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52화 (52/218)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3) >

고양이 수호령의 대본리딩이 진행될 회의실은 일찍부터 시끌시끌했다.

메이킹 팀은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느라 분주하고, 하나둘씩 도착한 주조연 배우들과 관계자들은 서로 인사를 마치자마자 테이블에 비치된 간식거리를 까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다른 작품에서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많아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야, 대본리딩 하는데 무슨 카메라가 세대씩이나 와 있니? 부담스럽게시리. 엄청 열심히 해야겠네.”

“지금 우리 작품이 1분기 최고 화제작이래잖아요.”

“기대작은 아니고 화제작이래?”

“뭐면 어때요. 관심받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전 대본도 괜찮고, 서지준이 주인공이라길래 망하진 않겠구나, 생각하고 고른 작품인데 이 정도 반응이면 완전히 땡잡은 거죠.”

“그런데요.”

여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맡은 여배우가 메이킹 카메라를 의식하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다.

“연기 잘할까요, 이송하?”

“아이고 지겨워. 그 질문을 여기서까지 들어야 돼?”

30대 여배우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안 그래도 이 드라마 한다니까 주변에서 엄청 물어보더라. 기자들한테도 연락 몇 통이나 받았어. 대본리딩 끝나면 이송하 연기 어땠는지 코멘트 좀 해달라고. 어휴, 어린애 그만 좀 들들 볶지.”

“근데 궁금하긴 하잖아요.”

“기본은 하겠지. 논란 터지고서도 하차 얘긴 전혀 없었잖아. W&U에서도 믿는 게 있으니까 밀어붙이는 거 아니겠어?”

“맞아요. 그리고 진짜 발연기였으면 신감독님이 안 뽑았을걸요?”

이것저것 추측하는 말이 나오는 가운에, 남주인공인 서지준의 부하직원 역을 맡은 남배우가 끼어든다.

“이렇게 된 거, 저는 이송하가 진짜 연기 잘했으면 좋겠는데요.”

시선이 모이자 남배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지금 여론이 발연기일거다 반, 발연기는 아닐 거다 반이잖이요.”

“그렇지?”

“그러니까 연기 때문에 욕을 그렇게 먹었는데, 사실 반전으로 이송하 연기가 진짜 말도 안 되게 좋으면······ 드라마 뚜껑 딱 열었을 때 난리가 나지 않겠어요? 첫방 나가고 나서 인터넷 터질걸요?”

점점 흥분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다른 배우들이 피식 웃었다.

“에이, 그건 너무 갔다.”

“그래. 대본 보니까 쉬운 배역도 아니던데.”

“괜히 그런 얘기 해서 애한테 부담 주지 마. 지금 속이 속이겠어?”

“저는 그냥······.”

남배우가 꼬리를 내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때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누군가 또 도착했나 보다 생각한 배우들이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륵, 문이 열렸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온 이송하를 보았을 때 몇몇 배우들은 생각했다.

쟤는 드라마만 잘 되면 CF를 아주 쓸어담겠구나.

악플러들이 떠들어대는 무대 조명빨, 메이크업빨, 사진빨, 그런 건 모두 헛소리에 불과했다. 보는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다.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이미지가 공존하는 이목구비에 전체적인 비율도 흠잡을 데가 없다. 아니, 잡다한 미사여구를 붙일 필요도 없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된다.

광고주들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연기력 논란을 벗고 이미지만 좋아지면, 그리고 드라마가 잘 돼서 작품빨, 캐릭터빨까지 받는다면 단숨에 비주얼 스타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넘쳐흘렀다.

그랬기 때문에, 몇몇 배우들은 또 생각했다.

연기는 그냥 그렇겠구나.

어느 정도는 편견이 들어간 생각이었다. 아이돌 걸그룹 출신이라는 것, 아직 어린 나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예쁘다는 것.

외모가 좀 떨어졌다면 연기에 대해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비주얼이면 연기력이 살짝 부족해도 W&U에서 밀어붙일 만하다. 연기의 아쉬움을 충분히 메꿀 수 있는 무기니까.

작품만 했다하면 연기력 논란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탑클래스의 미녀 스타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CF계를 석권하며 끊임없이 방송국의 러브콜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고양이 수호령의 주조연 배우들은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이송하가 기본만 해주기를, 작품의 완성도를 해치지 않을 만큼만 열연을 펼쳐주기만 바랐다.

그러나 대본리딩이 시작한 후, 배우들은 모두 얼떨떨한 얼굴로 생각했다.

뭐지, 저건?

저게 스무 살짜리 어린애의, 그것도 연기력 논란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고 있는 사람의 연기라고?

“······웬일이니, 이게.”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만큼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한 대본리딩이 또 있을까.

서지준을 비롯한 주연들은 물론 조연 배우들까지 자신의 대사가 나올 때는 이곳이 현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송하에게로. 아니, 정해원에게로.

리딩이 시작된 후 줄곧 그 자리에는 정해원뿐이었다. 까칠한 성격의, 삶에 지친 이십 대 후반의 여자, 정해원. 제스쳐 하나, 호흡 하나에도 그녀가 보였다.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예상을 박살 내다시피 한 이송하의 연기를 보고 모두 환호했다. 이 정도면 현재의 여론을 뒤집고 높은 완성도와 흥행을 둘 다 잡을 수 있겠다며 자축부터 했다.

그리고 수군거렸다.

“이송하 원래 성격이 정해원이랑 비슷한가 봐요.”

“그런 거 같지? 저거 완전 생연기, 날연긴데. 진짜 쓰인 것 같잖아.”

“애가 나이답지 않게 좀 시니컬하고 예민한 느낌이긴 했어요.”

“완전 인생 캐릭터네. 신 감독님이 오디션 때 저걸 보고 캐스팅했나 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정해원이라는 배역은 한가지 스타일로 쭉 이어지지 않았다. 고양이 귀신이 떠들어대는 황당한 말을 통역할 때는 블랙코미디를 소화했고, 고양이 귀신에 빙의되었을 때는 귀족적이고 우아한, 정해원과는 또 다른 연기를 해야 했다.

결국, 누군가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다. 쟨 그냥······ 타고났네요.”

“스무 살이라며. 당연히 타고난 거지. 저런 애들이 진짜 천재야, 천재.”

“세상 참 불공평하네. 쟨 인생 쉽겠다.”

남주인공인 김승운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장윤옥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대부분 감탄이었지만, 그 안에는 숨기지 못한 부러움이 있었다. 특히 이송하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몇몇 젊은 배우들의 목소리에는 질투가 깃들어있기도 했다.

앞을 보자 이송하는 여전히 연기에만 몰입하는 중이었다.

장윤옥은 리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밖에 안 보이면 아무 소리 말고 있어.”

“네?”

“선생님, 그게 무슨······.”

옆자리의 젊은 배우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배우 중 가장 연장자이자, 어딜 가도 선생님 소리를 듣는 장윤옥에게 눈총을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타고나기야 했지. 그렇지 않고서 저 나이에 저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장윤옥은 이송하의 재능보다 다른 것에 더 시선이 갔다.

“그래도 타고난 거 믿고 쉽게 덤비는 애는 아냐. 쟤 연기하는 거 좀 봐. 대사칠 때 대본을 거의 안 보잖아.”

“······!”

젊은 배우들의 눈이 커졌다.

유심히 보니 이송하의 연기는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대본을 펴놓고 있지만, 눈동자는 대본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텅 비어있는 테이블 위, 바닥, 벽 따위에 조금씩 머문다.

마치 그곳에 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본을 읽지 않는데도 입 밖으로 나오는 대사는 완벽하다. 달달 외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젊은 배우들의 시선이 이송하의 대본에 꽂혔다.

누군가 탄성을 흘렸다.

대본은 가장자리가 다 해져 있었고, 정해원의 대사가 있는 곳마다 깨알 같은 글자가 가득했다.

질투의 목소리를 냈던 배우들이 부끄러움을 감추듯 자신들의 대본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장윤옥은 다시 이송하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기가 막힌 연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송하가 대사를 할 때면 디렉팅이 섬세한 편인 신태균 감독조차 입을 닫았다.

신 감독뿐만이 아니라 제작사인 판 프로덕션의 김판석 대표도, 홍주미 작가도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장윤옥은 자신의 대사를 준비하며 생각했다.

이 작품을 통해, 꽤 근사한 여배우가 하나 나오겠다고.

놀란 것은 배우들만이 아니었다.

배우들의 뒷좌석. 대본을 들춰보며 자신의 배우가 잘하는지 지켜보는 관계자들 역시 이송하의 순서가 될 때마다 수군거리느라 바빴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송하가 저 정도의 연기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들뿐일까. 이번 논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놀라움도 몇 배였다.

대본리딩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동요를 삭히며 속삭이고 있을 뿐이지, 만약 리딩이 끝난 후 기자를 만난다면 이송하의 연기 얘기로 두 시간은 입을 털고도 할 말이 남을 거다.

회사에서 가장 잘나가는 조연 배우와 함께 온 실장이 중얼거렸다.

“W&U는 저런 물건을 어디서 찾았대? 이 바닥 빤한데, 어떻게 소문 하나 없다가 갑자기 저런 게 튀어나와?”

“어쩐지······ 그럼 그렇지. 저 정도 되니까 본부장이 직접 데리고 다니지.”

오른쪽 옆에서 다른 회사의 팀장이 말했다.

“본부장? 무슨 본부장?”

실장이 작은 목소리로 팀장에게 물었다. 담당하는 배우들이 전에도 같은 작품을 했던 터라, 둘 사이는 제법 친했다.

팀장이 실장의 왼쪽에 앉아 있는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 W&U 본부장이래.”

“뭐?”

눈을 부릅뜬 실장이 홱 고개를 돌렸다. 왼쪽의 남자는 시종일관 느긋한 자세로 앉아 이송하의 대본리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은 놀랍다는 듯이 감탄도 하고, 흐뭇하게 웃기도 하면서.

그리고 희한하게 계속 핸드폰 동영상으로 이송하를 찍고 있다.

이름이 정선우라고 했지.

안 그래도 겉모습이 범상해 보이지는 않아서 초면에 좀 어색하게 통성명을 했는데, 그때는 분명 매니저라고 했었다.

“에이, 본부장은 무슨 본부장이야. 딱 봐도 나보다 어린데.”

“나이는 학교에서나 따지는 거지, 뭐. 낙하산인가 보지.”

“아까 인사할 때 나한테 그냥 매니저라고 했단 말이야. 확실해?”

“나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긴 한데, 그 옆에 서지준 담당하는 이봉준 실장 있잖아. 이 실장이 아까 그 사람한테 본부장님이라고 했다니까.”

“어어······ 아닌데. W&U 본부장 머리 좀 벗겨진 남자 아니야?”

“바뀐거 아냐? 어쨌든 본부장이라고 하는 건 내가 똑똑히 들었어.”

실장은 급속도로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옆을 돌아봤다. 직함을 알고 보니까 더욱더 범상치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나중에 W&U로 이직할 날이 올지도 모르고······.

내심 생각한 실장이 목을 가다듬고 정선우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 동영상은 왜 계속 찍으시는 거예요? 모니터링하시려고?”

“아. 이거요?”

정선우가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매달려있던 흐뭇한 웃음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웃고 있을 때는 그냥 좀 단정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웃음기가 사라지고 나니 결코 접근하기 편한 인상은 아니다.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중요하게, 쓸 일이 있어서요.”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부드러운 목소린데, 왜 ‘죽일 놈이 있어서요.’ 따위로 들리는 걸까.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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