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5화 (65/218)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3) >

익숙한 광경이다.

눈앞에 모래를 뿌려놓은 것처럼 노이즈가 가득한 접속 불량 미래. 시야에 들어오는 걸 통째로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이태희의 자작곡은 백 프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하늘은 검고, 서늘한 밤바람이 땀을 식힌다. 야외구나. 초록이 드문드문 섞인 갈색 잔디, 다듬어진 작은 정원. 나무 벤치가 보인다. 나는 그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중이다.

어딘지 알겠다.

회사 5층에 있는 야외 흡연실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을 때는 가끔 바람 쐬러 나오기도 했던 곳이라 기억하고 있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내 고개가 돌아가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홍보팀 남직원이 보인다. 두껍지 않은 와이셔츠. 면바지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은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내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간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요.”

뭐라고?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홍보팀 직원이 딴소리를 한다.

“반응이 정말 대단해요. 처음에 이태희 자작곡 들고 와서 밀어붙였을 때만 해도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데, 이번 앨범은 진짜 건영씨 선택이 신의 한 수였네요.”

순간, 생각이 헛돌았다.

남직원의 말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그 곡, 듣기는 선우씨가 먼저 들었다면서요? 이번엔 어쩌다 선수를 놓쳤대요?”

물속에 거꾸로 쑤셔박힌 기분이다.

그때 또 한 번 눈앞이 출렁거렸다. 드라마 속 인서트처럼 장면이 전환된다. 노이즈는 줄어들었지만, 이것 역시 접속 불량 미래인 건 분명하다. 나는 벤치가 아닌 소파에 앉아있다. 낮은 테이블, 반신 거울이 달린 화장대. 낯이 익다. PBS 분장실이다.

그리고 분장실 문 앞에 최건영이 기대 서 있다.

그가 웃으며 말한다.

“가로챈 게 돼서 미안하긴 한데, 기회를 안 잡을 순 없잖아.”

다음 순간.

나는 소파 대신 굴국밥 집 의자에 앉아 있다. TV 소리,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확 밀려들어 온다. 고개를 들자 최건영이 날 바라보고 있다. 웃으면서.

“왜 그렇게 봐. 잘해 보자니까?”

“어, 그래.”

생각보다 태연한 목소리가 나갔다.

물론 머릿속은 난장판이다. 일단 냉수를 한잔 들이켰다. 모자라서 한잔 더 마셨다. 그제야 산소가 공급되는 기분이다. 제대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내가 본 것들을 떠올렸다.

이태희의 자작곡을 밀어붙인 게 최건영이 됐단 말이지.

미래의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전에는 사람은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퍼즐의 조각은 충분하다. 내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일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최건영과 관련된, 내가 배신감을 느꼈을 만한 일이겠지.

마지막에 최건영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가로챈 게 돼서 미안해? 기회를 안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아까, 최건영의 말을 듣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었다.

내가 신들린 사람처럼 물어오는 일마다 성공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까. 최건영에게는 없는 능력.

하지만 복잡하게 술렁이던 마음은, 그 복잡함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미안함은, 미래 예지를 보는 순간 모조리 쓸려나갔다.

넥스트 K스타 때도 최건영은 거짓말로 내 뒤통수를 치고 눈앞의 기회를 잡았고, 이태희의 자작곡과 관련해서도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기회를 잡는 것을 선택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알고 있었는데. 뻔히 알고 있었는데. 처음에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심하자고. 알고도 뒤통수를 맞으면 그건 병신이라고. 그런데 조금 전에 병신이 될 뻔했구나. 이십 년쯤 후에 오늘 일을 후회하면서 인생이 실전이라는 걸 그때 느꼈죠, 이따위 인터뷰나 할 뻔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는 최건영이 보였는데, 지금은 그가 보이지 않는다.

내 앞에 있는 건 배신자일 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물렁해졌던 가슴에 쐐기가 되어 박혔다.

배신자와 헤어지고 난 뒤 홀로 거리를 걸었다. 생각을 정리할 틈이 필요하다. 하늘이 잿빛인 게 심상치 않더니만 곧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더럽게 춥다. 대신 머릿속도 함께 차가워졌다.

앞으로 같이 잘해보긴 개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옆에 끼고 불안해하는 멍청한 짓은 이제 때려치울 거다. 어떻게 할까. 아직 하지도 않은 짓을 걸고넘어지면 나만 미친놈이 되고, 그렇다고 일부러 뒤통수를 맞기 위해 덫을 놓는 수고까지 하면서 내 인생에 철천지원수 한 명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손채영, 심경택 선생, 2팀장이 날 볶아먹고 싶어하는 마당에.

고민하다가 문득 아까 배신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일이 잘 안 되면 팀을 옮기거나 회사를 그만두자고 생각했었다고 했지. 이제는 사이먼 리를 설득하기 위해 했다는 별의별 시도라는 것도 의심스럽게 느껴지긴 한다마는.

어쨌든 미래에서 홍보실 직원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면 사이먼 리의 곡이 어찌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태희의 자작곡이 성공하는 건 확실하다. 반응이 대단하다고 했으니까.

그래. 기회를 안 잡을 수는 없다고 했지?

더 이상 보지 않을 기회가 눈앞에 있으니, 나도 잡아야겠다.

핸드폰을 꺼내 김현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전데요.”

-어, 왜?

“제가 어제 태희가 작곡한 노래를 들었는데, 곡이 정말 괜찮더라구요. 거의 완성단계인 것 같은데 실장님도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자작곡이 나가면 실력파 걸그룹 이미지도 더 확고해질 텐데…….”

건너편에서 김현조가 웃었다.

-알았어, 전례도 있는데 니가 좋다고 하는 거면 들어 봐야지. 나쁘지 않으면 수록곡으로 논의해 보자. 그래도 태희한테 너무 기대하게 하지는 말고.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진 않을걸요.

속마음을 삼키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저녁. 나는 양손에 짐을 들고 애들 숙소로 찾아갔다. 근력 운동을 하고 있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엘제이가 다가온다.

“또 송하 밥 주러 오셨어요? 지금 자는데, 깨울까요?”

“아냐. 모처럼 촬영 없는 날인데 이런 때 푹 쉬어야지.”

이태희의 방문을 힐금 보고 고개를 돌리자, 엘제이가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선 채로 날 쳐다보고 있다. 새파란 눈이 조금 짙어진다.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왜?”

“글쎄요. 느낌이 좀. 오늘은 복뱀이 아니라 독뱀 같다고나 할까.”

눈치가 빠르네.

“영혼에 흠집이 났거든.”

진담을 농담처럼 얘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뭐해?”

“중독자들이 뭐하겠어요.”

엘제이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희 언니는 맥주 퍼마시면서 곡 작업하고, 임서영 저건 우리 팬카페에 글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들여다보느라 밥도 책상에서 먹어요. 제가 보기엔 둘 다, 아니, 오빠까지 셋 다 정신과에 가면 병명이 한두 개씩 나올 거 같은데요.”

그럴지도. 난 아마 인간불신증, 뭐 이런 걸 거야.

“나 멀쩡하거든!”

임서영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나한테 인사를 하더니 곧 엘제이한테 왈왈거린다. 밖이 시끄러워지자 이태희도 거실로 나왔다. 정말 술 마시면서 곡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지, 길고 갸름한 눈매가 누그러져 있다.

나는 이태희에게 양손에 든 봉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제 거예요? 별일이네.”

임서영과 엘제이까지 의아한 눈으로 모여든다. 봉지를 열어본 이태희가 멈칫한다. 그야, 술이랑 안주뿐이니까. 특히 술은 캔맥주, 병맥주, 샴페인에 와인까지. 마트 진열대를 싹 쓸어담았거든.

“어. 오늘 음주데이, 뭐 그런 날이야?”

“그런 날이 있겠냐.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해, 생각.”

개와 고양이의 싸움이 재점화 되고, 이태희가 결 좋은 갈색 머리를 긁적거리며 묻는다.

“진짜 이게 다 뭐예요?”

“땡기는 거 골라 마시면서 곡 만들라고.”

나를 또라이 보듯 쳐다본다. 뭐, 낯선 눈빛도 아니다.

“실장님한테 노래 좋다고 얘기해놨어.”

내 말에 이태희의 눈이 커지고, 그 안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살아난다.

“나만 듣긴 아깝더라.”

“…….”

이태희는 잠깐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아직도 서로 물어뜯고 있는 두 명을 힐끔 보더니,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온다. 그리고 작게 헛기침하고 묻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다니까.”

“조금만 더 자세히…….”

“내가 듣기엔 사이먼 리 곡보다 더 좋았어.”

리더라는 것 때문인지 늘 느긋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는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니까 원래 나이같다. 그 상태로 한참, 나를 천하에 둘도 없는 또라이 보듯이 보던 이태희가 웃음을 흘렸다.

“좀 알겠네요.”

“뭘?”

“송하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다음 날, 나는 이태희와 몇 번이나 전화통화를 했다.

그때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이태희의 자작곡이 들려왔다. 사실 어디가 어떻게 수정된 건지 구분도 잘 안 됐고, 내가 미래에서 들었던 것과도 여전히 똑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최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머리가 무겁도록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화요일 아침. 이태희로부터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곡이 다 완성됐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전과 똑같은 방. 똑같은 소품.

곧 김현조가 도착하면 등장인물 역시 똑같아지겠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노트북을 힐끔 보고, 내 앞에 납작한 USB를 올려놓았다. 배신자의 시선이 잠시 USB에 달라붙는다.

“……태희가 만들었다고?”

“어. 새벽에 완성했대.”

“기대되네.”

배신자의 뺨에 살짝 보조개가 파인다. 참 잘도 웃는다. 난 엊그제 본 미래가 자꾸 떠올라서 표정 관리하느라 바쁜데. 심경택 선생 앞에서 내숭 떨 때는 이 정도로 어렵진 않았는데, 배신자한테 두 번 뒤통수 맞을 뻔한 게 정신적으로 타격이 크긴 했나 보다.

곧 김현조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몹시 퀭한 얼굴로.

“송하 오늘 회사 올 일 없지?”

“없죠.”

갑자기 송하는 왜?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해라. 지금 손채영 와있으니까.”

“……아.”

“박 팀장님한테 물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고 닦달하고 있어.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게 무슨 아들 낳은 후궁 같더라.”

손채영 성격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어젯밤에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도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전국기준 11.9프로로 동시간대 1위. 순간 최고시청률은 14프로가 넘었다나. 첫 화부터 두자릿수로 출발한 드라마가 오랜만이라, 인터넷도 난리다.

김현조가 혀를 차며 나를 바라본다.

“뭍나인이 너무 잘 돼서 니가 저번에 대표님이랑 얘기했다던 그거,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건 뭐, 좀 더 지켜봐야죠.”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미래에서 그랬으니까.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도 3회까지는 시청률이 상승세였고, 그 후에 원작 팬들 때문에 말아먹었다고. 그래서 걱정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동요했겠구나. 설마 이송하도 본 건 아니겠지.

“그래, 드라마는 끝까지 가봐야지. 지금 전전긍긍해서 뭐하겠냐.”

“고양이 수호령도 시청률 더 올라갈 거구요.”

배신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김현조가 화제를 돌린다.

“어디 들어보자, 태희 자작곡.”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아침에 숙소에 들러 받아온 거다. 이태희는 밤을 홀딱 샜는지 피곤해 보였지만, 저번처럼 먹구름이나 장대비 따위는 없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일단 들어보고, 괜찮으면 다음 회의 때 내밀어 보자. 근데 다들 사이먼 리 곡을 들은 상태라, 기준치가 높아졌을 텐데. 더군다나 이번 앨범은 최대한 퀄리티 높이자고 힘을 빡 주고 있어서.”

김현조의 말에 배신자가 빙긋이 웃는 얼굴로 대꾸한다.

“그래도 자작곡이면 메리트는 있잖아요. 홍보할 때도 좋고.”

마우스를 움직여 곡을 재생했다.

곧 좁은 공간이 음악으로 둘러싸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김현조의 눈이 진지해지기까지. 그리고 여유롭던 배신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기까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긴 했지만, 확실히 봤다.

저 눈이 찌푸려지고, 불쾌감이 스치는 순간.

동시에 내 입 끝이 올라갔다. 아까는 저놈 앞에서 태연히 웃는 게 어려웠는데, 웬걸. 지금은 얼굴 근육이 알아서 웃고 있다.

재생이 끝나자마자 김현조가 턱을 매만졌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가 일어나며 USB를 가리킨다.

“내가 가져가도 되지?”

“그럼요.”

“일단 영훈이 형이랑 먼저 얘기 좀 해보고. 다시 연락할게.”

그 말만 남기고 김현조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 좁은 회의실 안에 남은 건 나와 배신자, 두 명뿐이다.

언제 불쾌감이 떠올랐느냐는 듯 배신자의 눈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다. 입가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평소 같은 느낌은 아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신자가 입술을 움직였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김현조가 다시 왔나 싶어서 돌아봤다가, 눈 버렸다.

손채영이 김현조의 말처럼 아들 낳은 후궁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나를 딸 낳은 중전 보듯이 쳐다본다. 아니, 그건 좀 소름 끼치니까 딸 낳은 중전은 이송하고 나는 중전의 친정 오빠 정도로 하자.

그건 그렇고, 뒤에는 마녀, 앞에는 배신자라.

하하. 끝내주네. 이놈의 회사가 내 영혼을 더럽히고 있어. 조만간 형네 집에 가서 네쌍둥이들한테 힐링 좀 받아야지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채영이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한참 찾았네. 내 드라마 봤어요?”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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