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56화 (56/218)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7) -유료 시작편 >

나는 심경택 선생의 반응을 관찰했다.

예지 능력으로 미래를 보았을 때에 비하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손가락이 허겁지겁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두드린다. 눈알이 재빠르게 굴러다니더니, 곧 눈을 꾹 감고 참고 있던 숨을 흘린다. 아직 제 이름이 올라온 기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거겠지.

아. 안도한 낯짝을 보니 정말 박우정 기자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미끈한 입술이 달싹거린다. 멋스러운 정장 소맷단 아래, 꽉 말아쥐고 있는 주먹에는 핏줄이 불거져 나와 있다. 날카로운 시선이 곧 과녁을 찾았다. 물론 나다.

“누구야.”

심경택 선생이 나를 쏘아보며 다그친다.

“그 기자, 누구야. 당장 연락해서 기사 쓰지 말라고 해.”

“그게 안 돼서, 제가 여기 왔죠.”

나는 억지로, 억지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기사 나가기 전에 사과드리려고.”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이게 어디 사과한다고 끝날 일이야?!”

그러니까.

그걸 아는 댁은 왜 사과만 던지고 끝냈냐, 이 정신 나간 작자야.

나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래도 뭐, 선생님 성함까지는 얘기 안 했으니까….”

“기자들 달라붙으면 내 이름 알아내는 건 금방이야! 너 이 새끼, 지금 천지 분간이 안 되나 본데 니가 어떤 사고를 친 건 줄 알아?!”

알지, 그럼.

“이게 언론에 흘러들어 가면…….”

입술을 물어뜯은 심경택 선생이 버럭 소리친다.

“니가 얘기한 기자 누구야? 어디 신문사 누구냐고!”

나를 위협하기 위해 분노한 목소리, 강압적인 말투를 쏟아내는 거겠지만, 잘못된 선택이다. 저쪽의 반응이 과격해질수록 내 머릿속은 차가워졌다.

마른 입술을 핥았다.

조금만 더 건드려볼까.

“그런데 솔직히,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건 팩트긴 하잖아요.”

항의하는 것처럼 구시렁거렸다. 심경택 선생의 표정이 볼만하다.

사진으로 찍어서 이송하한테 전송해주고 싶다. 좋아할 것 같은데.

“뭐, 이 새끼야?”

아까부터 새끼, 새끼.

교수씩이나 돼서 저렇게 어휘력이 빈약해서야. 연극배우 출신에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라면서 내 어설픈 연기도 꿰뚫어보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는 걸 보면 실력도 의심스럽다.

“첫방 나가고 나면 송하 연기 잘하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럼 왜 일찍 연기 안 시켰느냐고 기자들이 귀따갑게 물어볼 걸요. 모르는 사람들은 회사 욕만 할 텐데, 저는 회사 입장에서 그냥 팩트를 전달…….”

“회사 입장?!”

심경택 선생이 기어이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W&U는 이 일이 언론에 노출되면 더 발칵 뒤집어지는 거야! 이게 지금 가벼운 문젠 줄 알아?! 이 사건 까발려지면 내 얼굴에만 먹칠하고 끝날 줄 아냐고! 어차피 나는 부탁 받……!”

왜. 계속 떠들어보지.

까발려지면 발칵 뒤집어진다는 일이 정확히 뭔지.

댁 얼굴만이 아니라 누구 얼굴에까지 먹칠하게 된다는 건지.

물끄러미 바라보자 심경택 선생이 욕지거리를 몇 마디 내뱉는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듯이. 이제 와 입을 봉해봤자 늦었다.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 지 오래니까. 이제 저 사람을 압박해서 증거만 끄집어내면 된다.

확실한 증거.

갑자기 백한성 대표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여유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그저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던 그의 모습이. 만약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백한성 대표가 앉았다면. 그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말했을까?

“선생님 말씀이 꼭, 언론에 알려지면 안 되는 속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 사정에 W&U의 누군가가 연관된 것처럼 들리기도 하구요.”

곧장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든다.

“쓸데없이 뭘 자꾸 알려고 해?! 너, 여기서 일 더 키우지 말고 수습할 수 있을 때 그 기자 이름이랑 소속이나 대고 당장 나가! 나머지는 내가 그…… W&U 팀장하고 직접 얘기해서 해결할 테니까!”

“글쎄요.”

나는 굽히고 있던 어깨를 펴고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는 제가 모르는 회사 문제보다, 제 담당인 송하 문제가 더 중요해서요.”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왜 옛날 일을 자꾸 끄집어내?!”

옛날 일이라고?

“이건 모르고 넘어가는 게 이송하한테도 더 좋은 일이야! 어차피 지금 작품 잡아서 연기하고 있잖아! 다 잘됐는데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조금만 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면 벌써 주먹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십여 년 후의 미래에서, 박 국장이 그랬었지.

이송하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다고.

그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것들이 겹쳐져서 이송하가 연기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 미래대로 웃기지도 않은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십 년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스무 살의 이송하는 연기하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애인데. 내가 모르는 이송하의 십 년 세월은 어땠을까. 그걸 생각하면 저 작자의 개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다.

“교수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표정을 꾸며내는 짓은 집어치웠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

심경택은 엉거주춤 앉아서 눈앞의 청년을 바라봤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저놈이 대형사고를 치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마주앉아 길게 대화할 일도 없었을 거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머저리 같은 놈을 다그쳐서 어떤 기자 앞에서 혓바닥을 놀린 건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 후에 그와 비밀을 공유한 사람에게 전달하면, 결국에는 W&U에서 알아서 뒤처리를 맡아 줄 테니까. 저 멍청한 놈도 다시 볼일 없을 거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청년의 표정이 돌변했을 때였다.

멀뚱히 눈만 데룩데룩 굴리던 놈이, 갑자기 이 바닥에서 한참을 굴러먹은 사람처럼 그를 바라봤다.

“송하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뭐 때문에, 누굴 위해서요?”

느리게 질문한 청년이 핸드폰을 꺼낸다. 동영상 하나를 재생해서 심경택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작은 화면 안에는 누군가의 측면 얼굴이 잡혀있다.

이송하였다.

대본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와 대사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대본리딩을 찍은 영상이었다.

“이, 이걸 왜…….”

심경택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잘하죠. 저는 처음 송하가 연기하는 걸 봤을 때 다른 배우들도 코앞에서 보면 다 저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같이 대본리딩 한 배우들, 감독님, 심지어 경력이 수십 년인 원로배우까지. 선생님만 빼고 다들 송하보고 타고났다고 합니다.”

심경택은 화면 속에서 연기하는 이송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박살을 내서 던져버린 인형이 멀쩡하게 되돌아온 걸 발견한 기분이다. 꺼림칙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제가 선생님이라면 마음이 좀 급할 것 같은데요. 이 시간에도 기자는 선생님의 폭언에 고의성이 있지 않을까를 의심하고 있을 텐데, 일단 언론에 뜨면 뒷수습은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이게…….”

청년의 입꼬리가 휘어진다.

“기자들이 환장할 얘깃거리니까.”

“너, 너…….”

심경택의 눈이 벌게졌다.

다 맞는 말이다. 기사가 뜨면 속수무책이다. 그도 이 바닥 물을 먹을 만큼 먹었다. 지금 이송하에 관련된 기사는 마른 짚더미에 던져지는 불씨나 다름없다. 삽시간에 타들어 가 수습할 엄두도 못 낼 거다.

심경택 본인도, 그리고 그에게 매달려 부탁했던 제자도.

그의 당황을 읽었는지 청년이 구슬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회사의 문제를 알려주시고, 저를 설득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기사 터지고 나면 저야 물정 모르는 매니저가 사고 하나 친 거지만, 선생님, 아니 교수님 이름에는 흠집이 많이 날 것 같은데요.”

“너 이 새끼, 지금 날 협박하는……!”

“협박이요?”

청년이 묘하게 웃었다.

“누구 협박하고 그래 본 적은 없는데.”

웃음이 끊어졌다.

무거운 정적이 퍼진다. 청년은 심경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예상보다 빨랐다.

심경택 선생의 입에서 손채영이 이름이 흘러나온 것 말이다. 의외로 심경택 선생은 손채영의 이름을 발설한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매달린 건 당장 기자의 입을 막는 것뿐이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입을 막을 기자 따윈 있지도 않으니까.

심경택 선생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아까 그랬지, 차라리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좋았을 거라고. 어디 한 번 봐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답하지 않고 학교를 나왔다.

원하는 걸 다 얻어낸 마당에,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싶지 않다.

한참 걷다가 헐벗은 가로수에 기대섰다. 그리고 심경택 선생의 말을 녹음한 파일을 확인하고 김현조에게 전송했다.

곧바로 전화가 걸려오길래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이송하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손채영이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심경택 선생에게 매달려 부탁했다는 것. 그리고 심경택 선생이 자신의 자랑거리인 탑스타 애제자를 위해, 이송하라는 싹이 더 크지 못하도록 꺾어 놓았다는 것까지.

처음엔 건너편에서 상소리가 나왔지만, 중간부턴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에 3팀장, 그리고 당사자인 이송하까지 회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정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초겨울의 바람이 뺨을 긋고 지나간다.

이젠 위에서 뭔가 결정이 내려지는 걸 기다리면 되는 건가.

애초의 계획은 달성했다. 계속 찜찜하게 남아있던 의혹을 밝혀내는 것. 심경택 선생을 낚아서 손채영의 이름까지 줄줄이 끌어내는 것 말이다.

천천히 걷다 보니 문득 아까 일이 떠오른다.

사람을 협박하고 왔지, 나.

사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누군가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뒷일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심경택 선생에게 이송하가 들었던 것보다 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거나, 박우정 기자에게 부탁해서 손채영이 저지른 이기적인 짓거리를 진짜 언론에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단순한 매니저가 아니라 지금의 백한성 대표처럼, 또는 이십여 년 후에 대표가 된 나처럼.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말이다.

회사로 돌아가는 중에 이송하에게 주려고 머리통만 한 티라미스 케이크를 하나 샀다. 자기가 갖고 있던 트라우마 뒤에 어떤 지저분하고 이기적인 뒷거래가 있었는지 알게 되기 전에, 좋아하는 걸 좀 먹이고 싶어서.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아도 나보다 더 받을 거고, 화가 나도 나보다 더 날 테니까.

이송하라면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속으로 가라앉혀 버릴지도 모르지만.

약속장소인 회의실로 들어가니 먼저 도착해 있던 이송하가 반겼다. 드라마 얘기를 하는 줄 알았는지 고양이 수호령 대본을 품에 끼고 있다. 아니, 요즘 어딜 가나 저걸 끼고 다니긴 하지.

“오셨어요?”

“응, 일단 실장님이랑 팀장님 오시기 전에 이거 먼저 먹어.”

케이크를 내밀자 안색이 확 밝아진다. 약속시각까지 얼마 안 남았지만, 이송하가 케이크 한 판을 해치우는 데에는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저 혼자 다 먹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송하가 훌렁훌렁 케이크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코코아 가루가 푹신하게 덮인 케이크 속살을 지그시 쳐다본다. 누가 보면 대단한 작품이라도 감상하는 줄 알겠다.

한 손에는 케이크 나이프를, 한 손에는 포크를 들고 고민하는 것 같더니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포크로 케이크 정중앙을 삽질하듯, 푹 떠올린다. 케이크 덩어리가 포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이송하가 기대하는 얼굴로 막 포크를 입에 넣은 순간이었다.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기다리고 있던 김현조와 3팀장이 아니라, 손채영이랑 조 실장이.

사과하러 온 표정들은 아니다.

케이크를 물고 있는 이송하를 힐끔 본 손채영이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왔다. 조 실장은 손채영을 말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회의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문을 단단히 닫았다.

손채영이 내 뺨이라도 칠 기세로 물었다.

“심 선생님한테 가서 뭐라고 했어요? 당신이 뭔데 선생님을 협박해?!”

이런 걸 보고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않나?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난다.

“웃어?”

그다음 일은, 정말 찰나 간에 일어났다.

손채영이 정말로 내 뺨이라도 긁어놓으려는 것처럼 손을 휘두른 것. 설마, 설마, 하던 내가 마지막에서야 고개를 젖혀 그 손을 피한 것. 그 광경을 보고 나보다 더 놀란 이송하가 포크를 집어 던지고 일어난 것까지.

좀처럼 요동치는 법이 없던 이송하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솟는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물론 말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케이크를 맨손으로 잡은 이송하가 그걸 손채영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7) -유료 시작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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