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2) >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이송하 쪽이다. 손채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시선을 떼어낸다. 더 쳐다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리고 손채영의 경우, 인사를 받고나자 표정이 변했다. 동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야, 너…….”
이송하가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손채영의 말을 무시하고서.
“오빠, 우리 빨리 가야 되잖아요.”
내가 들고 있던 코트를 붙잡은 이송하가 그걸 쭉쭉 잡아당긴다.
“그래. 가야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이송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몇 초간. 마치 시선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정면에서, 무시당한 손채영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아니지. 공포영화의 장면은 금방 지나가기라도 하지, 저건 렉 걸린 공포영화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여전히 내 코트를 붙잡고 있는 이송하가 중얼거린다.
“마녀.”
어떻게 나랑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그보다, 아까 손채영은 분명히 ‘이송하랬나, 걔’라고 했었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들렸는데.
“송하야, 너 손채영이랑 따로 아는 사이야?”
“전 저 여자 싫어요.”
이송하가 엘리베이터 구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부감을 넘어 적개심까지 느껴진다. 정해원을 연기할 때가 아니고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다.
“어떻게 알아?”
“……레슨 받을 때 몇 번 봤어요.”
레슨.
지금까지 줄곧 찜찜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형체를 가지고 기어나온 느낌이다.
이송하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저 무덤덤한 입에서 싫다는 말까지 나왔다.
레슨받을 때 본 사이라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을 리가 없지. 레슨 선생과 손채영 사이에, 이송하를 두고 모종의 수작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더욱 단단히 굳어졌다.
곧 엘리베이터가 섰다. 어떻게 사건의 진실을 끄집어낼지 고민하면서 차를 세워둔 쪽으로 가는데, 옆이 허전하다. 돌아보니 이송하가 엘리베이터 안에 멈춰선 채로 나오질 않는다.
뭔가 걱정하는 표정인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송하가 입을 연다.
“혹시 제가 그 여자 무시해서 오빠가 잘못 될 수도 있어요?”
“뭐?”
“그런 거면 올라가서 다시 인사하고 올 거예요.”
나는 멍한 눈으로 이송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 보였나? 그래서 저런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서.
사실 염려스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욕먹을까 봐서가 아니라, 이송하 때문에.
나도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군대나 아르바이트 등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배운 게 있다. 윗사람이 아무리 또라이 같아도, 믿는 것도 없이 무작정 들이받으면 나만 피곤해진다는 것 정도는 안다.
특히 이송하는 늘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연예인이다. 여기가 회사였고 지켜보는 눈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문제가 됐을수도 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송하에게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니야.”
손채영은 예외다. 만약 손채영이 위에다 지랄해서 나한테 벼락이 떨어지면, 까짓거 한 번 맞고 말지 뭐.
“가자, 마녀 쫓아오기 전에.”
“네.”
농담을 섞어 말했더니 이송하의 표정이 확 펴진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방 내 옆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송하를 먼저 차에 태우고, 밖에서 김현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벼락을 맞더라도 혼자 맞을 수는 없지.
잠깐 인사를 나누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장님. 송하 레슨 선생이랑 손채영, 혹시 뭔가 나온 거 있어요?”
-아직. 그런데 저번에 손채영이 그 심선생을 엄청 감싸면서 대신 변명했다더라고. 캥기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게 좀 수상쩍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 중이야. 송하 전에 다른 신인 애들한테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나는 엄지로 입술을 몇 번 문지르다 말했다.
“그 심경택 선생, 제가 한 번 만나보면 안 될까요?”
-임마, 너 증거도 없이 그 양반 몰아붙였다가 도리어 역풍 맞는다. 손채영이 지랄하면 회사 발칵 뒤집어져. 심선생한테 ‘그래, 내가 고의로 애 엿먹였습니다’ 하고 자백 받을 자신이라도 있어?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은 방법이 있어요.”
얼굴이 따갑다.
등도 따갑다. 사실 전신이 다 따가워서 인간 다트판이 된 기분이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TVL 로비에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분명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는 건 분명한데, 방송사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인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다가와서 사인이나 인증사진을 요청하는 사람은 없다.
다행히 대놓고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다가 힐끔 앞을 바라봤다. 이송하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처럼 대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입술이 살짝살짝 움직이는 걸로 보아 혼자 리딩 중인 것 같다.
몇 번인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거듭해서 읽은 대본이지만, 단체리딩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남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몰입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오분 쯤 지났을 때.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하이톤의 비명소리까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바다를 가르듯 인파를 가르며 두 사람이 다가온다.
서지준. 그리고 그의 매니저인 이봉준 실장.
문득 몇 주 전 처음 서지준을 만난 날이 떠올랐다.
쇼크였지.
과연 서지준이 망가지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그와 만난 지 30초도 안 돼서 뿌리째 뽑아 던져버렸다. 박팀장이 했던 말도 바로 이해했다. 서지준의 캐스팅이 드라마에 신의 한 수가 될 거라던 말.
“안녕하세요.”
일어나며 인사했다. 대본에 집중하고 있던 이송하가 멍한 얼굴로 따라 인사한다. 서지준과 이실장은 이송하와 먼저 간단히 인사를 나누더니, 뒤이어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너 오늘 좀…… 과하다?”
이실장의 말에 멋쩍게 목을 긁적였다.
대본리딩에 정장을 입고 오긴 그래서 옷장에 있는 옷을 다 꺼내놓고 심도 있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터틀넥 스웨터에 슬랙스, 클래식한 모직 코트를 골랐다.
거기까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다음에 들른 샵이었다.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샵 실장님이 ‘선우씨도 머리 좀 만져줄까요?’ 라고 물었을 때, 좋다고 의자에 앉는 게 아니었는데.
난 진짜 좀 만지기만 할 줄 알았지.
“이게, 어쩌다 보니까요.”
“아냐 아냐, 나쁘다는 건 아니고. 있어 보이고 좋네.”
이실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존댓말 해야 될 것 같고, 엄청 좋네. 너 스탭들한테 인사할 때 매니저라고 하지 말고 팀장, 아니 W&U 본부장이라 그래라.”
그러더니 배를 잡고 웃는다. 내 어깨를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퍽퍽 때리면서. 6층에 있다는 대본리딩 장소를 찾아 올라가는 동안 계속 웃고 있다. 내가 그렇게 웃을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고 한마디 했더니 더 웃는다.
결국, 서지준이 혀를 차며 말린다.
“웃을 게 아니라 형도 좀 저렇게 하고 다녀.”
“뭐?”
“나도 본부장님한테 케어 받는 기분 좀 내보자.”
아니, 말리긴커녕 같이 낄낄거리고 웃고 있다.
“아서라, 나는 저런 옷 안 어울린다.”
“안 어울리는 게 아니라 안 맞는 거겠지.”
서지준이 이실장의 둥그런 배를 보며 말하자, 이실장이 코웃음을 친다.
“어려서 뭘 모르는구만. 30대부터는 뱃살이 인격이야, 임마.”
“뱃살이 인격이면 형은 이미 간디야.”
그러곤 또 같이 낄낄거린다. 참 독특한 파트너다.
웃음소리가 좀 잦아들었을 즈음, 힐끔 뒤를 봤다. 이송하는 여전히 대본을 생각하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뒤따라오고 있다. 나는 이실장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본부장님.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 양반이 진짜.
“농담이야, 농담. 너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무섭다.”
헛기침을 한 이실장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이번엔 진지하게 얘기한다.
“안 그래도 위에서도 신경 쓰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안 그랬더라도, 지준이도 그렇고 나도 계속 신경 쓸 거야. 이번 난리에 우리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희가 먼저 선택한 작품에 우리가 끼어들어서 일이 커진 거니까.”
이실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앞서 걷던 서지준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건 터진 후에도 미안하다는 전화를 받았었는데,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지준이야 좋은 작품을 선택한 것뿐이니까. 이번 사건에서 욕먹을 사람은 고준태 피디지.
이실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무 걱정 말어, 별 일 없을 테니까. 작품에 누구누구 캐스팅 됐는지 라인업 나온 거 받았지?”
“네.”
“감독이 캐스팅을 엄청 잘했던데. 다들 연기도 좋고, 내가 알기론 성격도 좋은 사람들이거든. 작품 하는 동안 내부에서 사람 스트레스는 안 받을걸?”
“그래요?”
연기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건 안다. 캐스팅된 배우들 대부분이 내가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인상 깊게 봤던 연기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일지가 걱정이었다. 다들 이미지가 좋긴 하지만, 연예인의 대외적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니까. 그걸 근 한 달 동안 성도원과 손채영, 그리고 서지준을 거치면서 제대로 배웠거든.
이실장이 코를 슥 문지르며 계속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상황이 좀 특이하잖아. 밖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오히려 안에서는 우리끼리 더 똘똘 뭉치게 될 때가 많단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나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6층, 대본리딩 장소 앞에 도착했다. 서지준과 이봉준 실장이 태연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몇 초 동안 들여다본 내부에는 벌써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다. 카메라와 조명기기를 세팅하고 있는 스탭들, TV로만 보았던 익숙한 배우들.
나는 얕은 문턱 앞에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한 달 이상 넵튠의 매니저를 하면서 직접 연예계를 겪었다. 음악 방송도 해봤고, 예능 녹화도 해봤고, 그 밖에도 행사나 잡지 인터뷰, 화보 촬영까지. 수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 화려한 세계가, 또 그만큼 어두운 세계가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마치 처음 출근하던 그 날처럼 가슴이 뛴다.
뒤를 돌아보자 이송하가 여전히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다.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머리카락이 그늘을 만들고 있어서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송하야.”
불러도 대답이 없다.
긴장했나?
“송하야, 괜찮아?”
다시 부르자 이송하가 슥 고개를 든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쉽사리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가시 돋친 분위기. 뭔가에 잔뜩 억눌린 것 같은 음울한 눈빛. 이송하가 아니라, 지난 몇 주간 대본리딩을 하면서 숱하게 만났던 정해원의 눈빛이다.
아니. 그것과 비슷하지만 좀 다르다.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때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은…….
“아.”
정말로 정해원에 씌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표정이 확 변한다.
그리고 이송하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잠깐 헷갈렸어요.”
< 지킬 것이 생긴 사람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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