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8화 (68/218)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6) >

1화 평균 7.9프로. 최고 시청률 8.3프로.

2화 평균 8.2프로. 최고 시청률 9.1프로.

고작 숫자 몇 개다.

하지만 이 숫자가 불러온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돌풍, 아니 폭풍 수준이다. 주말 동안 만난 모든 사람이 축하한다며 내 발걸음을 잡아 세웠다. 문자 메시지도 백통 가까이 들어왔다. 일일이 답장하다가 지문이 닳는 줄 알았지.

그래도 전혀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보약이 따로 없다.

축하를 받을 때마다 그간 고생 했던 걸 보답 받는 것 같아서. 발이 땅에 붙어있질 않고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을 때도 많았다.

반면에,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다.

몇 번이나 인사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 내가 내민 넵튠의 앨범 CD를 건성으로 던져놓던 사람, 이송하의 끼워팔기 논란이 터졌을 때 들으라는 듯이 비아냥거렸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기름칠이 잔뜩 된 문자를 보냈으니까.

아무리 이 바닥이 시청률이 전부고 인기가 전부라지만, 태세전환이 너무 속보이잖아.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기가 막힌 건 고준태 피디다.

번드르르한 축하 문자를 날리더니 갑자기 얘기 좀 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지금 그 양반을 만나러 Knet 방송사 근처 커피숍에 와 있다.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서다가 멈칫했다.

데스크 왼쪽에 익숙한 포스터가 붙어있다. 고양이 수호령 단체 포스터. 이 커피숍이 TVL, Knet과 같은 기업 계열사라 붙여놨나 보다.

화려한 면면들 사이에서도 이송하 얼굴만 보인다.

흐뭇한 얼굴로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 장 드릴까요?”

돌아보니 점원이 커피를 내민다. 그리고 다 안다는 듯이 웃는다.

“계속 이송하 쳐다보시길래. 이거 붙여놓은 뒤로 포스터 한 장 받아갈 수 있느냐고 물어본 손님들 꽤 계셨거든요.”

“그래요?”

“원래는 안 되는데, 지금은 다른 손님이 안 계셔서 빼 드릴 수 있어요. 저도 이송하 때문에 집에 한 장 갖다놨거든요. 누가 찍었는지 진짜 환상적으로 나왔죠. 봐도 봐도 눈이 즐겁더라구요.”

수다스럽게 떠드는 점원에게 말했다.

“저거 사진빨 아니에요. 아는 사람이 봤는데 실물이 훨씬 낫대요.”

“진짜요? 저거보다 더 예쁘다구요?”

“그래서 저거 찍은 사진작가도 아쉬워했다던데요.”

모르는 척 이송하 자랑을 좀 하고, 포스터도 받았다. 이미 집에 있긴 하지만 다다익선이니까.

소파에 앉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섭외전화라 얼른 수첩과 펜을 꺼냈다. 드라마가 잘 되니까 섭외전화도 확 늘어났다. 굵직굵직한 건 아니고, 이송하를 중심으로 다른 멤버들이 꼽사리로 들어가는 형태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몇 달 전과 비교하면 기쁨의 훌라댄스를 춰야 할만한 발전이다.

“네. 스케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작가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데, 맞은 편 소파가 움직인다.

평소보다 말끔한 모습의 고준태 피디가 눈인사하며 앉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내 수첩을 힐끔거리며 묻는다.

“송하 씨 찾는 데가 많은가 봐요? 하긴, 드라마 시청률이 8프로가 넘었으니까…… 역대 케이블 드라마 최고 시청률 4위라면서요. TVL 드라마국은 지금 축제 분위기라던데. 송하 씨랑 우리가 남도 아니고 해서, 넥스트 K스타 대표로 축하해주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요.”

입으로는 축하를 던지지만, 표정은 떨떠름하다.

하긴, 속이 꽤 쓰릴 거다.

넥스트 K스타도 매주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는 인기 프로긴 하지만 아직 8프로를 넘어선 적은 없으니까. 8프로 넘길 거라고 눈에 불을 켜던데. 고양이 수호령은 고작 2회 만에 그걸 넘어버렸으니.

시청자 반응과 체감 인기를 봤을 때, 더 오를 전망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좋아서, 앞으로도 기대 중입니다. 시청률공약도 8, 9프로가 아니라 10프로로 다시 얘기 중이구요.”

“10프로?!”

고준태 피디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순간 최고 시청률은 9프로 넘었으니까요. 이 상태로 가면 10프로도 불가능한 건 아니겠다 싶어서요.”

내 말에 고준태 피디가 똥 씹은 표정을 한다. 그럴수록 내 입가에는 미소가 깊어졌다. 저 양반을 앞에 두고 이렇게 속이 편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여유롭게 커피를 음미하는데, 고준태 피디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말한다.

“저, 그래서 우리 제작진이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네.”

“물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고양이 수호령도 지금 홍보 좀 때려주면 더 탄력받을 텐데. 우리 마지막 미션으로 공개 콘서트 할 때 서지준 씨가 특별출연 한번 하면 어때요?”

그렇지. 축하는 무슨. 이 얘기 나올 줄 알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보다는 홍보팀이나 이봉준 실장님께 연락드리시는 편이…….”

물론 단번에 까이겠지만.

다른 피디의 섭외도 거절하는 중이라던데 고준태 피디라면 말할 것도 없다. 박 팀장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까. 나도 언젠가 기필코 고준태 피디에게 엿을 주고야 말겠다고 벼르는 중이지만, 박 팀장도 만만치 않거든.

고준태 피디가 입맛을 다신다.

“이미 다른 데서 연락했었다는데, 잘 안됐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서지준 씨가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해서 그럴 겁니다. 회사에서도 배우 의견을 최대한 들어주려고 하는 상황이라.”

내 말에 고준태 피디의 목소리가 은근해진다.

“선우 씨가, 서지준 담당하는 이 실장이랑 친하다고 그러던데.”

얼씨구.

“이 실장 통해서 부탁해 보면 서지준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어요? 소속사 후배 응원차 얼굴 한번 비추는 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내가 편집은 정말, 끝내주게 해줄 테니까.”

그 편집질로 이송하 이미지를 끝내버릴 뻔했잖아, 이 양반아.

그리고 댁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서지준을 섭외해 오겠냐.

내 표정에 기가 막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는지, 고준태 피디가 변명하듯이 말한다.

“지금까지는 내가 시청률 견인차가 필요해서 MSG를 좀 쳤는데, 그건 다 방송이 살아야 출연자들도 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고. 종영 전에는 편집빨로 이미지 다 챙겨주려고 했어요. 진짜로.”

저놈의 주둥이를 콱.

할 수 있다면 똥 덩어리를 지게째로 퍼붓고 싶다.

딱 잘라 거절의 말을 하려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실장님한테 얘기 꺼내 볼게요. 너무 기대하진 마시구요.”

고준태 피디의 안색이 확 밝아진다. 그리고 득달같이 묻는다.

“정말 그래 줄 수 있어요? 진짜로?”

물론 거짓말이다.

서지준이 나온대도 다리 붙들고 뜯어말리고 싶은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다만 낚시질하듯이 시간을 좀 끌 생각이다. 떡밥으로 서지준이 걸려있는 동안에는, 고준태 피디가 넵튠 애들이랑 이송하를 불쏘시개로 쓸 수가 없을 테니까.

뭐, 어쨌든 난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옆좌석에 탄 이송하가 물었다.

시청률 공약 건으로 박 팀장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함께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힐끔 옆을 보니 이송하가 나를 쳐다본다. 입으로는 초콜릿 막대 과자를 오독오독 씹으면서.

“왜. 기분 좋아 보여?”

“네.”

대답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뭔가 딱딱한 게 입술을 쿡 찌른다. 막대 과자였다. 자연스럽게 받아먹으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든다.

얘가 요즘 왜 자꾸 나한테 뭘 먹이려고 하지?

다른 애가 그랬다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말았을 텐데, 이송하다. 누가 자기 걸 먹을까 봐 아이스크림 통에도 이송하 거라고 써놓는 애라고. 그런데 첫방 회식 날 소고기를 양보하더니, 그 뒤로도 자꾸 뭔가를 하나씩 나눠준다.

내가 배고파 보이나?

요즘 드라마 촬영 때문에 피골이 상접하긴 했지만.

생각하다가, 이송하가 기다리고 있길래 얼른 대답했다.

“네 덕이지, 뭐.”

오도독 소리가 뚝 멎었다.

“드라마 대박 나고 여기저기서 축하전화, 섭외전화가 쏟아지거든. 이런 거 처음이잖아. 내가 요즘 너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

대답이 없길래 옆을 돌아봤더니, 이송하가 소리 없이 웃고 있다.

아. 운전 중인 게 아쉽다. 저건 사진 찍어놔야 하는데.

가방에 넣어둔 고양이 수호령 포스터가 떠올랐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인데도 그 포스터 속의 모습보다 훨씬 예쁘다. 나만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오빠.”

“응?”

“원래 배우 담당하고 싶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저 말이 나왔던 게 언제인데, 설마 여태 신경 쓰고 있었나?

옆을 보자 이송하는 차창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랬지.”

뭐, 사실 지금도 넵튠이니까 괜찮은 거지, 다른 가수를 맡는 건 내키지 않는다. 나는 역시 배우가 좋다. 드라마랑 영화가 좋다. 이번에 이송하와 고양이 수호령을 함께하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눈물 나게 빡세긴 하지만 그만큼 즐겁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지금도 충분히 좋다고 말하려는데, 이송하가 먼저 물어왔다.

“이젠 그런 생각 안 하시겠네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제가 있으니까.”

이송하는 여전히 차창을 바라보고 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시선을 내려 손을 살폈다. 손가락이 막대 과자를 엄청나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니가 있으니까.”

이놈의 회사는 외나무다리가 널렸나 보다.

시도때도없이 원수랑 마주치거든.

이송하와 함께 홍보팀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우뚝 섰다. 안에서 손채영과 조 실장이 박 팀장과 얘기 중이었다.

또 박 팀장을 들들 볶아대고 있는 건가?

짝다리를 짚고 선 손채영이 말했다.

“시청자와 원작 골수 팬들이 원하는 거니까 흔쾌히 대본수정에 찬성했다고 인터뷰 내보내 주세요. 대본 수정되면 분석도 다시 해야 하고 앞으로 쪽대본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생색은 실컷 내야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진창에 발을 담갔구나.

미래에서도 원작 팬들 의견 다 반영하겠다고 대본 갈아엎으면서 산을 탔다고 했지. 속으로 축포를 터뜨리고 있는데, 박 팀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대본 좋은데, 제작진이 너무 욕심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20프로 넘기려면 욕심을 내야죠, 팀장님.”

손채영이 욕망을 불태우며 말했다. 박 팀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 실장이 손채영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제작사랑 PBS에서 강하게 밀어붙여서 그렇지, 작가님은 수정하는 거 별로 안 내켜 했다던데.”

“PBS 의견이 중요하지. 오빠, 연기대상 작가가 줘? PBS가 주잖아.”

연기대상은 무슨. 꿈 한번 크다.

뭐, 드라마 결산 기사에서 워스트 드라마로 뽑히긴 한다더라.

박 팀장에게 몇 마디를 더 던진 손채영이 홱 돌아선다.

그리고 나와 이송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에 짜증이 왈칵 차오른다. 이쪽도 반갑진 않거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이송하가 괜찮은지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 케이크가 날아다녔으니까.

다행히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이다.

손채영은 할 말이 목구멍까지 치민 것 같은데, 조실장이 안간힘을 쓰며 붙드는 통에 간신히 참는 느낌이었다. 하긴, 여긴 소리 지르면서 패악을 떨기엔 보는 눈이 좀 많지.

바닥을 콱콱 밟으며 지나가던 손채영이 멈칫하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안 봤어요, 쟤 드라마.”

어쩌라고.

언제는 한솥밥 먹는 사이니까 드라마는 보는 게 예의라더니만.

실소를 짓고 있는데, 여태 가만히 있던 이송하가 손채영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한다.

“저도 안 봤어요.”

손채영이 홱 돌아본다. 이송하를 노려보는 눈이 살벌하다.

얼른 이송하의 팔을 잡아당겨서 뒤로 숨겼다.

손채영이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은 태세로 어깨를 들썩거린다. 조 실장이 거의 빌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간다. 아마 여기가 홍보팀 사무실이 아니었다면, 직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케이크 투척사건 시즌 2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손채영 드라마, 진짜로 안 봤어?”

이송하에게 물었더니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이실직고한다.

“사실은 봤어요. 언니들이랑…….”

“뭐하러 저 얼굴을 TV로까지 봤어. 앞으론 보지 마.”

작은 목소리로 말했더니 냉큼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중에 시청률 3프로 나올 때 보여줘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진다. 돌아보자 박 팀장이 나와 이송하를 쳐다보고 있다. 손채영한테 시달리느라 퀭해진 얼굴로 웃으면서.

“자기들 들어오니까 내 마음이 다 편하네. 귀도 편하고.”

“고생이 많으시네요.”

진심으로 위로했다.

나와 이송하를 앞자리에 앉힌 박 팀장이 본론을 꺼냈다.

이왕 시청률 공약을 던지는 거, 이송하와 서지준을 묶어서 같이 할 생각이라고. 길거리로 나가면 인파 통제하기가 어려우니까 영화관 하나를 대관해서 팬들과 본방 시청 겸 소규모 팬 미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게 요지였다.

나랑 이송하야 뭐,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박 팀장은 한동안 팬 미팅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준비해야 할 점을 알려줬다. 메모하면서 옆을 보니 이송하도 진지한 얼굴이다. 얘기를 끝낸 박 팀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야. 둘이 일하는데 뭐 애로사항은 없지?”

“없어요.”

이송하가 먼저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이 엄마 미소를 짓는다.

대충 얘기도 끝냈겠다,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송하가 바로 따라 일어나지 않고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나를 올려보며 말한다.

“저는 팀장님한테 좀 더 여쭤보고 나갈게요.”

“그럴래? 그럼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내려와.”

안 그래도 먼저 가서 히터를 좀 틀어놓으려고 했는데 잘됐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 차 안이 얼음장일 거라. 팍팍 깎여나가는 체력을 먹는 걸로 겨우 지탱하는 중인데, 이런 때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이지.

이송하를 남겨두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막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또 섭외전환가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꺼냈는데, 김현조였다. 몇 마디 인사를 건넨 김현조가 바로 본론을 말했다.

-태희 자작곡 때문에. 이따가 얘기 좀 하자.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6)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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