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1화 (61/218)

< 슛 들어가겠습니다 (4) >

“나한테 뭐 할말 있어?”

배신자가 물었다.

뜨끔할 것도 없다. 넥스트 K스타 녹화장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계속, 대놓고 쳐다보는 중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배신과 전쟁으로 얼룩진 시나리오가 뽑혀 나오고 있다. 그 속에서는 이미 뒤통수를 백번쯤 맞았고 나도 백번쯤 쳤다.

“있어.”

“해, 그럼. 심각한 얘기야?”

“그런 건 아니고.”

배신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실장님이 너 요즘 공들이는 게 있다길래, 뭔지 궁금해서.”

“아······ 그거.”

엄지로 아랫입술을 쓸면서 나를 힐끔 본다. 그려놓은 것처럼 웃기만 하던 입술이 조금 비틀려 있다. 난처해 하는 표정이다.

곧 배신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미안. 아직은 말하고 싶지가 않네.”

“말하고 싶지가 않다고?”

“잘 풀리면 그때 얘기하자. 다 떠들어놓고 어그러지면 쪽팔리잖아.”

배신자가 웃는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친다.

다른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어도 궁금해서 사지가 뒤틀릴 판에, 심지어 최건영이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붙어있는 동료이면서도,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잠재적인 폭탄.

계속 이런 상황을 유지할 수는 없다.

언제 터질지 계속 신경 쓰는 것보다는, 아예 눈에서 멀어지는 게······.

차가운 머리로 생각했을 때였다.

오랜만에, 세상이 깜깜해졌다.

노이즈가 심한 시야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얼마 만이더라.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예지능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갑자기 생긴 능력이니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는 거고, 없어지면 어떻게 다시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기대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이렇게 미래를 눈앞에 두니까 내가 이걸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그리고 지금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알겠다.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며, 뭐라도 놓칠세라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는 모르겠다.

노이즈가 너무 심하고 뚝뚝 끊어진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눈앞에 김현조와 배신자가 앉아있다는 거다. 둘 다 헤어스타일은 지금과 거의 흡사하다. 외모에도 변화가 없고. 김현조는 두툼한 겨울용 목티를 입고 있다.

아주 가까운 미래인 것 같은데.

“나도, 영훈이 형도 다 헛수고라고 생각했는데. 너도 참 독한 놈이다. 뭐가 되도 될 놈이야.”

김현조가 혀를 내두르며 웃었다.

배신자는 뿌듯함을 다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보면 선우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라고?

드디어 내 뒤통수를 후려친 건가, 싶었을 때 배신자가 웃었다.

“같은 날 입사해서 일을 시작했는데 점점 격차가 벌어지니까, 저도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구요.”

시야가 다시 뒤집어졌다.

나는 다시 공개홀 관객석 앞에 서 있다. 옆을 돌아보자 배신자가 보인다. 녹화가 진행 중인 무대를 응시하면서 웃고 있다. 조금 전 미래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웃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던 그런 일은 없다는 건가?

김현조가 좋아하던 모습을 보아 배신자가 공들이는 일이라는 건 우리한테, 즉 넵튠한테 도움이 되는 일일 가능성이 큰 것 같고. 어쨌든 김현조도 알고 있었던 일이니까 나쁜 의도를 드러낸 일은 아닐 텐데.

안도하는 한편,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미 미래를 보고 현재를 바꾼 적이 있고, 그 때문에 미래가 변하는 걸 겪은 적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뒤통수를 쳐서 기회를 가로챈 최건영과 지금 내 옆에 있는 최건영이 반드시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쩌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최건영의 머리통 속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백 프로 확신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난 절대로 최건영을 진심으로 믿지 못할 거다.

그리고 더 이상 최건영을 보지 않을 기회가 온다면, 그렇게 하겠지.

*

“뭘 달라고?”

TVL 드라마국 국장, 배장호가 서류에 사인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고양이 수호령의 담당 CP인 송 부장과 신태균 감독이 나란히 서 있었다. 헛기침한 송 부장이 입을 떼려는 찰나, 신태균 감독이 말했다.

“특별편 내보내게 편성 주십시오.”

“이 자식이 대뜸, 너 국장님한테 편성 맡겨놨어?”

송 부장이 신태균 감독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신태균 감독이 밤샘촬영과 편집으로 피로한 표정을 좀 더 찌푸렸다.

“저번에 그거 농담 아니었어?”

배 국장이 송 부장에게 물었다.

“그때는 뭐, 농담 반 진담 반이었는데, 지금은 진담이에요. 편성 확인해보니까 끼워 넣을 수 있겠던데요.”

“이거 출연배우 라인업이 블록버스터 영화급이야?”

“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죠.”

“그럼 시청률 10프로 이상 뽑을 자신 있어?”

“국장님, 허들이 너무 높잖아요. 10프로 넘으면 역대급인 건데.”

송 부장이 엄살을 떨자 배 국장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드라마만 특별편 편성했어.”

“그런데 이건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지금 화제성은 폭발적으로 높은데, 관심이 드라마보다 이송하 개인한테 더 쏠려있어서 자칫하면 이송하 논란 사라지는 즉시 관심도 떨어질지도 모른다구요. 그러니까 특별편 만들어서 논란 화끈하게 정리하고, 관심도 이탈하지 않게 드라마로 싹 흡수시켜 보자는 거죠.”

“······.”

열띤 설득에 배 국장이 고민하는 듯 턱을 만졌다.

신태균 감독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1, 2부 편집본 한번 보시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럼.”

그의 말에 배 국장이 만년필을 내려놨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후.

배 국장은 검은 화면으로 돌아간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편성 빼 올 테니까, 해 봐.”

사흘 뒤, Knet 지하식당.

고준태 피디 역시 담당 CP인 박 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형, 지금 편집하고 있는 편 나가면 시청률 8프로 찍는다.”

“8프로? 그럼 그 날은 내가 단체회식 한 번 쏜다.”

오늘도 화려한 머플러를 두른 박 팀장이 찌개를 뒤적이며 말했다.

“뭔데 그렇게 자신 있어? 이틀 밤새웠다더니 편집 끝내주게 했냐?”

“끝내주지. 이건 나가면 무조건 실검이야. 이송하랑, 펀치라인에 랩 하는 멤버 하나 있거든. 걔랑 엮어서 핑크빛 기류를 좀 만들어 보려고. 살살 썸타는 것처럼.”

“뭐?”

박 부장의 미간을 좁아졌다. 그걸 못 봤는지, 고준태 피디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펀치라인 걔가 이송하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몇 번이나 카메라에 잡혔어. 펀치라인이 출연팀 중에 제일 인기가 많아서, 썸에 쌍시옷만 던져줘도 반응 화끈할걸? W&U에서는 또 지랄하겠지만 그건 저번처럼 잘······.”

“야, 그거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다.”

뚝, 박 부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안 좋다니?”

“국장님이 TVL쪽에서 흘러나온 얘길 들으셨다는데, 그쪽에선 고양이 수호령이 못해도 중박, 잘하면 대박이라고 소문났단다. 아예 특별편까지 편성했다더라고. 그래서 국장님이 서지준 일찌감치 섭외해 놓으라고 하셨거든.”

“그런데?”

“피디 몇 명이 걸어놓긴 했는데, W&U 반응이 영 시큰둥해. 지금은 작품에 집중하고 싶다나. 이러다 내가 나서서 설득해야 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서지준 잡을 때까지 W&U는 너무 건드리지 마라.”

고준태 피디가 숟가락을 탁 내려놨다.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형, 이거 편집하느라 밤새웠어. 죽여주게 붙여놨다니까.”

“방송까지 시간 좀 남았으니까 다시 붙이면 되잖아. 아예 버리라는 게 아니고, 일단 킵 해놓고 서지준 픽스한 다음에 쓰면 되고.”

“아니, TVL 드라마국에 얘기해서 다리 놔달라고 부탁하면 금방 픽스될 거 아냐. 어차피 거기도 드라마 홍보하려고 주인공들 예능 돌리려고 할 텐데.”

“니가 저번에 물 먹인 게 있는데 잘도 도와주겠다.”

박 부장이 혀를 찼다. 뒤늦게 저번 일이 생각난 고준태 피디가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먼저 이송하와 고양이 수호령을 엮어서 논란을 만들어낸 건 이쪽이었으니, TVL 드라마국에서 곱게 볼 리가 없긴 했다.

“뭐, 결과적으로 덕분에 홍보 잘했잖아.”

고준태 피디가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 구시렁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 홍보 엄청 잘했지. 드라마 안 보는 내 딸도 고양이 수호령이 뭔지 알더라. 그런 상황인데 홍보 때문에 억지로 예능 출연하겠느냐? 거창하게 특별편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에?”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박 부장이 문득 눈을 빛냈다.

“야, 그러지 말고 넥스트 K스타에 서지준 한 번 넣어보지?”

“뭐?”

“끼워 넣는 거야 넵튠 응원이든 뭐든 갖다 붙이면 되는 거고. 한창 핫할 때 이송하랑 투샵 잡아서 내보내면 8프로 찍지 않겠어?”

언제 불만을 표했느냐는 듯, 고준태 피디의 안색이 밝아졌다.

“내 거에다 꽂아주게? 그럼 나야 당연히 땡큐지.”

“아니, 니가 한 번 잡아보라고.”

밝아졌던 안색이 도로 칙칙해진다.

“형이 나서야 할 판이라며, 내가 어떻게 잡아?”

“너 이송하 매니저 알지? 드라마 촬영 때 같이 다니는 매니저.”

“매니저?”

기억을 되짚는 듯 고준태 피디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드라마 따라다니는 매니저면 실장은 아닐 거 같고, 그럼 둘 중 한 명인데. 인상 좋은 쪽이랑 안 좋은 쪽.”

“들어보니까 이송하 매니저가 서지준네 실장이랑 사이가 좋대. 니가 그쪽에다가 한번 부탁해보면 어때? 서지준이 그 실장 말은 잘 듣는다고 하던데.”

고준태 피디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비튼다.

“뭘 하라고? 나더러 로드한테 아쉬운 소리 하면서 매달리라는 거야?”

“매달리긴, 그냥 부탁 좀 해보면 어떠냐는 거지. CP인 내가 할 수는 없잖냐. 그리고 생각해 봐라. 다른 피디들이 못 잡고 있는 서지준, 시청률까지 쭉쭉 잘 뽑고 있는 니가 잡아봐. 국장님이 얼마나 좋게 보시겠냐.”

국장님까지 거론되자, 고준태 피디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던 그가, 이윽고 입을 뗐다.

“······그래, 까짓거 내가 부탁해볼게.”

박 부장이 반색한 순간.

고준태 피디가 다리를 꼬며 덧붙였다.

“그 드라마가 내 거보다 시청률 잘 나오면.”

*

아침부터 공기가 달랐다.

좀 우습긴 한데, 정말 그랬다.

밀도가 높다고 할까. 무겁게 느껴진다고 할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르다.

이날을 정말 오래 기다렸는데, 막상 결전의 아침이 밝으니 그저 멍할 뿐이다. 잠을 너무 많이 잤나. 그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하품을 하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한다.

더듬더듬 찾아서 열어보니 문자 메시지와 톡이 징그럽게 찍혀 있다.

부모님과 형네 가족에게서 온 것도 있고, 친구놈들한테서 온 것도 있다.

박우정 기자한테서도 왔고, 회사 직원들과 넵튠 멤버들, TVL과 판 프로덕션 쪽에서도 왔다. 그밖에 이름 모를 기자, 피디, 작가들까지.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내 핸드폰이 유난히 인기가 많아지긴 했지만, 오늘은 개중에서도 최고다.

쭉쭉 확인해보니 공통적인 내용이 있다.

‘기사를 봤다.’

바로 일어나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포털에 접속하자마자, 메인에 굵은 헤드라인이 눈에 띈다.

[‘고양이 수호령’ 특별편성, 제작진 ‘논란 뿌리 뽑고 갈 것.’]

[말 많고 탈 많던 ‘고양이 수호령’ 오늘 밤 베일 벗고 특별편 방영]

그걸 보고나니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진다.

정말 오늘이구나.

오늘이 바로 고양이 수호령이 특별편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리고 헤드라인에 걸린 자신만만한 멘트처럼, 한 달 이상 이어졌던 모든 논란을 뿌리 뽑는 날이기도 하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인터넷의 여론을 살폈다.

-논란 뿌리 뽑고 갈 것? 제작진 패기 보소ㄷㄷㄷㄷ

-이거 드디어 하는구나ㅋㅋㅋ 내가 연말보너스보다 이걸 더 기다렸음ㅋㅋㅋ 드라마 자체는 큰 관심 없는데 이송하 연기가 너무 궁금함.

-근데 이렇게 화제 끌어놓고 연기 개판이면 진짜 희대의 사기극임.

-희대의 반전이 될 수도 있죠.

-깔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지간한 연기로는 반전시키기 쉽지 않을 듯. 언론으로 천재 드립만 안 쳤어도 이송하가 이만큼 극성 안티 끌지는 않았을 텐데.

-어지간한 연기로는222 메소드 연기쯤 해줘야 인정하고 찬양할 듯.

-논란 일어나고 시간 꽤 지났는데도 핫한 거 봐ㄷㄷㄷ 사람들 반응만 구경해도 꿀잼 핵잼이겠네요. 맥주 세팅해놓고 달려야지.

읽다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반응은 지금까지 중 가장 뜨겁다.

이송하에게 악의를 토하는 사람,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사람, 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뭉쳐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좋은 목적이든, 안 좋은 목적이든 간에, 오늘 밤 이 사람들은 모두 TV 앞에 앉게 되겠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노트북을 닫았다. 머릿속에 몇 가지 궁금증이 떠다닌다.

고양이 수호령의 성적은 어떻게 될까. 출연자가 바뀌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을 때부터 이미 내가 본 미래의 드라마와는 한참 달라졌다. 하지만 신태균 감독의 연출을 봤고, 배우들의 연기를 봤다.

이 드라마가 망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든다.

궁금한 것은, 과연 어디까지 성공할 것인가다.

그리고 오늘을 기점으로 앞으로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질까.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샤워를 하고 느긋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어차피 오늘은 넥스트 K스타도, 고양이 수호령도 촬영이 없다. 넵튠 멤버들은 온종일 숙소에서 보낼 거고, 나와 김현조, 배신자도 오후에 회사에서 만나서 숙소로 이동할 생각이다.

지난번에 함께 넥스트 K스타 첫방송을 모니터링하며 봤던 것처럼, 고양이 수호령의 특별편을 볼 계획이니까.

가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원룸을 나섰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덟 시간 후.

나는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놨다. 그리고 툭, 새로고침 키를 눌렀다.

-퇴근하는 중인데, 고양이 수호령 시작했나요?!

-아직 광고 중. 아, 지금 끝났어요.

-시작하네요!

< 슛 들어가겠습니다 (4)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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