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57화 (57/218)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8) >

“……!”

손채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었다. 마네킹처럼. 부릅뜬 눈에서 눈동자만 천천히 기울어지는 것을 보니, 뭐가 자기 얼굴을 덮쳤는지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티라미스 케이크는 손채영의 왼쪽 얼굴에 시커멓게 들러붙은 채로 질질 흘러내렸다.

나는 평생에 두 번은 못 볼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잠깐 생각했다.

비싼 돈 주고 산 케이크가 저 지경이 됐지만, 결코 돈이 아깝지는 않다고.

메뉴 선택도 아주 좋았다. 그냥 생크림이었다면 좀 아쉬웠을 거야.

“이, 이게, 이걸, 채, 채영아…….”

조 실장의 더듬거리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는 끔찍한 공포 영화를 본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가, 이송하를 쳐다보았다가, 주머니를 뒤졌다가 하더니 티슈를 찾아오겠다며 황급히 사라졌다.

“……너 미쳤니?”

손등으로 뺨을 닦은 손채영이 거칠게 케이크 덩어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조금 전처럼 흥분한 짐승처럼 날뛸 줄 알았는데, 폭풍 전의 고요 같은 건지 예상 밖의 차분한 목소리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살벌하다.

혹시 몰라서 한쪽 팔을 들어 이송하 앞을 가로막았을 때.

“아니요.”

뒤에서 이송하가 대답했다.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데 반해,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손채영이 다시 손을 올리면 이번엔 케이크 상자도 집어 던질 기세다.

그랬지, 참.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이송하가 기가 죽는 건 본인이 잘못하거나 실수해서 팀에 폐를 끼쳤을 때지, 그런 게 아니라면 할 말은 하고, 들이받을 땐 들이받는 성격이라는 걸.

“시작은 그쪽이 먼저 했어요.”

“그쪽?”

손채영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는다. 이송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쪽이 때리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이 맞았니? 미꾸라지처럼 피했잖아. 그리고 매니저한테 화풀이 좀 했다고, 소속사 선배한테 케이크를 집어 던져? 너 사람들이 천재, 천재 치켜세워주니까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니? 이러고도 니가 앞으로……!”

“화풀이하지 마세요.”

이송하가 말을 뚝 잘랐다.

“뭐?”

“남의…….”

남의?

“남의, 오빠한테 화풀이하지 말라구요.”

뭔가 급하게 말을 바꾼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더 궁금해할 틈은 없었다. 손채영의 등 뒤로 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여전히 창백한 조 실장이 바깥을 힐끔거리며 문을 닫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티슈 곽을 들고.

“채영아, 일단 누가 보기 전에 얼굴부터…….”

“오빤 지금 누가 보는 게 문제야? 내가, 케이크에 맞았는데?”

손채영이 티슈를 홱 낚아채며 쏘아붙였다. 조 실장이 아차 하며 찌푸린 얼굴로 이송하를 쳐다본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나 그의 표정은 곧 떨떠름해졌다. 조 실장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손채영이 심경택 선생에게 부탁해서 이송하 앞길을 한번 가로막았다는 걸. 그러니까 큰소리를 못 내지. 손채영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케이크에 얻어맞는 정도가 아니라 돌팔매질을 당해도 싸니까.

조 실장은 이송하 대신 나를 걸고넘어졌다.

“넌, 임마! 말릴 생각은 안 하고 그걸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

“미처 못 봤습니다. 심경택 선생님 생각을 하느라고.”

내 말에 조 실장은 불시에 습격당한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손채영이 얼굴을 닦던 티슈를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다.

“짜증 나서, 진짜. 이 일로 심 선생님 걸고넘어질 생각하지 마세요. 다 들었다면서요. 내가 그랬어요. 내가 선생님한테 이송하 연기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구요.”

“채영아!”

조 실장이 식겁해서 문밖을 살핀다.

나도 순간 멈칫했다. 아무리 심경택 선생이 다 토해냈다고 해도, 손채영이 본인 입으로 저렇게 태연하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이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덜컥 걱정돼서 이송하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송하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동요가 적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처럼 고요하고 깊숙이 가라앉은 눈으로 손채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그 눈으로.

“그런데 그거 알아내서 어쩔 건데요.”

손채영이 도리어 나한테 질문했다.

“누구한테 하소연하려고? 본부장님? 대표님? 가서 해봐요. 대표님이 나한테 뭐라고 할 것 같은데요?”

“채영아, 너 진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조 실장이 손채영의 팔을 잡고 말리자, 손채영이 목소리를 높인다.

“어차피 이 둘 말고는 듣는 사람도 없잖아! 그리고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쪽팔려서 숨긴 거지 무서워서 숨긴 건 줄 알아?”

“너, 하아, 팀장님한테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분명히……!”

“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 쟤가 내 작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짜증 나서 대본도 손에 안 잡히고 잠도 못 잤단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이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담당 매니저인 조 실장마저도 말문이 막힌 표정이다. 그는 손채영을 저 혼자 움직이고 불붙어 터지려는 폭탄처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손채영은 멈추기는커녕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그 뒤로 내 마음이 편해졌잖아, 오빠.”

“뭐?”

“거슬리는 게 없어지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스트레스도 안 받고. 그 덕분에 드라마도 잘 되고, 영화도 잘 되고. 내가 작년이랑 올해 찍은 광고가 몇 갠데. 쟤가 계속 연기를 했더래도 설마 나보다 더 벌었겠어? 그거 생각하면 회사 차원에서도 더 잘된 거 아냐?”

화가 치밀었다가, 식었다가, 기가 막혔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이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배우가 아닌 손채영이라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깨끗하고 순수한 가면을 벗겨내고 나니, 그 속에 있는 건 형체도 불분명한 징그러운 괴물이다.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요?”

내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손채영이 비웃듯이 말한다.

“나 이번 계약기간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본부장님이건 대표님이건, 나한테 뭐라고 안 해요. 당장 1월부터 나가는 드라마에, 광고도 연장해야 하고, 나 하나한테 걸려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아. 이거였구나. 심경택 선생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의 의미가.

차라리 모르고 넘어가는 게 좋았을 거라던 말.

“대표님이 사과하라고 하면, 뭐, 그 정도는 생각해 볼게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별것도 아닌 일로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라구요. 그쪽이 일 시작 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이 바닥이 원래 이런 거예요.”

턱까지 차오른 수많은 말들을 눌러 삼키고, 한 가지만 이야기했다.

“일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도 제대로 배운 건 하나 있는데요.”

“배운 거?”

고소 짓던 손채영의 눈이 가늘어진다.

나는 이송하를 바라봤다. 여전히 내 반걸음 뒤에 우뚝하게 서 있다.

하지만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껏 내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도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순진하기만 한 놈은 아니다. 손채영의 말을 듣고도 백한성 대표가 손채영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우둔한 거지.

이 바닥은 불합리와 부조리의 온상이다. 특히 연예 매니지먼트사라는, 갑을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는 거대한 먹이사슬 집단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손채영은 그 먹이사슬의 상층부에 서식하는 탑스타고, 나와 이송하는 한참 아래, 잘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가 이제 막 머리를 내밀고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본 참이다.

하지만 그런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바닥은 정말, 하루 앞일을 모른다는 거요.”

약속시각을 한참 넘겨서 김현조와 3팀장이 도착했다.

회의실 바닥에 떡칠한 케이크, 그리고 아직도 손채영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코코아 가루를 확인한 3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이 등장하자 손채영은 방해라도 받은 것처럼 혀를 찼다.

그리고 3팀장에게 목인사를 하고 나가버린다.

“손채영.”

3팀장이 부르자 손채영이 걸음을 잠깐 멈춘다.

“너 이건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 아니다.”

“똑같은 말 계속하려니까 피곤하네요. 저희 팀장님이랑 얘기하세요.”

손채영은 빙긋 웃는 얼굴로 말하고는 두 번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조 실장이 3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그 뒤를 따라간다.

김현조와 3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둘 다 아까의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표정.

새삼 탑스타의 유세라는 게 참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더러운 꼴을 보고 듣지 않으려면 대표라는 직함 정도는 달아줘야 한다는 생각도.

“버르장머리하곤. 저건 인간이 덜됐어, 인간이.”

3팀장이 빈자리에 앉으며 나한테 말했다.

“심경택 그 우라질 놈이 2팀장한테도 전화했나 보더라. 주제넘은 짓을 했네, 어쩌네, 씩씩거리면서 너 찾아다니고 있길래 한판 하고 오느라 늦었어.”

“널 갈아 마시려고 하던데.”

김현조도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인다.

이미 2팀장한테는 성도원 일도 있고 해서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는데, 이걸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겠구나. 뭐, 이 사건에 한해서는 돌이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3팀장이 내 팔을 툭툭 친다.

“너는 더 신경 쓸 거 없어. 2팀장한테는 내 지시였다고, 너한테 괜히 분풀이할 생각 하지 말라고 단단히 박아놨으니까.”

“아, 네.”

“지가 발등 찍혔다고 엄한 데다가 분풀이를 하려고 들어? 애초에 제 새끼 관리나 잘할 것이지, 나 같으면 쪽팔리고 면목없어서 얼굴도 못들겠구만.”

3팀장이 계속 구시렁거리자 김현조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환기한다.

“일단 형도 나도 녹음파일은 들었는데, 처음부터 얘기해 봐.”

나는 여전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송하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오전에 심경택 선생과 있었던 일부터 조금 전의 사건까지. 적당히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김현조와 3팀장의 표정이 한없이 흉악해진다. 지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사자인 이송하뿐이다.

아니, 저 정도면 침착을 넘어 부동심의 경지다.

반면에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격렬하게 반응하며 추임새로 듣도 보도 못한 욕설을 던지던 두 사람은, 손채영이 본부장과 백한성 대표를 거론했던 부분까지 듣고 나자 성난 황소들처럼 거칠어졌다.

“패악도 정도껏 떨어야지. 그 정도면 미친년이다, 미친년.”

“송하야, 케이크가 아니라 테이블을 집어 던지지 그랬냐.”

3팀장의 말에 김현조가 음산하게 덧붙였다. 나도 심히 동감하는 부분이다.

“형, 손채영 재계약 얼마나 남았어?”

“나도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데, 지난번에도 2년짜리 전속으로 계약했었으니까 얼마 안 남기는 했지. 그래서 2팀장이 지난달부터 손채영 비위 맞추느라 바빴잖아. 홍보팀 박 팀장도 진 다 빠졌고.”

“혹시, 본부장님이랑 대표님이 진짜로…….”

김현조가 이송하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 손채영의 말대로, 본부장과 백한성 대표가 얼마 남지 않은 손채영의 계약기간 때문이 이 일을 대충 덮고 넘어가려고 하진 않겠느냐. 그걸 걱정하는 거겠지.

3팀장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여기가 손채영 1인 기획사도 아니고, 자기가 한 짓에는 책임을 져야지. 심경택 그놈도 마찬가지고. 내가 알아보니까 송하 말고도 전적이 있는 모양이던데, 본부장님이랑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상의해볼게.”

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이송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일어났다.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나갔으니 목적지는 조 실장이나 2팀장이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나도 나가려는데, 회의실의 참상이 눈에 밟힌다.

팔을 걷어붙이고 사방에 칠갑이 돼 있는 케이크를 닦았다. 옆에서 티슈를 쏙쏙 뽑으며 거들던 이송하가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케이크 사주신 거 던져서요.”

그러면서 테이블 밑에 떨어진 케이크 덩어리를 아깝다는 듯이 쳐다본다.

손채영의 악의 때문에 인생이 비틀릴 뻔했다는 걸 알았는데, 심각한 얼굴로 한다는 말이…… 저 작은 머리통 안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한 번쯤 열어서 들여다보고 싶다. 이 순간만은 내 능력이 독심술이 아닌 게 아쉽다.

“한입밖에 못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저거 비싼 거죠.”

“아냐, 잘 던졌어.”

그까짓 빵값.

“보람찬 일에 썼으니까 됐지, 뭐.”

케이크 떡칠이 됐던 손채영의 얼굴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난다. 이송하도 같은 장면을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워하지 마. 더 큰 놈으로 새로 사줄게.”

“네.”

티슈를 케이크 상자에 열심히 주워담던 이송하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저 마녀요.”

“응?”

“제가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멀리 쫓아낼 수 있어요?”

이송하를 숙소로 데려다 주고 퇴근한 후로도, 줄곧 이송하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손채영을 멀리 쫓아낼 수 있느냐는 말.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되새길수록 묵직하게 느껴진다.

책상 의자에 늘어져서 고민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다.

뭐, 내 핸드폰 번호가 공공재가 됐는지 방송작가, 연예부 기자들이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대고 있어서 이젠 모르는 번호도 익숙하다.

“네, 정선웁니다.”

-음. 통화 괜찮아?

깜짝이야.

황급히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돌려서 번호를 확인했다.

내가 이 번호를 회사 내부 연락망에서 본 적이 있던가?

꼭 백한성 대표 목소리처럼 들리는데.

“혹시, 대표님…….”

-맞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저쪽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문득, 대표실에서 독대하던 날 백한성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이번엔 뭘 줘야 하나.

바라는 게 있으면 그때 가서 얘기해.

나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채 말했다.

“통화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도… 대표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8)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