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6화 (66/218)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4) >

안 봤어. 앞으로도 볼 생각 없어. 돌아가.

라고 탑스타한테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성공해야 될까. 역시 대표쯤은 돼야겠지.

“아, 봤습니다. 드라마 정말 재밌던데요. 시청률 동시간대 1위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배신자가 인사를 건네며 말한다.

“넵튠 매니저 최건영입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호감을 이끌어내는 사람 좋은 얼굴. 하지만 손채영에게만큼은 먹히지 않았다. 넵튠 매니저란 소리를 듣자마자 손채영의 눈썹이 홱 올라갔으니까.

배신자를 본척만척한 손채영이 나를 보고 묻는다.

“그쪽은요? 봤어요?”

“아니요, 어제 너무 바빠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손채영은 대놓고 이 구역의 미친년이라 그런지 오히려 배신자보다는 상대하기가 편하다. 오십보백보긴 하지만, 머리가 덜 복잡하달까.

거들먹거릴 만반의 준비가 돼 있던 손채영이 이맛살을 구긴다.

“……안 봤다구요? 그걸 왜 안 봤어요?”

“스케줄 소화하느라 바빠서 못 봤는데 그걸 왜 안 봤느냐고 물으면, 바빠서 못 봤다고밖에 할 말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하는데, 손채영이 날카로운 하이힐 굽으로 바닥을 콱 찍는다.

“아무리 바빠도 그건 봤어야죠, 나는 고양이 수호령 봤는데!”

버럭 외친 손채영이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덧붙인다.

“한솥밥 먹는 사이에 그 정도는 예의 아닌가?”

예의? 저 입에서 예의라는 말이 나오다니. 소름이 다 돋는다.

아무래도 나한테서 ‘제기랄, 고양이 수호령이 뭍나인한테 밀리다니, 송하가 손채영한테 지다니, 화가 난다!’ 뭐,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온 모양인데. 일없다.

만약 내가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지느러미 퍼덕거리다가 말라죽는다는 결말을 몰랐더라도, 절대 손채영 앞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거다. 차라리 배신자랑 쎄쎄쎄를 하는 게 낫지.

어쨌든 고양이 수호령을 봤다니 고맙네. 그걸 봤을 때 손채영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혈관에 사이다를 때려 붓는 느낌이다.

“이송하 걔는, 걔는 봤대요?”

“글쎄요.”

손채영의 입술 틈으로 뭔가 갈리는 소리가 새나온다.

“오늘은 꼭 봐요.”

“오늘 밤에도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보라고!”

깜짝이야. 보면 볼수록 지난번에 3팀장이 했던 말이 정확하다. 저 정도면 정신병이다. 손채영이 바닥을 뚫을 셈인지 하이힐 굽으로 바닥을 콱콱 찍었을 때였다. 또 한 번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채영아! 너 핸드폰도 놓고 대체, 한참 찾았잖아!”

조실장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나를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쉰다. 무슨 일인지 단숨에 파악한 얼굴이다.

“너 대표님 뵙고 간다며. 지금 미팅 끝나셨으니까 얼른 가보자.”

손채영을 달래서 데려가려고 애쓰는 조실장을 보니까, 문득 저 사람을 처음 봤던 날이 떠오른다. 손채영 매니저라는 말에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반대였다. 저 정도면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하다.

나를 볶는 것보다는 백한성 대표를 만나는 게 더 중요했는지, 손채영은 나한테 재방송으로라도 꼭 자기 드라마를 보라며 쏘아붙이곤 자리를 떴다.

물론 보긴 볼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내리막을 타게 되면 그때부터. 미래를 보기 전까지는 나도 뭍나인의 시놉시스를 보고 참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좋은 작품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그 과정을 보는 것도 공부가 되겠지.

“정말 특이한 성격이네.”

배신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날 볼 때 좀 표정이 굳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평소 얼굴 그대로다.

나도 평소처럼 대답했다.

“특이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지, 손채영은.”

“뭐, 어릴 때부터 아역배우로 시작했으니까. 거의 인생 대부분을 연예계에서 산 거잖아. 그걸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고?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는 지켜야지. 너도 손채영이랑 심경택 선생이 송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잖아. 그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내 말에, 배신자가 흐리게 웃으며 대꾸한다.

“그건 그런데…… 이 바닥이 사람을 좀, 그렇게 만들잖아.”

이 바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참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곳이니까. 나만 해도 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사람을 앞에 두고 협박이라는 걸 해봤고. 앞으로 그런 일들이 또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나는 배신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손채영 같진 않잖아. 그런 사람은, 이 바닥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던 걸 수도 있지.”

배신자와 손채영을 동시에 맞닥뜨리고 나니, 내가 회사에 있는 건지 복마전에 들어앉아 있는 건지 헷갈린다.

언제쯤 이놈의 회사가 정화되려나.

머릿속으로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의 남은 방영 회차, 그리고 넵튠의 다음 앨범 발매시기를 떠올리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자기, 이번 건 헛다리 짚었더라?”

돌아보니 박 팀장이 라운지에 늘어져 있다. 기운이 쭉 빠진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손채영이 박 팀장을 닦달했다고 했지.

“헛다리요?”

앞자리에 앉아서 묻자 박 팀장이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가 손채영하고 처음 부딪친 날 그랬었잖아.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감이 안 좋다고. 그런데 지금 대박 날 분위긴데?”

그냥 말없이 웃고 말았다.

박 팀장이 내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린다.

“뭐, 그래도 실망하지 마. 고양이 수호령 건만으로도 자기 이름 석 자는 확실하게 알렸으니까.”

지난번에 홍보팀 사무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번에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침몰하고 나면, 이번엔 홍보팀 직원들이 그들과 똑같은 얼굴로 달려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앞으로는 정말 말조심해야지.

굳게 다짐하는데 박 팀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한다.

“직원들뿐만이 아니라 연예인들도 알던데. 내가 누군지 말은 못하지만, 3팀장님 찾아가서 자기랑 한번 일해보고 싶다고 한 사람도 있어.”

나랑 일하고 싶다고 했다고? 누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박 팀장이 웃음을 흘린다.

“그런데 3팀장님이 절대 안 된다고 했지. 지금이 넵튠한테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고, 또…….”

또?

“자기 뺏어가면 송하가 회사 뒤집어엎을까 봐.”

“송하가요?”

진담으로 하는 소린가?

목을 긁적이며 생각해봤다. 만약 내가 담당 연예인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지금으로써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 온다고 가정하면 이송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많이 아쉬워하긴 하겠지. 잡을 수도 있고. 잘 가요, 하고 보내주면 오히려 내가 충격받을 거다.

하지만 회사를 뒤집어엎는다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연예인들은 자기 것,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독점욕 느끼는 경우가 꽤 많거든. 뭐, 회사 뒤집어엎는다는 말은 농담 삼아 한 말이긴 하지만, 송하가 자기한테 하는 거 보면 언젠가 그럴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던데?”

독점욕이라고?

이송하랑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나중에 송하한테 슬쩍 한 번 얘기해봐. 반응이 어떤가.”

USB를 들고간 김현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연락이 온 건, 고양이 수호령 촬영장에서 한창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오래 걸린 것치고는 내용은 별거 없었다. 3팀장에게 이태희의 자작곡을 들려줬고, 다음 내부회의 때 스텝들, 그리고 백한성 대표를 비롯한 임원들과 논의할 예정이라는 것 정도.

큰 걱정은 안 한다. 이태희의 자작곡을 더블 타이틀로 미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으니까. 원래의 미래에서 그 곡이 타이틀 곡이 되었다는 건, 그때도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뜻이잖아.

이태희에게도 상황을 전달해주고 전화를 끊었을 때. 내 옆에 바짝 붙어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이봉준 실장이 옆구리를 찌른다. 그리고 턱짓을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송하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추운데 왜 나왔어? 앞 씬 촬영이 계속 지연되는 중이라, 우린 좀 더 대기해야 하는데.”

오늘 야외촬영장은 울창한 숲 속에 있는 캠핑장이다. 숲이라 그런지 밤이 깊어질수록 체감 온도가 뚝뚝 떨어진다. 모닥불이라도 있으니 망정이지, 이마저도 없었으면 동태가 됐을 거다.

“이리 와.”

손짓하자 이송하가 타박타박 다가와 내 옆에 붙어선다. 주차해 놓은 승합차에서 여기까지 먼 거리가 아닌데도 뺨이 창백하게 얼었길래,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핫팩 두 개를 꺼냈다.

“자.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있어. 작아도 꽤 따듯하더라.”

하얗고 작은 손이 핫팩을 꼭 쥔다. 그리고 내 말대로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집어넣는다. 안에서 핫팩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 주머니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방금 태희 언니랑 통화하셨어요?”

“응. 목소리가 안 좋던데. 하긴, 거의 이틀을 꼬박 새면서 작업했으니 몸이 남아나나. 안 그래도 비쩍 마른 앤데 컨디션 괜찮은가 모르겠네. 이따가 너 데려다 주면서 한 번 들여다봐야겠다.”

“그때쯤이면 언니 자고 있을 것 같은데.”

타닥타닥 불똥 튀는 소리 때문인지, 목소리는 유난히 조그맣게 들렸다.

“아 참, 그렇겠다. 시간이 좀 늦겠네.”

“네. 거의 1시 넘어갈지도 몰라요.”

“괜히 잘 자는 애들 다 깨울 뻔했네. 너랑 허구한 날 새벽까지 붙어있어서 그런가, 시간 감각이 없어졌나 보다.”

“그럼 제가 들어가서 태희 언니 안 자고 있으면, 컨디션 괜찮은지 물어보고 오빠한테 전화할게요.”

“응? 그럴래?”

이송하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후 이송하 출연 씬의 촬영이 시작됐다. 서지준과 다른 배우들 곁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전의 이송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저기 있는 건 이미 정해원이다.

“의상이 얇아서 춥겠는데, 이번 씬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네요.”

“송하야 뭐, NG 거의 안 내잖아. 금방 끝내고 오겠지.”

이봉준 실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다.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봐도, 이송하는 NG를 내는 일이 상당히 적은 편이다. 그나마도 동선이 꼬여서 신태균 감독이 다시 디렉팅을 하는 경우나, 바람 소리나 다른 소음 때문에 오디오가 물려서 재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흐뭇한 눈으로 촬영 현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봉준 실장이 묻는다.

“배고픈데 송하 간식 남은 것 좀 없어?”

“송하를 어떻게 보시고. 쟤는 간식 남기고 그러는 애 아닙니다.”

초반에는 정해원에 씌었을 때 먹는 게 부실해져서 걱정했는데, 금방 적응했는지 촬영 전에 왕창 먹고 촬영 후에 또 왕창 먹는다.

“에이, 나도 뭣 좀 챙겨다니든가 해야지. 춥고 졸린데 배고프기까지 하니까 못 해먹겠다. 겨울 촬영은 몸이 더 힘들다니까. 너도 젊을 때 조심해라. 드라마 한편 끝나면 골병이 들어요, 골병이.”

“로드 한 명 뽑아서 일 좀 나눠서 하시죠, 왜.”

“아이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은데 지준이 저놈 때문에.”

이봉준 실장이 한창 촬영 중인 서지준을 쳐다보며 투덜거린다.

“저놈이 나 쉬는 꼴을 못 보잖아. 잠깐만 안 보여도 어디냐, 뭐하냐, 나 놔두고 어디 갔냐. 가끔은 내가 연예인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 무슨 의처증 걸린 놈을 데리고 사는 것 같다니까.”

하긴, 서지준이 이봉준 실장을 되게 따르는 것 같긴 했지.

“그건 그것대로 또 고충이 있네요.”

“보아하니 너한테도 남 얘기가 아니겠더구만, 뭘.”

“네?”

“송하 말이야. 너 떼놓으면 난리 나겠던데.”

박 팀장님하고 비슷한 소릴 하시네.

“글쎄요. 아까 박 팀장님도 그런 말씀 하시던데.”

“박 팀장이?”

“네. 배운지 가순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누가 3팀장님한테 가서 저랑 일하고 싶다고 했다나 봐요. 박 팀장님이 송하한테 그 얘기 한번 해보라고 하시…….”

한창 말하는데 이봉준 실장이 아까처럼 내 옆구리를 푹 찌른다. 그리고 턱짓한다.

돌아보니 이송하가 몇 걸음 뒤에 우뚝 서 있었다.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4)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