야? 네 매니저 뺏길까 봐? 그런데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봐. 너랑 일하는 거랑 나랑 일하는 거. 뭐가 저 사람 앞길에 이득이겠어?”

“그건…….”

이송하가 나를 곁눈질한다. 놓을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도 붙들고 있는 손안에서, 작은 손이 움직인다. 반대로 이송하가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꼴값들 떨고 있네.”

비웃음을 던진 손채영이 이번엔 나를 돌아봤다.

“이제 대답해봐요. 소속 바꾸는 거, 동의하죠?”

“아뇨.”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손채영이 알고 보니 28년 전에 잃어버린 내 친동생이더라, 하는 정도의 반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젠장, 그건 너무 막장이다. 저런 우환덩어리를.

내 즉답에 이송하와 손채영의 표정이 동시에 바뀌었다.

손채영이 놀라는 것보다 이송하가 놀라는 게 더 기막히다. 설마 내가 저 헛소리에 동의하기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이야?

황당한 얼굴로 손채영이 물었다.

“……싫다구요?”

“네.”

“이게 왜 싫어?! 진심이에요?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정신 잘 있구요.”

“그럼 다시 생각해봐요. 내가 한 번 더 기다려 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전 손채영 씨 팀으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팀에서 충분히 만족하면서, 아주 즐겁게 일하고 있어서요. 제 앞길은 지금도 꽃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정확하게는 아직 꽃씨만 뿌려놓은 길이고, 그 길에 배신자라던가 손채영, 또는 손채영, 그리고 손채영 같은 똥 덩어리가 있긴 하지만. 까짓거 잘 피해 가면 되지.

손채영은 괴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더니 곧 싸늘한 시선을 쏘아 보낸다. 다른 건 몰라도 빳빳하던 자존심이 팍 구겨졌다는 건 명확했다.

“그 소꿉놀이, 얼마나 갈지 궁금하네.”

의미심장한 투로 빈정거리더니 문을 쾅 열고 나가버린다.

나는 참았던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굴렸다. 폭풍이 지나갔으니 뒷수습을 생각해야지.

지난번에 케이크 집어 던졌을 때도 별다른 후폭풍은 없었고. 이번에도 할 말 많은 당사자인 이송하가 죽어도 나 혼자는 안 죽는다는 식으로 나갔으니까, 손채영이 대놓고 해코지해올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김현조랑 3팀장한테 상황전달은 해야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채영이니까.

그건 그렇고.

“송하야, 이제 이것 좀 놔봐. 쥐나겠다.”

농담을 섞어 말했는데도 이송하는 여전히 내 손을 움켜쥐고 있다. 표정도 어두컴컴하니 먹구름이 껴서는, 저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떠다니는지 이제 안 봐도 짐작이 간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움직인다.

“저도 빨리 저만큼 성공할 거예요.”

“뭐?”

“……힘없으면 뺏기는 거잖아요.”

평소 담담하기만 하던 목소리에, 지금은 초조함과 어설픈 독기가 묻어난다. 빈손으로 이송하의 가느다란 어깨를 두드렸다.

“뺏기긴 뭘 뺏겨, 내가 물건이야?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치고받고 해서 정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런 일이 동기부여가 되는 건 좋은데, 혹시라도 불안하거나 조급해하지는 말고. 그럴 필요 없어.”

좀 간지러운 말이지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송하의 표정에서 독기가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나는 놓치지 않고 헛기침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참, 아까 그 눈사람 머리통은…….”

“오다가 구한 거예요. 지난번에 케이크 던진 건 너무 아까웠어요.”

“어, 그래. 좋은 선택이긴 했는데 다음부턴 뭔가 던져야겠다는 충동이 들 때는 꼭 나랑 먼저 상의 좀 하자.”

“네.”

평소처럼 이송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내 손을 붙들었던 힘도 풀어진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아까부터 벗어둔 겉옷을 내밀었다.

“일단 옷부터 좀 걸쳐봐. 다 얼어가지고 동태가 따로 없네. 누구한테 어떻게 얘길 들었길래 이 꼴을 하고 뛰어왔어. 다른 애들이 말리지도 않든?”

“몰래 나왔어요. 들어가면 잔소리 엄청나게 들을 거예요.”

“잔소리 들어야지. 그래도 내가 옆에서 같이 변명해줄게.”

이송하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

매끈한 익스프레스 밴이 눈길을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로드 매니저와 조 실장은 틈틈이 뒷좌석의 손채영을 곁눈질했다. 요즘 손채영의 기분이야 늘 눈비, 또는 흐림이긴 했지만 오늘은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오빠.”

“어, 어? 왜?”

“나 회사 나가는 건 어떨까?”

손채영이 시큰둥하게 던진 말에 조 실장이 홱 뒤돌았다.

“뭐?! 그게 무슨, 독립한단 소리야? 아니면 전속 계약하자고 접촉해온 데 있어? 어딘데?!”

“내가 나가면 오빤 나 따라올 거야?”

“……어?”

쏟아지던 질문이 덜컥 멈추었다. 조 실장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그가 손채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러니까…… 쉽게 결정할 문제 아닌 건 알지? 이 바닥 좁잖아. 채영이 너는 괜찮지만 나는 잘못하면 그림이 안 좋게 보일 수가 있어. 너도 알잖아, 잘못 찍히면 이 바닥에서 크기 힘든 거. 일단 여기서 좀 더 큰 다음에…….”

“됐어, 그냥 해본 소리야.”

손채영이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대화가 끊어졌지만 조 실장은 불안한 눈으로 뒤쪽을 곁눈질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손채영의 표정은 오히려 우중충하던 조금 전보다 더 개어있었다.

조 실장이 안심했을 때, 손채영이 여상하게 말했다.

“이송하 매니저 말이야.”

“정선우? 그 자식은 왜.”

“그 사람 내가 뺏어오고 싶은데, 방법 좀 찾아봐.”

*

이송하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전전긍긍 기다리던 넵튠 멤버들이 도끼눈을 하고 반겼다. 둘러싸여서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이송하가 풀려난 후에도 내 차례는 끝나지 않았다.

애들이, 개중에서도 특히 임서영이 날 불안 불안하게 보길래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야 했다.

“별일 없을 거라니까. 이제 좀 믿어라.”

“물론 오빠는 믿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신입사원은 지렁이 같은 존재잖아요! 위에서 밟으면 죽는단 말이에요!”

임서영이 털 슬리퍼를 짓밟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염려해주는 건 고마운데 지렁이는 좀 심하잖아.

“회사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봤어.”

“다녀봐야 아나? 인터넷에 다 나와요.”

“넌 그놈의 인터넷부터 끊어.”

그러다가 문득,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던 소식이 떠올랐다.

“참, 우리 공중파 예능 잡혔어.”

소리가 싹 사라졌다.

임서영도, 감기 예방용 생강차를 대접에 따라 마시고 있는 이송하도. 어떻게 하면 손채영한테 엿을 먹일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엘제이와 그 옆에서 훈수를 두던 이태희까지. 다들 우뚝 멈춘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IBC 설 특집 예능이야. 박 팀장님이 픽스됐대.”

“지, 진짜요?! IBC? 공중파요? 우리 다 나가는 거예요?!”

“어. 다 나가. 매니저랑 동반출연이라 나도 나가.”

임서영의 비명을 시작으로, 숙소가 뒤집어졌다.

고작 일주일, 그 안에도 변화는 확실하게 일어났다.

이제 인터넷 포털에 고양이 수호령을 검색하면 역대급 드라마라는 기사 헤드라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역대급이긴 하지. 최고시청률 15프로를 넘었으니까.

애초 우리 경쟁 상대로 거론됐던 동시간대 GTBN 신작드라마가 1프로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역대급이라는 말도 전혀 과분한 말이 아니었다.

아, 역대급 드라마가 하나 더 있긴 하지.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원작 팬들의 공분을 사서 시청률이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으니, 그것도 역대급은 역대급이다. 슬슬 관계자들도 수군대고 있다. 저건 역대급 망작이 될 거라고.

어쨌든 지금 고양이 수호령에 비견될 만큼 잘나가는 드라마는 IBC의 타입슬립뿐이다. 시청률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고. 다른 사람들은 애가 타는 모양이지만, 나야 뭐.

그쪽 동네야 한창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중일 텐데.

그쪽 폭탄까지 터지고 나면 이젠 경쟁 상대도 없다.

올해 1분기 최고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고양이 수호령이다.

그렇게 후끈후끈한 분위기가 연일 이어지던 어느 날. IBC 설 특집 예능프로그램 ‘스타 매니저’의 녹화 날이 밝았다.

*

IBC 방송국 지하 A 스튜디오.

오프닝을 3시간 앞두고 수십 명의 스텝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산더미 같은 장비를 점검하는 촬영팀. 겉옷도 벗어 던지고 짐을 나르는 진행팀. 스튜디오 내부는 땀과 열기로 계절을 잊을 정도였지만, 그 시각 바깥에는 한파가 들이닥쳤다.

인터컴을 찬 제작진이 벌떼처럼 떠들었다.

“선배님, 야외장소 섭외한 거 실내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밖에 영하 14도래요! 연예인 한두 명도 아니고 무더긴데, 카메라 꺼지면 그 지랄을 어떻게 감당해요?!”

“오늘 아주 헬게이트 열리겠네. 빨리 장소 다시 섭외하고, 협찬 차량은 아직 도착 안 했어?!”

“오프닝 전까진 무조건 도착한대요!”

“이러다 출발시각 딜레이되면 뒤로 줄줄이 터진다고, 책임질 자신 있으면 늦으라고 해! 출연자들은 체크하고 있지?”

“네, 30분마다 한 번씩 전화해서 쪼고 있어요!”

정신없는 스튜디오 한쪽.

특별팀의 작가들 몇 명이 촬영구성안을 뒤적이며 떠들었다.

“……그리고 넵튠, 넵튠은 은서가 붙기로 했지?”

“네.”

“거기는 신인이니까 핸들링은 잘 되겠네.”

메인 작가의 말에 기웃기웃 현장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피던 신 차장이 끼어들었다.

“핸들링보다는 방송분량이 문제지. 거기 매니저 캐릭터가 좀 쓸만하다고 해서 오케이는 했는데, 영 걱정이구만. 걔들 바짝 얼어서 말 한마디 못하면 품만 들고 통편집이야.”

“그래도 통편집은 안 될걸요? 대박 소스가 있어서.”

메인 작가의 말에 신 차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박 소스?”

“넵튠에 이송하가 지금 핫하잖아요.”

“그렇지, 걔 연기 기가 차게 하던데.”

“지금이야 증명됐지만,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연기력 논란이니 끼워팔기니 난리 났었잖아요. 오늘 나와서 그 뒷얘기 좀 풀어주기로 했거든요.”

“그래? 재밌어?”

“재밌어요. 우리 방송 컨셉에도 맞고.”

메인 작가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 팀 매니저 얘기가 제일 재밌더라구요.”

< 여러모로 역대급 드라마 (5)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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