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5) >
순간 헷갈렸다.
지금 쟤가 이송하인지, 아니면 정해원인지.
왜냐면 낯설었으니까.
내가 멈칫하고 있는 사이에 하얀 손이 입을 가린다. 그리고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송하구나, 생각하자마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리 들어와, 얼른.”
들고 있던 거대한 패딩을 펼치자, 몇 걸음 만에 코앞까지 온 이송하가 패딩 안으로 삼켜지듯이 들어온다. 얼굴이 새파랗다. 지퍼를 쭉 올려서 콧잔등까지 덮어버리고 모자까지 씌웠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벌써 다 끝난 거야?”
“아뇨, 남녀주인공 리액션 컷 따고 나서 다시 들어가요.”
고개를 저은 이송하가 내 팔을 살짝 잡는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김밥처럼 둘둘 말아놓아서 겉으로 보이는 건 눈뿐이다. 모닥불이 바람에 날려 휘청거릴 때마다 이송하의 눈도 불그스름한 빛에 젖어서 흔들린다.
“오빠.”
“응?”
“누구래요?”
그제야 조금 전까지 이봉준 실장과 나누던 얘기가 떠올랐다.
다 들었구나.
괜히 촬영 중인 애를 놀라게 했나 싶어서 얼른 말했다.
“나도 몰라. 3팀장님이 바로 거절했다더라.”
“아. 그런데 누구…….”
“정말 몰라. 나도 박 팀장님한테 전해 들은 거라.”
“박 팀장님.”
이송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속말로 웅얼거린다. 목소리는 두꺼운 패딩에 가로막혀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놀란 걸 추스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패딩 소매로 빠져나온 손은 아직도 내 옷을 붙들고 있다.
이봉준 실장 말처럼 난리를 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뿌듯한 마음이 안 든다면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이송하와 함께 지내면서 쌓아올린 관계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는 뜻이니까. 나도 그렇다. 만약 이송하가 나 말고 다른 매니저로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면, 며칠쯤 술독에 빠지지 않을까.
“37번 씬! 이송하 씨, 다시 스탠바이 해주세요!”
이송하는 다시 십 수 명의 스텝들과 카메라가 장비로 둘러싸인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신태균 감독의 말에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다.
회사를 뒤집어엎느니, 독점욕이니.
역시 이송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송하는 성격이 좀 덤덤한 편이라서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더니, 이봉준 실장이 두툼한 팔을 내 어깨 위에 얹는다. 그리고 지그시 나를 쳐다본다.
뭐지, 저 동질감이 흘러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눈빛은.
“글쎄. 너 송하 눈에서 글자 못 봤어?”
“글자요?”
이봉준 실장이 남는 손으로 내 왼쪽 눈을 가리킨다.
“왼쪽 눈에 누.”
누?
“오른쪽 눈에 구.”
누구?
이송하의 눈이 어땠는지 떠올리는데, 이봉준 실장이 계속 말한다.
“내가 보기엔 방금 제대로 눈을 뜬 것 같은데.”
“네?”
“니가 방금, 스위치를 켠 것 같다고.”
“그게 무슨…….”
다시 물으려는 순간.
“컷! 송하 씨, 대사 잊어버렸어요?”
신태균 감독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귀를 의심했다. 대사를 잊어버렸다고? 이송하가?
고개를 홱 돌려 촬영장을 바라봤다. 하얗게 쏟아지는 조명 아래, 이송하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정해원이 아니라, 이송하가.
그날, 이송하는 끊임없이 NG를 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이송하를 앞에 두고 다른 데 안 간다고 거듭 말하기까지 했다. 도장이 있었으면 각서를 썼을지도.
그 덕분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다행히 막판에 신태균 감독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그렇게 그날 일은 이송하의 컨디션 난조가 불러온 가벼운 사건으로 넘어갔다.
그 뒤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이봉준 실장이 제대로 눈을 떴다느니, 스위치를 켰다느니 희한한 소리를 해서 줄곧 지켜보는 중인데 평소랑 똑같다.
조금 전 넥스트 K스타의 과거 히트곡 커버 미션도 잘 끝냈다.
뭐, 심사위원들은 따가운 평가를 날리고 있지만. 신데렐라 새언니들 같으니라고. 잠잘 시간까지 쪼개고 쪼개서 연습한 무댄데, 내가 보기엔 잘만 하더구만.
심사도 심사지만, 이번에는 또 어떻게 편집을 할지 걱정부터 든다.
프로그램 메인 피디라는 양반이 이송하를 이용해서 시청률 올리는데 맛 들린 사람이라. 심사위원들이 새언니라면 저쪽은 계모다.
촬영을 마무리하는 고준태 피디를 노려보다가, 넵튠 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디오 팀 스텝에게 마이크를 반납하는 중이었다. 오랜 녹화 때문에 다들 지친 표정이다.
배신자는 사이먼 리와 잠깐 할 얘기가 있다길래, 나 혼자 애들을 데리러 갔다. 차례대로 어깨를 두드려주고 마지막으로 이송하를 찾다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어떤 놈이 이송하 옆에 달라붙어 있다.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펀치라인에 랩하는 놈. 이주환.
스타일리스트들 앞에서 이송하를 찍었네, 어쨌네 하고 떠들었다던 그놈. 안 그래도 넥스트 K스타 녹화 때마다 얼굴을 부딪치는 상황이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스쳐 갈 때 힐끔거리기만 했지, 대놓고 접근하지는 않았는데.
성큼성큼 다가가니 이주환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아?”
“아, 네.”
“심사위원들 헛소리하는 건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흘려버려. 나도 그랬거든.”
이송하가 멈칫한다. 나도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다.
저거 정신 나간 놈 아냐? 사방에 VJ가 몇 명인데. 다행히 촬영이 종료돼서 둘을 찍고 있는 VJ는 없지만, 그래도 오디오가 잡힐 수도 있는데 심사위원들을 대놓고 개라고 불러?
이송하까지 싸잡아서 엿 먹일 일 있나.
망설임 없이 둘 사이로 들어갔다.
“송하야. 고생 많았어, 가자.”
“네, 오빠.”
이송하가 내 옆으로 붙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돌은 뭐 썸도 타면 안 되나? 엄청 싸고도네.”
썸같은 소리하고 있네.
저놈을 바라보던 이송하의 눈빛은 썸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다. 그 눈빛이 썸이면, 밥그릇을 쳐다보는 눈빛은 욕정이게?
아무래도 펀치라인 매니저와 얘기 좀 해야겠다.
“송하야, 쟤랑은 상종도 하지 마.”
내 말에 이송하가 넙죽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렇지. 썸은 무슨.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다른 애들은 벌써 대기실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송하와 함께 세트장을 나가는데, 철수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스텝들 사이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유들유들 밉상인 얼굴. 고준태 피디였다.
그가 내 팔뚝을 툭 건드리며 말한다.
“오늘 심사위원들 멘트는 걱정 안 해도 돼요. 편집하면서 쳐낼 거 쳐내고 붙일 거 좀 붙이면, 충분히 좋게 나갈 수 있으니까.”
“이번엔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이 양반이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인사하면서 의심의 촉을 세웠다. 고준태 피디가 말을 잇는다.
“참, 고양이 수호령 본방사수할게요. 지난번에 특별편 보니까 드라마가 아주 재밌겠더라고. 송하 씨 연기가 기가 막히던데요. 이러다가 넥스트 K스타가 탑스타 하나 배출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어처구니가 없다.
이송하가 탑스타가 되는 건 환영할 일이다마는. 그걸 왜 댁 공으로 돌려, 이 뻔뻔한 양반아. 넥스트 K스타가 송하한테 준 건 한 아름의 인지도와 그걸 다 뒤덮을 만큼 거대한 똥 덩어리뿐인데.
넥스트 K스타 때문에 안 좋아진 여론을 지금의 긍정적인 분위기로 바꾸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으며,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했는데.
입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작품이 워낙 잘 뽑혀서 저희도 기대 중이에요.”
“아…… 그래요?”
고준태 피디가 몇 번 입을 달싹이더니 묻는다.
“시청률 뭐, 어느 정도까지 예상한대요?”
사실 나는 10프로 위까지 기대하고 있긴 한데, 말은 안 했다.
부정 탄다는 얘기 들을까 봐서.
특별편이 분당 최고시청률 6프로를 찍었으니까 그대로 유지만 해도 케이블 채널인 걸 고려하면 대박이고. 스텝과 관계자들은 8프로에서 9프로까지 점치는 중이었다.
“일단 시청률 공약은 8, 9프로 정도로 하려고 논의 중입니다.”
“8, 9프로?”
고준태 피디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러다가 다시 유들유들한 투로 말한다.
“그, 요즘도 촬영하느라 정신없죠? 조연 롤인 송하 씨도 피곤해 보이던데, 같은 회사 서지준 씨는 주인공이니까 더 바쁘겠어요?”
“……그렇죠.”
아하.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나 했더니만.
서지준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보니, 이 양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좀 짐작이 간다.
조금 전에는 입만 웃었지만, 이번에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지준 씨도 엄청 바쁘시죠.”
판 프로덕션의 김판석 대표가 숟가락으로 맥주병을 두드렸다.
“서지준 씨를 위해서 건배!”
고깃집 안에 환호성이 울렸다.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의 스텝들이 앉은 테이블. 김판석 대표와 홍주미 작가, 신태균 감독,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의 테이블. 담당 매니저들의 테이블까지. 어디서든 술잔이 출렁거렸다.
고양이 수호령의 본방사수를 위한 단체회식이었다.
서지준이 한턱내는 자리라 중요한 스케줄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모였다. 메이킹 팀도 와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데, 다들 안 찍히려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다. 야외 씬 촬영을 막 끝내고 온 상태라 행색들이 좀. 모르고 보면 드라마 제작팀이 아니라 노숙자 모임인 줄 알 거다.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벽걸이 TV를 바라봤다. 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시청률 공약으로 뭘 걸어야 하나.”
여주인공의 매니저가 속이 벌건 소고기를 날름 삼키며 말했다.
다른 매니저가 폭탄주를 제조하며 끼어든다.
“참, 뭍나인도 시청률 공약 걸었더라구요. 거긴 20프로던데.”
“20프로요?! 와, 쎄네.”
술렁거림이 번지자, 말을 꺼낸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한다.
“턱없는 숫자는 아니죠. 지금 상승세가 장난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오르려나.”
3화까지 오를걸요.
나는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소고기를 뒤집으며 생각했다.
“올 초 대작은 우리 드라마일 줄 알았는데.”
“에이, 공중파 라인업이 얼마나 빵빵한대요. IBC 타임슬립도 어제 방송한 거 시청률 12프로 찍었어요. 장르물인데 완전 선방한 거죠.”
“그 작품은 작가랑 감독이 워낙 합이 좋아서.”
합이 지나치게 좋지, 거기는.
작가랑 감독이 바람나서 작품 말아먹을 만큼.
고기를 가위로 큼직큼직하게 썰었다. 육즙이 줄줄 흐른다.
이송하는 잘 먹고 있나.
서지준과 다른 조연 배우 사이에 끼어있는 이송하를 쳐다봤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이다. 입도 쉬지 않고 있고.
한쪽 뺨이 볼록한 이송하가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딱 쳐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비싼 고기니까 많이 먹으라는 의미로 웃었더니, 좌우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핀다.
슬그머니 일어난다. 한 손에는 앞 접시, 다른 손엔 젓가락을 들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이송하가 내 옆에 자리를 틀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앞 접시를 내려놓았다. 큼직큼직한 소고기가 몇 덩어리 놓인 앞 접시를.
“나 먹으라고?”
“네.”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 실장님만 계속 드시잖아요.”
나는 이송하가 큰맘 먹고, 정말 큰마음을 먹고 주었을 소고기를 하나 먹고, 대신 이송하의 앞 접시를 고기로 가득 채워줬다. 이봉준 실장의 눈빛이 푹푹 찔러왔지만 무시했다.
배 터지게 먹여야지. 의욕적으로 새로운 고기를 불판에 얹었을 때.
조연출이 외쳤다.
“마지막 CM입니다! 본방 1분 전입니다!”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럽던 고깃집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모두 흥분과 기대로 벌건 얼굴을 하고서 TV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했다.
영화관에 온 것처럼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 축제 분위기에 흠뻑 빠져있다는 것.
“커뮤니티, SNS마다 관련 글 어마어마하게 뜨고 있습니다!”
“내용도 대부분 호평이에요!”
“으아, 서지준 씨랑 이송하 씨 나올 때는 반응 진짜 터집니다!”
대본을 외울 만큼 봤고, 현장에서 촬영하는 장면도 지켜봤지만, 미끈하게 편집되어 나온 드라마를 보는 건 기대 이상의 감동이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도 좋지만, 화면에 이송하의 얼굴이 잡힐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다.
이송하 역시 홀린 듯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고기를 먹을 때보다 더 배부른 얼굴로.
떠들썩한 말소리 사이로 핸드폰 진동과 벨 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내 핸드폰도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다.
벌써 기사를 몇 개나 썼다는 박우정 기자, 끝나지도 않았는데 장문의 감상을 보낸 형과 형수. 부모님과 친구놈들. 회사 홍보팀 직원들한테서 온 문자도 있다.
제일 많이 쏟아지는 건 임서영의 톡이다.
넵튠 애들도 숙소에서 다 같이 보는 중인지, 분 단위로 톡이 올라온다. 분명 이송하가 찍었는데 화면엔 이송하가 없다느니, 팬카페에서 팬들이 난리가 났다느니. 내가 따로 모니터링 할 필요가 없다.
마침내 드라마가 끝났을 때.
고깃집 안은 수십 명이 동시에 떠드는 소리로 미어터졌다. 점원들이 쉴 틈 없이 맥주를 가져왔고, 잔이 비자마자 채워졌으며,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돼서 앞다투어 건배를 외쳤다.
그 난리를 잠재운 건 전화 한 통이었다.
TVL 주조정실에서 걸려온.
모두, 심지어 고깃집 점원들까지 통화 중인 신태균 감독을 주시했다. 감정표현이 후한 사람이 아니라, 표정만 봐서는 시청률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곧 신태균 감독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배우분들, 시청률 공약 몇 프로로 의논 중입니까?”
누군가는 8프로, 누군가는 9프로라고 대답했다.
신태균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더 올려야겠네요.”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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