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54화 (54/218)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5) >

그 순간, 뒤에서 불안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직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터질 것 같은 실소를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아주 괴상한 얼굴로.

박 팀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거 본부장님 아니야.”

“뭐라구요?”

“본부장님이 송하를 데려간 게 아니라, 크흠.”

잠깐 헛기침을 한 박 팀장이 계속 말했다.

“선우씨야, 정선우씨. 송하 담당 매니저. 안 그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왔었다고 해서 우리도 한참 웃었는데, 자기는 대체 그걸 어디서…….”

박 팀장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손채영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직원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아직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그때.

파티션 너머에서 다른 직원 한 명이 급히 일어났다.

“저기, 팀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뭔데?”

그쪽으로 다가간 박 팀장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우뚝 굳어버렸다.

시선은 조금 전에 올라온 기사의 헤드라인에 꽂혀있다.

[단독] 고양이 수호령 관계자, “이송하는 타고난 연기 천재”

……고양이 수호령의 한 관계자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이송하는 사실 타고난 연기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며, “첫방이 나가면 단숨에 논란을 불식시킬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송하는 대본리딩 현장에서 다른 주·조연 배우들의 감탄을 한 몸에…….

“이게 뭐야? 어디 기사야?!”

“세븐데이즈요!”

박 팀장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세븐데이즈 관계자와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남직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기사가 한 개가 아니에요. 누군지 몰라도 기자들 많은 장소에서 언급한 거 같아요.”

“벌써 어뷰징 기사들까지 올라오고 있어요!”

박 팀장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이 논란은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화약고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제 대본리딩 후, 신태균 감독이 직접 이송하를 언급하는 인터뷰는 당분간 자제해달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새를 못 참고 기자에게 입을 털어버리고 만 거다.

연기 천재.

베테랑 연기파 배우한테 붙어도 곱지 않은 눈길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거창한 수식어다. 하물며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고 있는 이송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저건 칭찬이 아니라, 화약고에 던져진 불씨다.

홍보팀 직원들이 발칵 뒤집어지자, 손채영은 한걸음 뒤로 물러난 채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새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읽었다.

얼마 안 가 사납던 눈매는 부드럽게 풀어지고,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손채영은 아예 빈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홍보팀 직원들을 구경하듯 쳐다봤다.

박 팀장은 혀를 차며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 가 있는 백한성 대표의 번호였다.

회사 차원에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 상황을 백한성 대표에게 알리는 게 먼저였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박 팀장은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이름을 밝히고 말한 것보다, 이 ‘관계자’라는 명칭이 더 안 좋게 들려요. 대본리딩으로 반응 좀 좋아졌다고 회사에서 이때다 싶어서 언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인터넷 폭발하기 전에 먼저…….”

-음. 박 팀장.

백한성 대표가 태연히 물었다.

-대본리딩 같이했던 사람 중에 원로급 배우가 누가 있지?

“장윤옥 선생님이 제일 높으시죠.”

박 팀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건너편에서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그럼 장윤옥 선생님 개인 연락처 수배해서 나한테 보내.

야외무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넥스트 K스타에 출연하는 아이돌을 알아보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벤트성 공연을 구경하기 위해 누가 나오는지도 모른 채 발걸음을 멈춘 행인들었다.

해가 기울고, 노을이 조명을 킨 것처럼 세상을 붉게 물들였을 때.

마침내 넥스트 K스타 게릴라 공연이 시작됐다.

낯선 노래였지만 빠르고 중독성 강한 비트는 어깨를 들썩이게 했고, 이름 따윈 몰라도 TV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잘생기고 예쁜 아이돌들은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누구 실물이 생각보다 별로네, 아이돌 실제로 보니까 뼈밖에 없네,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가네, 따위의 악플성 발언도 들렸지만 그런 것들은 금방 묻혀버렸다.

야외 콘서트의 흥분에 들뜬 관객들은 호응에 무척 관대했다. 한 팀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공연할 때마다 홍대 거리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고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뜨거운 열기는 주변 카페로까지 퍼져나갔다. 바깥이 시끄러워지자 사람들은 2층 테라스로 나가 무대를 구경했다.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자. 여덟 팀이나 나온대. 지금 안 보면 언제 보냐?”

여자가 테라스를 힐끔거리자, 운동선수처럼 떡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는 노래도 없고, 아는 가수도 없는데 뭐하러 가. 어차피 우르르 나와서 짹짹거리다 들어가는 애들일 거 아냐.”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구경하러 가자. 또 알아? 니가 걸그룹에 확 꽂혀서 한 달 뒤에는 팬 사인회 가서 줄 서고 있을지?”

“지랄하고 있네.”

“어휴, 됐어, 됐어. 나 혼자 볼 거야.”

결국, 여자가 떠나고 테이블에는 남자 혼자 남았다. 카페의 2층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제 아이돌에 관심 없는 사람들만 자리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테라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을 한심한 시선으로 보고는, 자그마한 버터 쿠키를 한 움큼씩 집어먹었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뭐야. 잘하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확 잡아 끌려가듯 집중하게 된다.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할 만큼 가수가 노래를 잘했다. 아무리 라이브라지만 듣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흔들리는 고음, 한국어인지 외국어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랩에 시달리던 귀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하는 애들은 노래 되게 잘하네? AR 틀었나?”

“그러게. 이건 들을 만하다. 나가서 구경할 걸 그랬나 봐.”

주변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테라스 쪽을 쳐다봤다.

“아아, 나 알아. 넵튠, 넵튠. 넥스트 K스타 봤는데 걔들이 저 노래 부르더라. 편집이랑 후보정빨인 줄 알았는데 진짜 잘하는 거였구나.”

넵튠?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방금 들은 이름을 검색했다. 신인 걸그룹치고는 기사가 굉장히 많이 뜬다. 대부분 넵튠의 이름은 한 줄 언급으로 넘어갈 뿐이고, 멤버 중 한 명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이긴 했지만.

기사를 몇 개 읽어본 그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에 있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남들보다 머리가 훨씬 높은 곳에 달린 덕분에, 좋은 자리가 아니어도 아래가 훤히 보였다. 무대의상을 입은 네 명이 무대를 누비며 노래하고 있다. 노을과 비슷한 색깔의 조명아래로, 얼굴이 살짝살짝 드러난다.

예쁘네?

남자는 아예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딱 봐도 각자 개성이 다른 예쁜 얼굴들이지만, 이목구비보다는 표정에 더 시선이 간다. 관객들이 환호하고 손을 흔들어대니까, 그 호응에 놀라서 얼떨떨해 하는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다.

특히 가장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멤버는 저러다 무대 위에서 우는 거 아닌가 걱정될 만큼 감격하고 있다. 눈에 힘을 팍 주고 참는 것 같더니, 자기 파트를 노래하다가 결국에는 울먹거리기는 소리가 나왔다.

그 때문인지 환호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추운데 기다린 보람은 있다, 그지?”

“그러게. 쟤네는 몇 곡 더 하고 갔으면 좋겠다.”

“이거 뭐 인기투표 하는 프로그램이라면서? 쟤들 한 표 찍어줘야지.”

여기저기서 호의적인 평가가 이어지는데,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저 팀은 이송하가 이미지만 안 말아먹으면 팬덤 좀 생길 것 같은데.”

동행으로 보이는 여자가 비웃듯이 거든다.

“이미 말아먹었잖아. 이송하 아까 기사 뜬 거 봤어? 연기 천재란다, 천재.”

“난 이송하 쉴드 많이 쳤는데, 그건 좀 아니지.”

“다른 주조연 배우들의 감탄을 한몸에 받았다는데 인터뷰는 왜 그냥 관계자가 했대? 웃기지 않냐?”

“W&U에서 언플한 건가?”

“그럼 거기 홍보팀이 안티지. 겨우 여론 좀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거 때문에 다시 확 나빠질 분위기잖아. 혹시 이송하 본인이나 매니저가 직접 기자한테 얘기한 거 아냐?”

자극적인 소재는 금방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기저기서 공연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송하라는 이름이 더 많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남자는 말없이 무대를 보고 있었다. 곧 공연이 끝나고, 넵튠 멤버 네 명이 무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인사하고 있다.

부럽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노란머리의 어깨를 툭 눌렀다.

“저기요.”

“네?”

심드렁히 뒤돌아본 노란머리가 남자의 체구를 보고 흠칫 놀란다. 노란머리의 정수리가 남자의 쇄골에 닿을까 말까 했다.

남자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잘못된 얘기를 그렇게 떠들어대면, 그게 악성루머가 돼서 퍼지는 거예요, 이 어처구니없는 양반들아.”

“무, 무슨…….”

노란머리가 주눅이 들자, 함께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넵튠 팬이에요? 기사로 다 뜨고 난리가 났는데, 뭐가 잘못된 얘기예요?”

“기사?”

“관계잔지 누군지 이름도 안 밝히고 천재 타령 하는 게 너무 웃기니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거죠.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자작 기사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 많아요. 괜히 시비야.”

“어이가 없네. 다시 봐요, 기사. 눈 똑바로 뜨고.”

남자의 비아냥에 여자가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양쪽의 신경전을 힐끔거리던 주변 사람들까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곧, 기사를 검색한 여자가 이것 보라는 듯 말했다.

“어이없는 게 누군데, 여기 있잖아요. 관계자가 천재라고…… 어?”

당황한 여자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송하와 관련된 메인기사 내용이, 아까와 조금 달랐다.

[독점] 장윤옥 “이송하는 타고난 연기자, 그리고 노력하는 천재”

……고양이 수호령 대본리딩 후 또다시 화제로 떠오른 이송하의 연기력에 관해 원로배우 장윤옥이 입을 열었다.

장윤옥은 “이송하라는 친구는 재능을 타고난 연기자”라고 극찬하며, “첫 대본리딩에 대사를 거의 외워왔을 정도로 노력하는 천재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모두 감탄했다”고 밝혔다.

또한 “앞으로 이렇게 재능있고 열정적인 신인 여배우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더 할 말 있어요?”

“…….”

남자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일행과 함께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도망치는 듯한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혀를 찼다. 동시에 기사를 확인한 사람들도 수군거렸다.

“장윤옥이 직접 인터뷰했구만, 언플이니, 자작 기사니…….”

“인터넷에도 난리 났었네. 와, 사람들 알지도 못하면서 말 막 하는 거 봐. 루머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이럼 진짜 억울하겠다.”

“근데 이송하 얘, 정말로 연기 잘하는 건가? 장윤옥이 거짓말하진 않았을 거 아냐. 뭐, 작품 잘되라고 고평가는 좀 했을지 몰라도.”

“그거 궁금해서 이 드라마는 봐야겠다, 야.”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5)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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