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4) >
대본리딩이 끝난 후, 배우들은 이송하에게 격려와 감탄을 담아 한마디씩 건넸다. 이송하는 여전히 정해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버릇처럼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 떠들썩하고 기분 좋은 광경을 메이킹용 카메라들이 꼼꼼하게 담았다.
배우들은 흥분과 앞으로의 기대 때문에 상기된 얼굴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인터뷰는 배우들의 배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마지막은 공통 질문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번 작품에 대해서 짧고 굵게 한 마디 해주세요.”
40대 남배우가 힐끔 한 곳을 보았다. 이송하와 서지준. 그리고 W&U 관계자로 보이는 두 남자까지. 네 명이 모여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건지, 이송하는 젊은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린다.
시선을 뗀 남배우가 목을 가다듬고 인터뷰를 계속했다.
“이게, 제가 대본리딩을 열 번이 넘게 했단 말이에요. 대본리딩에서 느낌이 좋으면 꼭 작품이 성공하더라고. 그런데 이 작품은 느낌이 좋아도 너무 좋아. 특히 다들 연기가…… 어후, 이거 이러다가 진짜 대박….”
“말하지 마.”
장윤옥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네?”
“부정 타. 작품 부정 타면 니가 책임질래?”
남배우가 얼른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다른 카메라를 보고 인터뷰하던 배우들에게도 비슷한 광경이 이어졌다.
“시작 전이라 설레발이긴 하지만, 이 작품 대박…….”
“야야, 선생님이 부정 탄다고 말하지 말래.”
“아, 짧고 굵게 한마디요. 이거 정말 대박….”
“쉿!”
모두 목구멍까지 꽉 찬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던 그때.
시끌벅적한 대본리딩장 바깥.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CP 송 부장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송하의 오디션 영상도 확인했고, 그 뒤로 이 논란을 오히려 작품에 대한 홍보로 이용하자는 백한성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의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지나가는 척하며 대본리딩 하는 모습을 살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CP씩이나 돼서 다른 배우들에게까지 불안을 전염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만족할 만큼 확인한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까지도 까칠한 표정이던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자, 드라마국 피디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부장님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지셨어?”
“글쎄요. 들쭉날쭉하시네요. 남성 갱년기, 뭐 그런 건가?”
“지금 밑에 고양이 수호령 대본리딩 한다며? 이송하 연기보고 충격을 너무 받으셨나?”
송 부장의 목적지는 국장실이었다. 노크하고 답이 들리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그가 국장에게 말했다.
“국장님, 고양이 수호령 말이에요. 그거 편성 한 편 더 받을까요? 찔끔찔끔 예고편만 깔지 말고, 50분짜리 메이킹으로 그냥….”
“뭐 잘못 먹었어?”
“저번에 GTBN에서 최고 시청률 8프로 넘은 작품, 출연진이랑 제작진 다 포상휴가로 세부 보냈다고 보도자료 뿌리면서 자랑하던데. 우린 더 좋은 데로 보내자구요.”
“왜 이래? 갑자기.”
피곤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던 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송 부장이 국장실 문을 닫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부정 탈까 봐 좀 조심스럽긴 한데…….”
“뭐?”
“고양이 수호령 저거, 아무래도 대박 날 것 같단 말이에요.”
다음날 정오.
메이킹팀원들과 TVL 콘텐츠 기획부 직원들을 갈아 넣고 제작한, 고양이 수호령의 첫 번째 메이킹 영상이 공개됐다.
그 영상은 몇 시간 만에 수십만 뷰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대형 포털의 메인에 걸렸으며, 실시간 검색어를 또 한번 갈아치웠다.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최초공개! TVL 고양이 수호령 첫 대본리딩 현장!]
-주인공 두 사람만 보일 줄 알았는데 조연들도 다 ㅎㄷㄷ하네.
-갓윤옥 무시하나요? 갓윤옥이 케이블에 나오는 것만 봐도 캐스팅에 힘준 거 딱 보이는구만. 이 드라마는 이송하 빼곤 캐스팅 구멍이 없음.
-윗 댓글 당황스럽네;; 저만 이송하 연기보고 놀랐나요?
-저도 개깜놀; 기대도 안 하고 재생했다가 완전 각 잡고 봤음. 의외성 대박인데요.
-지금 이송하 나오는 부분만 반복재생해서 보고 있어요. 빨려 들어간다ㄷㄷㄷ
-비주얼 완전 양민학살수준; 연기도 존잘인데? 얘 왜 욕먹지?
-뭘 또 연기가 존잘이래ㅋㅋㅋ 1분짜리 메이킹 가지고 애 쓴다ㅋㅋㅋㅋ
-몇 시간 대본리딩 한 것 중에 좋은 것만 고르고 골라서 붙였겠죠. TVL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연기력 논란 없애야 되니까.
-와, 진짜 이 정도면 까기 위해서 까는 거 같다. 너무들 하네.
-이송하 까도 아니고 빠도 아닌데, 영상만 보면 잘하는 거 같은데요?
-편집빨 고려해도 발연기는 아닌 것 같네요.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연습 빡시게 하고 나와서 저 정도만 해라. 그럼 논란 싹 없어질 듯.
-하도 시끄럽길래 뭔 드라만가 궁금해서 봤는데, 이거 재밌겠는데요?
“저만 이송하 연기 보고 놀랐나요?”
나는 최대한 느낌을 살려 읽었다.
“이송하 나오는 부분만 반복재생해서 보고 있어요. 빨려 들어간다. 덜덜덜.”
“야, 이송하! 너한테 빨려 들어간대! 웬일이야, 저 사람은 좀 오버다!”
임서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녹화를 위해 열심히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고 있던 아티스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서영아, 가만히 좀 있어! 아이라인 또 삐져나갔잖아!”
“아, 미안해, 언니.”
“당사자는 얌전히 듣고 있는데 왜 니가 더 난리야?”
옆자리에서 엘제이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이송하는 아까부터 얌전히 앉아서 메이크업 수정을 받는 중이다. 겉보기엔 담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코멘트를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모양 좋은 입술 끝이 살짝살짝 올라가곤 한다.
그리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빤히 쳐다본다. 지금처럼.
임서영이 싱글벙글 웃으며 재촉했다.
“오빠, 오빠, 또 읽어줘요, 또, 또 뭐 없어요?”
“나도 찾았어. 내가 몇 개 읽어줄게!”
뒷좌석에서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던 스타일리스트가 손을 번쩍 든다.
그녀의 입에서 코멘트가 나올 때마다 승합차 안에 웃음이 번진다. 나도, 운전석에 있는 배신자도, 그 뒤의 김현조도, 임서영과 엘제이, 이태희는 물론이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까지.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사람이 없다.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 게 얼마 만이더라.
논란 터지고 나서 거의 처음이다. 임서영과 엘제이가 투닥거리며 분위기를 띄워도 금방 축 처져서 바닥을 기곤 했으니까. 오히려 욕먹는 당사자인 이송하보다 다른 애들이 더 심각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고양이 수호령의 첫 번째 메이킹 영상이 공개된 후, 포털은 물론이고 SNS와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송하의 연기력이 다시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울추가 이송하를 옹호하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욕하는 사람들이야 여전히 많았지만, 한발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사람들이 영상 덕분에 옹호하는 측으로 많이 흘러들어간 덕이다.
“타이밍 딱 좋네. 안 그래도 오늘 야외 녹화라 걱정했는데.”
옆에서 배신자가 안도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밖을 내다봤다. 야외무대 세트와 그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 넥스트 K스타의 녹화 장소는 공개홀 무대가 아닌 홍대 한복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협소한 무대, 그리고 불특정다수의 관객들 앞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도 없이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게 오늘 미션이다.
설마 그렇겠냐 싶으면서도, 내심 공연 중에 물병 같은 게 무대로 날아오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여론이 좋아져서 천만다행이다.
“정선우.”
김현조가 내가 앉은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뒤에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애들을 힐끔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니가 어제 얘기했던 거 말인데.”
“아, 네.”
내가 어제 김현조에게 한 얘기는 하나뿐이다.
이송하의 빌어먹을 전 레슨 선생 심경택과, 손채영에 관한 것.
“영훈이 형이랑 의논해 봤는데,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거 같아서. 니 생각대로 일이 안 풀려도 그냥 욕 한번 먹으면 되니까. 나머지는 나랑 영훈이 형이 커버해 줄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뒷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김현조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일 가서 한번 만나봐, 심경택 선생.”
*
“이 상태로 가면 밤까지 실검에 있을 거 같은데?”
홍보팀 박 팀장이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직원이 머그잔 세 개에 드립 커피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드라마, 화제성은 정말 역대급인데요? 지금까지 케이블 드라마 중에 시작 전부터 이렇게 화제 된 드라마가 있긴 했어요?”
“시리즈물 외에는 없었지.”
“대본리딩 분위기도 엄청 좋았다면서요. 송하 연기가 진짜 대단했다고.”
“이거 이러다가… 첫방 시청률로 공중파도 잡아먹는 거 아니에요?”
남직원의 말에 여직원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꿈이 너무 크다. 그것까진 힘들지. 같은 시기에 공중파 라인업이 워낙 좋잖아. 타임슬립도 있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도 있는데.”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도 대본 퀄리티 좋지. 그건 진짜 시청률 20프로 기대해봐도 되겠던데?”
“중국 반응도 엄청 좋잖아요. 국내에선 고양이 수호령 때문에 밀렸지만, 대본리딩 기사 나간 날 중국에선 해외드라마 이슈 차트 3위까지 찍었고.”
여주인공을 맡은 손채영, 그리고 남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중화권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배우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방송도 되기 전에 이미 중국 최대 온라인 플랫폼에 판권이 판매된 상태다.
여직원이 기대된다는 듯이 말했다.
“잘하면 우리, 연초에 뭍나인이랑 고양이 수호령으로 쌍끌이하겠네요.”
“그러게. 더 바빠지겠네.”
박 팀장도 동조하는데, 남직원 혼자 뭔가 찜찜하다는 듯이 입술을 핥았다.
“팀장님, 그런데요. 저는 왜 자꾸…… 그게 신경 쓰이죠?”
“그거?”
“왜, 지난번에 선우씨가 한 말 있잖아요.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감이 안 좋다고…….”
남직원이 주변을 의식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 팀장과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신경 쓸 것도 없다. 농담이었잖아. 농담을 뭘 진지하게 신경 쓰고 있어?”
“근데 그 말 다음에, 고양이 수호령은 감이 좋다고. 그 작품 잘될 것 같다고도 했잖아요.”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세 쌍의 눈동자가 잠시 말없이 굴러다녔다.
세 명 모두 고양이 수호령의 시놉시스를 읽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이만큼 화제작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시놉시스를 보물처럼 들고 간 정선우를 두고, 신입사원답게 열정은 좋은데 안목은 좀 더 키워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 기억도 있다.
뺨을 긁적이던 박 팀장이 남직원의 어깨를 철썩 쳤다.
“그래, 고양이 수호령이 성공하면 선우씨 안목은 진짜 대단한 거지. 누가 뭐래도 그건 인정해야지. 그런데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감이 안 좋다는 건, 글쎄…….”
“맞아요. 그건 못해도 중박이죠.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는 작품이잖아요. 작가, 감독이 중간에 정신줄 놓고 산이라도 타면 모를까.”
여직원이 거들고 나섰을 때. 갑자기 홍보팀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청순함의 대명사, 손채영이 살벌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쟤 또 왜 왔다니?”
“고양이 수호령 실검 1위 한 거 때문에 또 징징거리러 왔나 봐요.”
“어휴, 내 위에 구멍 나면 다 쟤 때문이다.”
수군거린 박 팀장이 일어나서 손채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손채영은 인사도 넘기고 대뜸 물었다.
“본부장님 어디 계세요? 사무실에 안 계시던데?”
“본부장님? 대표님이랑 같이 어제 아침에 중국 가셨어.”
손채영이 발그스름한 입술을 깨물었다.
“팀장님,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예요?”
“뭐?”
“이러시면 저 W&U랑 재계약 못 해요.”
손채영이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박 팀장은 황당함을 감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지난번 재계약 시기에도 질리도록 들었던 손채영 전용 레퍼토리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길 때마다 입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왜 그러는지 얘길 해 봐. 내가 자기한테 거짓말을 왜 해?”
“본부장님이 어제 아침에, 중국에 가셨다구요?”
“그렇다니까. 도원씨랑 자기랑 중국에서 같이 찍은 가전제품 광고 있잖아. 그거 계약 연장할 시기가 돼서 그쪽 관계자들이랑 미팅한다고 가셨어.”
“저는 귀가 없는 줄 아세요?”
안 그래도 부족한 참을성이 바닥난 듯, 손채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제 이송하 대본리딩 하는데 본부장님이 직접 따라가셨다면서요!”
“……뭐?”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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