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모로 역대급 드라마 (4) >
이송하한테 온 광고가 원래 손채영이 찍던 거란 말이지.
저절로 입 끝이 찢어진다. 그것참 커피로 골든벨이라도 울리고 싶은 희소식이다. 연예인에게 광고를 뺏긴다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일 테니까. 그것도 까마득히 아래에 있던 이송하한테 뺏겼으니, 기고만장하던 그 콧대도 좀 내려갔을까.
어쨌든 손채영을 보러 갈까 하던 마음은 싹 접었다. 목에서 불덩어리를 토하며 노발대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굳이 내 발로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불똥에 얻어맞을 필요는 없지.
“피난 올 만했네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비슷한 처진데 우산이라도 나눠 써야지.”
박 팀장이 짓궂게 덧붙였다.
“정 고마우면 조각 케이크나 하나 쏘든가.”
“잠깐만요. 저도 갑자기 티라미수 케이크가 땡기네요.”
웃으며 일어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여보세…….”
-지금 어디예요? 나랑 얘기 좀 해요.
아까 식도로 내려간 커피가 도로 역류할 뻔했다.
당연히 자기가 누군지 알 거라고 확신하는 듯, 본인 소개도 없이 쏘아지는 목소리. 내가 얘기를 해야겠으니 너는 당장 알았다고 대답하라는 듯한 말투.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얼굴이 번쩍 떠올랐다.
그런데 뭐지. 나한테 전화할 이유가 없는데?
정상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슨 생각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뭐야, 이 사람 왜 대답이 없어? 이 번호 확실해요?!
목소리가 확 끓어오른다. 옆에 누군가 함께 있는지, 그 번호가 맞다고 확인해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처하고 당황한 기색이 드러난 남자의 목소리. 희미하게 들리긴 하지만 틀림없이 배신자다.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세상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실장님!”
미래다. 시야에 노이즈가 보이자마자 온갖 생각으로 복잡하던 머리를 싹 비웠다. 지금만큼은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되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죄다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다행이다. 실장님, 통화 끝나셨어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청년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반소매 차림. 바지도 소재가 얇다. 여름인가?
낯선 사람, 낯선 장소다. 건물 내부의 복도라는 것만 짐작 가능한.
“지금 정 실장님 찾고 난리 났어요!”
귀가 번쩍 뜨였다.
정 실장님? 실장님이라는 게 나를 부른 거였어?
“왜, 또?”
내가, 그러니까 미래의 내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낯선 청년이 우물쭈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벼락 떨어질까 봐 도망치듯이 나와서 자세한 건 잘…… 저번에 팀장님이 저한테 그러셨거든요. 분위기 심상찮으면 절대 혼자 어떻게 해볼 생각 하지 말고 무조건 정 실장님한테 맡기라고.”
“내 참, 내가 무슨 베이비시터야?”
“죄송합니다. 저는 진짜 간이 떨려서. 다른 분들 말씀이, 정 실장님이랑 같이 일하고 난 뒤로는 그래도 많이 사람 된 거, 아니, 많이 변하신 거라고 하시던데 그럼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하셨다는…….”
“사람 되긴 개뿔. 걔만큼 한결같기도 힘들 거다.”
뭔가 대화내용이 좀 싸한데.
미래의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청년이 실장님, 실장님 노래를 부르면서 졸졸 쫓아왔다. 들을수록 기분이 묘하다. 내가 신입 매니저 딱지를 떼고 실장 직함을 달았단 말이지.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물론 일을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당연히 마주할 미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막연했는데. 내가 꿈꾸는 위치로 한 걸음 다가선 것 같아서 솔직히 기분이 들떴다.
지금이 언제쯤일까?
입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당장 몇 년도인지부터 물어봤을 텐데.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길 바라며 보이는 것에 최대한 집중했다.
도착한 곳은 놀이방이었다. 정말 뜬금없지만, 확실하다. 알록달록한 볼 풀이랑 완만한 미끄럼틀. 네쌍둥이 덕분에 신물 나게 본 것들이다.
그리고 여자.
긴 머리를 느슨하게 땋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기저귀만 달랑 찬 어린애를 어설픈 자세로 들고 흔들고 있다.
누구지?
생각하자마자 여자가 뒤돌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얘 좀 가져가 봐. 울잖아!”
“무슨 큰일 났나 했더니만. 애는 원래 울어.”
“아까 네가 안고 있을 땐 안 울었잖아!”
“너랑 나랑 같냐, 내가 업어 키운 애가 몇 명인데. 그리고 얘도 눈이 있는데 네가 그런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면 안 울고 배기겠어? 경기 안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얘는 장군감이야. 나중에 큰일 하겠다.”
“야!”
생각이 삐걱거린다. 내가 지금 충격을 받을 타이밍인 건 확실한데, 어디서부터 충격을 받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이제 막 갓난아이티를 벗은 아기를 안은 여자가 나한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묻고 있고, 그 여자가 손채영이니까.
손채영이라고.
누가 내 뒤통수에 말뚝을 대고 망치질하는 느낌이다.
내 영혼이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말거나, 미래의 나는 한숨을 쉬며 손채영한테서 아기를 건네받는다. 그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칭얼거리는 아기를 어르면서 말했다.
“애가 울면 애 엄마를 찾아야지 날 찾으면 어떡해?”
애 엄마가 따로 있구나. 그 와중에도 안도했다. 하마터면 더 끔찍한 상상을 할 뻔했다.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르는, 그런 끔찍한 상상.
“몰라, 애를 세트장에다가 내팽개치고 어딜 갔는지 아까부터 안 보여.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부모라는 사람이 하는 거 보니 앞으로도 뻔한…….”
불평하던 손채영이 갑자기 빽 소리친다.
“그런데 뭐, 좀 찾으면 안 돼?! 네가 내 매니저잖아!”
-여보세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속에 처박혀있다가 밖으로 확 끄집어내진 것처럼. 눈앞에는 박 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앉아있고,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 너머에서는 목소리가 쉬지도 않고 쏘아진다. 조금 전과 똑같은 목소리다.
-전화가 먹통이잖아요!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번호 다시 확인해봐요. 그쪽 눈이 삐었거나 이 사람 귀가 먹었거나 둘 중 하나니까!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무심결에 손가락이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자기, 그거 손채영 목소리 아냐? 맞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걔가 왜 자기한테 전화를…… 근데 그거, 그냥 끊어버린 거야?”
“너무 놀라서요.”
“그래, 이해는 간다. 숨 쉬어, 숨. 세상에, 얼마나 징글징글했으면 전화 한 통 받았다고 얼굴이 악몽 꾼 사람처럼 새파래져?”
악몽이랑 비슷하긴 했지. 아니, 더 질이 나쁘다. 이건 미래니까.
맙소사, 미래라고.
일단 진정하자. 그래, 미래이긴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왕좌왕하기보단 재빠른 상황판단과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라마즈 호흡을 몇 번 하다가 때려치웠다. 젠장, 뱃속에 사리가 한 바가지쯤 있을 스님도 이 상황에선 진정 못 할걸!
급한 대로 커피를 원샷하고 더듬더듬 기억을 되새겼다.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먼 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실장으로 올라간 건 분명하다. 그리고 손채영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
너무 단편적이라 손채영만인지, 손채영을 포함한 여러 명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어느 쪽이든 충격과 공포다.
내가 왜, 대체 어쩌다가 손채영 매니저가 된 거지?
인생이 어디서부터 얼마나 꼬이면 그런 미래가 오는 거야?!
그때 다시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했다. 조금 전 것과 똑같은 번호다.
이번에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정선웁니다.”
-뭐야, 이제 들려요? 매니저라는 사람이 통화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되겠어요? 나 그런 거 딱 질색이에요. 그쪽 핸드폰 거지 같으니까 좀 바꿔요. 그리고 나랑 얘기 좀 해요.
“……얘기요?”
욕이 아니라?
“우리가 얘기할 게 있습니까?”
-생겼어요.
손채영이 곧바로 말했다.
-내가 대표님한테 그쪽을 나한테 붙여달라고 했으니까.
뭘 어쨌다고?!
기함해서 한달음에 회사로 돌아왔다.
그새 말이 퍼졌는지 직원 몇 명이 아는 척을 한다. 손채영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나를 짠하게 쳐다봤고, 모르는 사람은 나더러 인복이 터졌다는 둥 헛소리를 했다.
인복이 터져? 복장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불도 켜지 않은 밀폐된 회의실에서 손채영과 맞대면했다.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수작이지?
아까 무시무시한 미래를 본 게 혹시 이 일 때문인가?
하지만 이것 때문이든, 아니든, 도통 이해가 안 간다. 망할 놈의 회사를 때려치웠으면 때려치웠지 내가 왜 저 여자 매니저를 하느냐고. 천지개벽할 일이 없고서야.
꼬리를 무는 의문을 잠깐 멈춰놓고 물었다.
“대표님한테 뭘 어디다가 붙여달라고 하셨다구요?”
“그쪽을, 나한테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흡족하다는 듯, 손채영은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로 나를 쳐다봤다. 눈앞에 케이크가 있었다면 이번엔 내가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요?”
“이유가 뭐 중요해요? 내가 그쪽이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한 게 중요하지. 신인 데리고 몇 달쯤 일했으면 이 바닥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지 알 만큼 알았을 텐데.”
팔짱을 낀 손채영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쪽 완전 초짜일 때, 뭐 지금도 초짜지만, 성도원 깠었다면서요. 솔직히 말해봐요, 후회했죠?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그런 횡재를 걷어찼으니 후회도 어마어마했을 텐데. 그러니까 이번엔 기회 잡으라구요. 나랑 일하면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무시당할 일 없어요.”
밖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대신 댁 옆에서 말라죽겠지.
잠자코 듣고 있었더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다.
생각해보면 손채영의 속내야 뻔하다. 느닷없이 원수와 동고동락하고 싶은 괴상한 취향에 눈을 뜬 게 아니라면, 나를 제 옆에 붙여놓고 사사건건 트집 잡으면서 엿 먹이려는 거겠지.
이송하한테 광고를 뺏겼으니 어디 너도 뭐 하나 뺏겨봐라, 같은 유치찬란한 심리일 가능성도 높고.
젠장.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네.
왜 나를 가지고 야단이야. 내가 무슨 춘향이야?!
“그래서 대표님께서는 뭐라고…….”
“아, 옮겨준다고 했어요.”
심장이 덜컥했다. 호흡곤란에 빠지기 전에 손채영이 덧붙였다.
“그쪽만 동의하면.”
뻣뻣하게 굳어있던 목이 풀렸다.
최악의 경우는 아니구나. 그렇지. 백한성 대표랑 나 사이에 오간 얘기가 있는데. 설마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채영한테 갖다 붙이지는 않겠지. 그럼 정말 사람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 선택권을 미뤘다는 건, 면전에서 손채영을 까도 된다는 소린가?
“그러니까 얼른 동의해요.”
“……제가 왜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저 여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왜냐니, 지금 그쪽을 키워주겠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교만하게 빛났다. 손채영이 손가락으로 나와 자기를 번갈아 가리킨다.
“다시 말해줘요? 내가, 그쪽을 키워주겠다구요. 그러니까 어린애 데리고 소꿉장난하지 말고 내가 오랄 때 오라구요.”
얼씨구.
마치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저는 제가 알아서 크겠습니다.”
“나 참, 이송하 걔가 요즘 승승장구하니까 헷갈리나 본데, 드라마빨 거품 빠지는 건 순식간이에요. 내가 있는 데까지 올라오는 게 어디 쉬울 줄 알아요? 어느 쪽 줄을 잡아야 빨리 성공할지 판단이 안 돼요? 앞으로 배울 게 많겠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손채영은 저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채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뭐, 혹시 내 드라마 망할 것 같아서 그게 걱정돼요? 드라마 아직 안 끝났어요. 그리고 나 손채영이에요. 드라마 하나 휘청하고, 광고하나 떨어져 나간다고 내가 눈이라도 깜짝할 것 같아요?”
이미 깜짝, 그 이상을 한 것 같은데.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어서 막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북풍한설이 불어닥쳤다.
돌아봤다가 흠칫 놀랐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이송하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카락에는 바스러진 눈꽃이 매달려있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깡깡 얼어붙었다.
맙소사.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외투도 없이 실내복 차림이다. 발에는 신발 대신 토끼 모양 털 슬리퍼를 신고 있다.
“송하야, 너 지금 숙소에서부터 그러고 온 거야?!”
일단 내 겉옷이라도 벗어서 주려고 옷을 벗는데, 이송하가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쭉 훑어본다. 어디 잘못된 곳은 없나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곤 성큼성큼 손채영 앞으로 다가간다.
눈에 서슬이 퍼렇다. 당장 ‘암행어사 출두야’ 따위를 외치면서 마패를 투척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송하의 손에는 마패 대신 다른 게 들려있다.
주먹만 한 눈덩이. 작은 허브 잎사귀 두 장이 눈처럼 박힌.
테라스 창가에 누군가가 조그맣게 눈사람 만들어놓은 걸 봤는데, 그 머리통을 뜯어온 게 분명했다. 지난 티라미수 케이크 사건을 떠올려봤을 때 저 눈사람 머리통을 왜 조달해왔는지, 그 용도는 안 봐도 알겠다.
쌍심지를 켜고 일어나던 손채영이 주춤했다.
“야! 너, 너 그거 던지기만 해! 그거 던지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송하가 눈덩이를 집어 던졌다.
< 여러모로 역대급 드라마 (4)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