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4화 (64/218)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2) >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놀라서 멈춰있던 가슴이 빠르게 들썩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송하의 말이 메아리처럼 뇌리를 뱅뱅 돌아다녔다. 태희 언니가 만든 노래도 좋은데. 태희 언니가 만든 노래도…….

그랬지. 맞다. 이태희는 작곡을 하는 애였지!

왜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까. 내가 처음 고준태 피디 앞에서 넵튠을 어필할 때, 내 입으로 직접 떠들기까지 했었는데. 이태희는 작곡에 작사 실력까지 좋은 애라고.

설마 이건가?

이태희의 자작곡이, 원래의 미래에서 타이틀 곡이 되었던 그 곡인가?

“어떤 노래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다. 목소리도 조금 잠겼다. 이상한 점을 눈치채진 못했는지, 이송하가 앞좌석의 등받이에 살짝 턱을 얹는다. 힐끔 보자 어둑한 시야로 이송하의 눈이 보인다. 중첩된 피로로 몽롱하던 눈이 부드럽게 젖어든다.

“저는 되게 좋았어요.”

“그래?”

“빠르고 신나는 노랜데요. 이상하게 저는 그거 들었을 때, 꼭 우리 노래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노래라고?

“언니들 생각도 나고, 엄청 노력했는데도 앨범이 계속 망해서 막막하고 속상했을 때 생각도 나요. 넥스트 K스타 캐스팅된 날, 새벽에 오빠한테 연락받고 다들 난리 났었던 것도. 캐스팅 도로 엎어질까 봐 그날 밤에 한숨도 못 잤던 것도 기억나요. 그리고…… 오빠가 자꾸 연기해 보라고 해서 도망 다니던 것도.”

조근조근 이야기하던 이송하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그 노래는 정말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촬영장으로 가는 내내 나는 이송하의 말을 곱씹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졌다. 넵튠의 지난날들이 떠오르는 노래. 그런 거라면, 넵튠하고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던 박국장의 말과도 연결고리가 생기니까.

그런데 왜 이번 곡 수집 기간에 내놓지 않았을까.

중요한 시기라 자작곡을 선보이긴 부담스러웠나? 그럴 리는 없는데. 디지털 싱글이라면 모를까,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건 미니앨범이니까. 타이틀 곡이 아니더라도 수록곡으로 들어갈 기회도 충분히 열려 있잖아.

왜 말을 안 했지?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혼자 고민해 봐야 답은 안 나온다.

일단 이태희를 만나서 확인해보자.

밤 씬 촬영을 끝내고 넵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열 시였다.

패딩인지 침낭인지 헷갈릴 정도로 풍덩한 옷에 둘둘 말려있는 이송하를 깨웠다. 함께 숙소로 들어가자, 비척비척 걷던 이송하가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같이 올라가세요?”

“응. 태희가 만들었다는 노래 좀 들어보고 싶어서. 좋다며?”

내 말에 이송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곧이어 입술 밖으로 비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허수아비 팔처럼 길쭉하게 내려온 패딩 소매가 앞 뒤로 흔들린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소로 들어가자 거실 러그에 엎드려 있던 임서영이 구르듯이 일어난다. 넥스트 K스타의 재방송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는지, 화면에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보인다. 그중 사이먼 리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멈추었을 때, 임서영이 조르르 다가온다.

“고생하셨습니다! 밖에 엄청 춥던데 송하 너도 꽝꽝 얼었겠다, 야. 얼른 뜨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와. 넌 뜨거운 물을 펑펑 쓸 자격이 있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태희와 엘제이도 각자 방문을 열고 나왔다. 느긋하게 걸어온 이태희가 손가락으로 이송하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빗어 내린다. 차 안에서 조느라 헝클어진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임서영이 물었다.

“근데 어떻게 같이 오세요? 이 시간에 대본 연습하시려구요?”

“아니, 태희한테 볼 일이 있어서 왔어.”

내 대답에 이태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저한테요?”

“송하가 니가 만든 곡이 좋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곡이요?”

차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이송하가 말했던 감상을 들려주자, 이태희가 따듯한 시선으로 이송하를 쳐다본다. 그리고 기껏 쓰다듬어 놓았던 머리를 도로 휘적휘적 헝큰다. 좀 망설이는 기색이긴 했지만, 결국 이태희가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열린 문 너머로 언뜻언뜻 본 적은 있어도 안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다. 전체적으로 깔끔, 아니, 황량한 방이었다.

그리고 뭔가가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책상. 그 위에 노트북과 키보드처럼 생긴 미니 건반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텅 빈 맥주캔이 하나, 둘, 셋……. 아예 음료수처럼 부어댄 게 분명하다. 이거 위험한 건 아니겠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태희가 태연히 쓰레기통에 맥주캔을 쓸어 넣는다.

“이거예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노트북 화면을 가리킨다.

보기만 해도 복잡해 보이는 툴들이 가득 차있다. 나는 의자 뒤로 바짝 붙어 섰다. 이송하와 임서영, 엘제이까지 내 옆으로 다닥다닥 모여든다. 다들 이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나만큼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들은 아니었지만, 기대감만큼은 뚜렷하게 보인다.

나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내가 생각하던 그 곡이 아니더라도, 실망하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이태희가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인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직 가사가 없는 곡에 이태희의 감미로운 허밍 소리가 불어넣어 진다. 듣고 있던 다른 멤버들이 함께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린다. 귓속으로 선명하게 흘러드는 음악과, 미래에서 들었던 음악이 기억 속에서 오버랩 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쭉 올라왔다.

이거다. 틀림없다.

내가 미래에서 들었던 그 곡이다.

넵튠의 첫 번째 히트곡.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던 곡. 그리고 넵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곡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바삐 굴러갔다.

이제 어쩐다.

이미 우리 손에는 사이먼 리가 작곡한 곡이 있다. 타당한 이유도 없이 그 곡 말고 이태희의 자작곡을 타이틀 곡으로 하자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배신자가 오랜 시간 공들여서 받아낸, 훌륭한 곡이니까.

입장 바꿔서 내가 노력해서 따온 곡을 동료가 이유도 없이 까면 쌍욕밖에 더 나오겠느냐고. 그냥 천하에 둘도 없는 개새끼지.

게다가 곡을 준 사이먼 리와의 관계도 껄끄러워질 게 뻔하고.

사이먼 리의 곡과 이태희의 자작곡을 더블 타이틀로 미는 건 어떨까?

요즘은 곡만 좋으면 더블, 트리틀 타이틀로도 승부를 거는 경우가 있으니까. 뮤직비디오도 똑같이 찍고, 프로모션도 동급으로 해서 밀어주면. 잘못하면 대중의 관심도가 분산돼서 어정쩡한 결과를 낼 수도 있지만, 잘하면 두 곡이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다.

실제로 성공해서 차트 상위권에 여러 곡이 진입했던 사례도 있고.

그렇게 하면 이 자작곡은 예정대로 음방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고, 만약 사이먼 리의 곡까지 반응이 괜찮으면 완전 땡큐지. 물들어왔을 때 빡세게 노를 저어야 하는데 노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까.

생각에 잠겨있을 때, 곡의 여운에서 벗어난 임서영이 불쑥 말했다.

“저번에 들었을 때보다 더 좋다. 이거 이번 앨범에 넣어보지, 왜?”

“그러게. 타이틀 곡 말고도 수록곡 네 곡 정도 더 들어가잖아.”

엘제이도 거든다.

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 내가 들어도 좋은데. 왜 곡 수집 기간에 안 들려줬어? 이번 앨범에 넣는 걸 목표로 만든 거 아냐?”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태희가 갑자기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안색이 우중충해진다. 이태희의 머리 위에 미니사이즈 먹구름이 둥둥 떠 있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다. 이태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좀 당황했다. 먹구름이 퍼붓는 장대비에 얻어맞고 있던 이태희가 대답한다.

“마음에 안 들어서요.”

“뭐?”

“아직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이런 대답은 예상 못 했는데.

나는 하얗게 밤을 불태우고 잿가루를 풀풀 날리며 출근했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의 성공으로 날아갈 것 같았는데, 오늘은 머리통 대신 볼링공을 얹고 다니는 기분이다. 더럽게 무겁다.

찾던 곡을 찾아냈는데, 아직 완성이 덜 됐다니.

최대한 서둘러 보라고 말해놓긴 했지만 늦기 전에 이태희가 자작곡을 완성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이게 창작물이니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미래에서 들었던 곡과 뭐가 다른지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잘 모르겠다. 이 거지 같은 기억력. 그걸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이태희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뭔지 알 수 있을 텐데.

어디서부터 톱니바퀴가 어그러진 거지.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내가 현재를 바꾸는 바람에 넵튠의 앨범 발매 시기가 원래보다 빨라졌던지, 아니면 이송하 논란과 관련된 일로 멤버들이 단체로 마음고생을 했던 게 영향을 미쳤던지.

원래의 미래에서도 넵튠은 넥스트 K스타에 출연했었고, 방송으로 쌓은 인지도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전에 서둘러 새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진짜 환장하겠네.

많은 사람이 매달려서 준비하고 있는 일인데 앨범 일정을 무턱대고 미룰 수는 없고.

미완성 곡이라도 일단 김현조랑 3팀장한테 들려주고 설득해보는 건 어떨까. 두 사람이 듣고 마음에 들어 하기만 하면, 곡이 완성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더블 타이틀로 나갈 수 있을지도…….

고민을 질질 이어나가고 있는데 눈앞에 숟가락이 왔다 갔다 한다.

고개를 들자 배신자가 보인다.

“밥 나왔어.”

“아.”

언제 나왔는지, 식탁 위에 통통한 굴과 부추가 푸짐하게 올라간 굴국밥이 뽀얀 김을 흩뿌리고 있다. 보자마자 굶주린 내장이 춤을 춘다. 모처럼 점심에 스케줄이 비어서 둘이 회사 앞 식당에 나온 참이었지. 정신을 차리고 나도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몇 번 숟가락질하다가, 배신자가 여유롭게 말을 걸어온다.

“너 얼굴이 완전 시첸데? 실장님 뺨치겠다.”

“너도 얼마 전까진 만만치 않았거든.”

“그랬나?”

“갑자기 담배를 뻑뻑 피우질 않나, 시체 꼴로 다니질 않나.”

배신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다 사이먼 리한테 곡 받아내느라 그런 거였구나. 진짜 고생했겠다. 대단하다, 너.”

이것만큼은 진심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스타 작곡가라는 수식어 때문인지 목에 심이 뻣뻣하게 들어간 양반인데. 게다가 세라픽 못잖은 정상급 걸그룹에게 주려던 곡이라면, 넵튠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 거다. 그걸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나였다면 설득할 수 있었을까.

배신자가 웃음을 짓더니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뭐, 부탁도 해보고, 설득도 해보고. 그 곡 손에 넣으려고 별의별 시도를 다 해봤어. 덕분에 성과를 냈으니 다행이지. 사실 이번 일이 잘 안 됐으면…… 팀을 옮기거나 이 회사 그만두자는 생각마저 했었으니까.”

숟가락을 들다가 멈칫했다.

배신자가 계속 말한다.

“내가 누구한테 져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솔직히 회사생활도 자신 있었는데, 여기선 생각대로 안 되더라고. 니가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물어오는 일마다 다 성공하니까 생각이 좀 복잡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이번 일을 잡은 거니까, 오히려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지만.”

새삼 배신자의 얼굴이, 최건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최건영을 편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건, 출근 첫날 예지 능력으로 보았던 미래 때문이었다. 최건영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기회를 가로챘다는 정보, 그리고 그분은 그때부터 그랬었느냐는 송기자의 말.

그것 때문에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경계심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배신자라고 부르기로 했고.

하지만 최건영은 지금까지 내 뒤통수를 치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검은 속내 따위를 드러낸 적도 없다. 오히려 혼자 힘으로 사이먼 리의 곡을 받아오기까지 했지.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서 최건영을 배신자라는 단어 안에 묶어둔 동안, 저 녀석도 나 못지않게 애쓰고 노력했다.

최건영이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앞으로도 같이 잘 해보자.”

얼마 전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 뒤통수를 쳤던 그 최건영이랑, 지금 내 앞에 있는 최건영은 이미 똑같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건영을 진심으로 믿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최건영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돌연 눈앞이 깜깜해졌다.

<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선택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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