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6) -무료 마지막 >
같은 시간. W&U 홍보팀 사무실.
박 팀장이 장윤옥에게 감사 전화를 하러 나간 사이, 여직원과 남직원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송하에 대한 여론은 또다시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장윤옥의 인터뷰가 점점 퍼져나가면서 다시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포털 검색어 1위에는 여전히 이송하의 이름이 걸려 있고, 고양이 수호령이 다시 치고 올라가고 있다. 이송하 연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고양이 수호령을 본방사수 하겠다며 첫방 날짜를 찾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홍보팀 여직원이 긴장을 풀며 말했다.
“송하가 연기를 진짜 잘하긴 했나 봐. 장윤옥 선생님 되게 깐깐하시잖아. 송하 연기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아무리 대표님 부탁이라도 인터뷰 안 하셨을 것 같은데.”
“이러다 송하 쑥쑥 커서 순식간에 원탑 배우로 올라가는 거 아닌지 몰라.”
남직원의 말에 여직원이 상기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완전 좋지. 배우들 스케줄 안돼서 못하고 다른 회사한테 뺏기는 작품들 많잖아. 아깝게. 송하는 이미지가 딱 고정된 스타일이 아니라서 주희씨나 소라 이미지도 가능할 것 같고, 또 손채…….”
“야야.”
여직원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홍보팀 사무실 한쪽에 여전히 손채영이 앉아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음울한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
무대에서 내려와 승합차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이 참 멀다.
애들은 열댓 명쯤 되는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다.
사인하고, 손잡고, 사진 찍고.
경호원이 공간이 협소해서 잘못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얼른 차에 태우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은 물론이고 넵튠 애들까지 제자리에 딱 붙어서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하긴, 다들 이런 뜨거운 반응에는 면역이 없으니까.
다음 순서인 걸그룹이 무대에 올라갈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나와 배신자, 김현조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가며 애들을 승합차에 태웠다.
“완전 도떼기시장이네.”
차 문을 닫고 한숨을 쉬었더니 옆에서 배신자가 피식 웃는다.
“이 정도로 뭘. 나중에 블랙아웃 팬 사인회 할 때 구경 한 번 가봐.”
“왜? 거긴 어떤데?”
“여긴 송사리떼고, 거긴 피라냐떼야.”
배신자가 먼 곳을 쳐다보는 눈으로 말했다.
피라냐떼라. 나도 언젠가는 피라냐떼 속에 파묻히는 날이 올까.
배신자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고, 나도 조수석에 타기 위해 빙 돌았다.
“저기요.”
누가 부르길래 고개를 돌렸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가까운 곳에 주차된 하얀 승합차, 반쯤 열린 창문 안에서 슈가캣 한샛별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날 쳐다보고 있다.
“이송하 괜찮아요? 아까 보니까 또 난리 났던데.”
“네?”
“드라마 관계자가 이송하 천재라고 막 극찬했던데. 진짜 잘해요? 걔….”
“네. 진짜 잘해요.”
슬슬 시동을 걸려고 하는 것 같길래, 뚝 잘라버렸다.
“더 궁금하면 후속 기사 올라온 거 보세요.”
영혼까지 끌어모은 친절함으로 대답해주고 등을 홱 돌렸다.
조수석 문을 열고 탔는데, 뒷좌석 분위기가 어째 어수선하다. 여긴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임서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끅끅거리면서 울고 있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둑이 터졌구나. 뺨이 온통 흥건하다.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배신자가 묻는다.
“왜…… 왜 울어? 밖에서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좋아서 눈물이 난단다, 좋아서.”
김현조가 웃으며 말했다.
“넵튠 단독콘서트라도 하는 날은 아주 무대 위에서 통곡하겠어.”
임서영이 김현조의 등을 찰싹찰싹 때린다. 김현조가 티슈를 내밀었다.
“알았어, 그만 울어. 눈화장 다 번져서 시커…… 괜찮네?”
“으으응, 워터프루프라 그런가 봐…….”
임서영의 입에서 울음 반, 소리 반이 나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실소를 흘렸다.
사실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송하에 대한 여론이 좀 좋아져서 안심하자마자, 갑자기 관계잔지 나발인지가 천재 운운하는 바람에 상황이 돌변했으니까.
그놈은 누군지 찾아내기만 하면…….
어쨌든 그것 때문에 어지간해선 긴장하지 않는 이태희도 표정이 굳어있었고, 임서영은 관객들 눈치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다른 팀을 보고 열심히 호응하는 관객들이, 넵튠이 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조용해질까 봐 겁난다면서.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분위기는 정말 눈물 나게 좋았다.
오늘 공연을 보고 환호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이 무대를 기억할지, 또 몇 명이나 넵튠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공한 공연이었다.
충분히 기뻐하고 뿌듯해 해도 될 만큼.
“관객 중에 혹시 우리 팬인 사람도 있었을까? 다음에 또 보러오는 사람 있을까?”
임서영이 티슈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엘제이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너무 기대하지 마, 기대가 높아지면 실망도 크댔어.”
“내 맘대로 기대도 못 하냐? 사람들 엄청 많이 모였던데 혹시 모르잖아!”
“여기 홍대야. 노래 틀어놓고 비눗방울만 불어도 저만큼은 모일걸?”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제이 역시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얼굴이다. 무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희미하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팬, 인지는 모르겠는데.”
맨 뒷좌석, 지정석에 늘어져 있던 이태희가 상체를 일으킨다. 그리고 뭔가를 송하에게 건넨다.
카페 같은 곳에서 작게 포장해서 파는 쿠키였다. 이송하가 그걸 빤히 바라보자 이태희가 먹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송하가 조심조심 비닐을 뜯더니 동전만 한 크기의 쿠키를 먹기 시작한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들 무거운 마음으로 올라간 무대였겠지만, 누구보다 짐이 무거웠던 건 이송하였을 거다. 어쨌든 이송하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넵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니까.
아까는 달래는 말밖에 못 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가볍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지.
살짝 손짓하자 이송하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그때 뒤에서 이태희가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운동선수처럼 키 큰 분이 선물이라고 주고 갔어, 저 과자.”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언니! 먹지 마! 먹지 마!”
화들짝 놀란 임서영이 이송하의 손에서 쿠키 봉지를 뺏어간다.
“공연하고 처음으로 받은 선물인데, 집에 갖다놔야지!”
“썩어, 멍청아.”
애들은 물론이고 김현조와 배신자까지 쿠키 봉지 하나를 놓고 떠들썩하게 얘기하는 동안, 눈 뜨고 먹을 것을 빼앗긴 이송하가 허망한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슥, 손을 내민다.
하얀 손바닥 위에 반 토막 난 쿠키가 놓여있다.
“드실래요?”
“아냐, 겨우 그거 건졌는데 너 먹어.”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쿠키가 이송하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잠깐 웃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장윤옥 선생님이 인터뷰한 새로운 독점기사 창을 펼치고 내밀었다.
“송하야, 이거 봐.”
이송하가 의아한 시선을 내린다.
얼마 안 가 쿠키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이송하는 핸드폰을 붙들고 기사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윤옥 선생님 연기한 지 거의 오십 년 되셨을걸?”
“아.”
“그런 대선배님이 너보고 연기 잘한다고 한 거야. 이 정도면 전 레슨선생, 그 사람이 미친놈이었다는 게 확실해진 거지. 이제 그 사람이 떠든 말은 떠올릴 필요도 없어.”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말들은 다 잊는 게 나을 거다.
물론 잊는 건 이송하뿐이고, 나는 잊을 수 없지.
지금까지 벼려왔던 게 있는데 쉽게 잊을 수야 있나.
음험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이송하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인다. 귀를 기울이자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오빠 말은…….”
“응?”
“항상 다 맞는 거 같아요.”
그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목덜미가 간지럽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
내 말에 이송하가 살짝 웃었다. 아닌데, 맞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결국엔 나도 웃고 말았다.
마음이 풀어지는 한편, 머릿속에서는 내일 심경택 선생을 낚아 올릴 시뮬레이션이 더 팽팽 돌아간다. 내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기면 하면, 앓던 이를 단박에 뽑아버릴 수 있을 텐데.
그래, 내일…… 어디 결판을 내보자.
다음날. 오전 11시.
나는 회사가 아니라, 예술전문학교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다.
머리는 방금 일어난 것처럼 헝클어진 상태고, 옷은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입고 왔다. 대미를 장식한 건 향수 대신 뿌린 소주 냄새.
내가 봐도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온 행색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사십 대 남자가 고압적인 자세로 앉아있다. 고급스러운 양복. 왕년의 연극 배우답게 멀끔하게 생긴 외모와 진한 콧수염.
심경택 선생. 아니, 여기서는 무려 교수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중요하게 할 말이라는 게……?”
심경택 선생이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묻는다.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사고친 신입사원 흉내를 냈다.
“그게, 송하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이송하? 갑자기 무슨 일인가 했더니.”
심경택 선생이 한숨을 흘리며 말한다.
“그 문제는 내가 말이 좀 심했었던 것 같다고 분명 사과까지 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이 아니구요.”
하마터면 욕할 뻔했다.
애한테 그런 트라우마를 줘 놓고, 내가 말이 좀 심했었던 것 같다?
사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게 사과야?
“지금 송하 연기력 문제로 워낙 시끄럽잖아요. 어제는 장윤옥 선생님이 직접 송하가 연기 재능을 타고났다고 인터뷰를 하셔서 또 화제가 됐었구요.”
심경택 선생의 표정이 불편해진다.
그렇겠지.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팽개친 연기자를,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원로배우가 천재라고 극찬했으니.
저 사람이 낯짝이 더럽게 두꺼우니까 저러고 앉아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쪽팔려서 접싯물에 코를 박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기자랑 술을 마셨는데…… 무명 걸그룹으로 있었던 2년 동안 왜 송하가 연기를 안 했었는지, 그걸 엄청나게 궁금해하더라구요.”
내 거짓말이 이어질수록 심경택 선생의 표정은 굳어져 간다.
나는 뒷머리를 다시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 제가 너무 취해서, 아무래도 기자한테 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요.”
“실수? 기자한테 무슨 실수를 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심경택 선생에게 똥 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송하가 옛날 레슨 선생님한테 이 바닥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연기를 그만뒀던 거다…… 뭐, 그런.”
심경택 선생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문제는, 기자가 제 말을 듣더니 뭔가 억하심정이 있으니까 그런 말까지 한 거 아니냐면서, 선생님이 누군지 찾아보는 것 같더라구요.”
“뭐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심경택 선생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본다.
지금 이송하의 이름은 기자들에게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다. 관련된 기사가 단독으로 뜨면 어뷰징 기사들이 순식간에 뉴스란을 뒤덮는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사방팔방으로 기사를 퍼 날라 박제하고.
그런데 이송하를 가르쳤다는 심경택 선생이 악의적으로 이송하에게 트라우마가 될 말을 쏟아붓고, 연기자로서의 앞길을 막았다는 소문이 퍼질 위기에 처한다면?
특히 그 일이 손채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거라면, 지금 내 말에 화를 내는 것 이상의…… 뭔가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일로 언론에 노출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유심히 심경택 선생의 반응을 살피다가, 집어 던지고 싶은 게 하나 더 떠올랐다.
“제가 술 때문에 말실수를 좀 한 것 같습니다. 사과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자, 사과.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6) -무료 마지막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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