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5) >
“그게 무슨…….”
총대는 본부장이 멨지만, 다들 똑같은 표정이다.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
백한성 대표는 소파에 등을 묻고 느긋하게 손에 깍지를 끼었다.
“박팀장. 지금 여론이 팽팽하다고 했지?”
“아, 네. 아직 비난하는 쪽이 많긴 하지만, 다행히 넵튠한테 실력파 걸그룹 이미지가 생기고 있고, 또 송하가 워낙에 비주얼이 좋아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에요.”
박팀장이 대답한 후, 3팀장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 덧붙인다.
“아직 송하가 보여준 게 없으니까, 뚜껑 열어보고 나서 얘기하자고 잠자코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행인 게, 비난 여론만 들끓었으면 드라마 하차해야 했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TVL이 지준이도 아니고 송하를 계속 안고 가진 않았을 테니까.”
“그건 그런데, 비난하는 쪽이랑 옹호하는 쪽이 팽팽하다 보니까 논란이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입니다. 양측에서 번갈아가면서 장작을 계속 던져대서.”
김현조도 한마디 거들었다. 백한성 대표가 다시 물었다.
“첫방은 1월이고, 대본리딩은?”
“사흘 뒤, 24일입니다.”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스케줄러에 표시해놓고 목 빠지게 기다리던 날이라 답이 바로 튀어 나갔다.
백한성 대표의 눈길이 잠깐 나한테 머물렀다가 떠난다.
“잘됐네. 그럼 어디 한번 판을 키워보자고. 어디까지 커지나.”
“네?”
“TVL쪽이랑 얘기해서 제대로 메이킹 팀을 만들자고 해. 대본리딩, 포스터 촬영, 본 촬영 현장 비하인드, 계속 메이킹 카메라 돌리고, 티저도 만들어서 하나씩 풀자고…… 아니, 내가 TVL에 한번 들어가지, 뭐.”
본부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끼어든다.
“메이킹이나 티저, 그거 기껏해야 30초, 1분짜린데, 그거론 연기가 괜찮은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텐데요? 그래서는 논란을 잡을 수가 없을 텐데….”
“구분이 안 돼야 사람들이 계속 보지. 궁금하니까.”
백한성 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논란이 곧 관심이 될 거고, 그 관심을 1월까지만 잘 끌고 가면…… 첫방 시청률을 공중파 못지 않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작품이 좋으면, 그때부터는 흐름 타고 알아서 올라갈 거고.”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백한성 대표를 쳐다봤다.
저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제 처음 이송하의 이름이 인터넷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케이블 채널은 공중파와 비교하면 접근성이 낮다. 공중파 드라마는 홍보 없이도 최소 3프로의 시청률은 보장되는 반면, 케이블은 본방 한 달 전부터 홍보에 매달리고서도 시청률 3프로를 넘기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나마도 화제가 안 되면 완성도 높은 드라마도 1프로대의 시청률에 머무르며 본 사람만 인정하는 드라마가 된다.
하지만 화제를 끌어모을 수만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단 화제가 되고 나면, 대중성과 완성도가 충족된 콘텐츠는 채널에 상관없이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니까. 그 증거로 인터넷상에서 열풍을 일으키며 포털, 커뮤니티를 들썩이게 한 드라마들은 케이블의 벽이나 마찬가지였던 10프로의 시청률을 훌쩍 넘기기도 했고.
그래서 생각했다.
어차피 일어난 논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논란이, 이 화제가, 사람들이 고양이 수호령이라는 드라마를 기다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니까.
하나는 이송하와 몇 주간 함께 대본리딩을 하면서 감탄스러운 연기력과 집중력을 계속 확인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고양이 수호령이라는 작품이 대박을 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런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얘기해봤자, 엘제이가 그랬던 것처럼 낙관적이라는 소리나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오디션 영상만 보고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지?
“그랬다가 잘못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래,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본부장이 운을 떼자 박팀장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아요? 물론 대표님 말씀처럼 이 논란을 계속 끌고 가면 첫방 시청률이야 공중파 뺨치게 찍을 수 있겠지만, 다들 송하 연기를 평가하는 시선으로 뜯어 볼 거예요.”
본부장도, 3팀장도, 김현조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한다.
박팀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욕하던 사람들은 ‘너, 어디 얼마나 잘하나 한 번 보자’하고 아예 꼬투리 잡을 준비를 하고 TV 앞에 앉을 텐데, 송하가 연기를 조금만 못한다 싶으면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난리가 날 거라구요.”
곧바로 3팀장까지 가세한다.
“송하한테도 부담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가 좋긴 한데, 그래도 부담감에 눌리면 베테랑들도 제 실력 안 나올 때 있잖아요. 얘는 더군다나 첫 작품인데 자칫하면…….”
“그러니까 잘해야지. 배우는 연기를 잘하고.”
백한성 대표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매니저는 케어를 잘하고.”
회의는 한동안 더 이어졌다.
본부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몇 차례 더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에는 백한성 대표가 TVL로 들어가 김판석 대표와 신태균 감독, 그리고 국장을 만나보는 것으로 정리됐다.
박팀장이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논란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1월까지 끌고 가라…… 어깨가 무겁네요. 드라마 첫방 날까지 살얼음판이겠어요.”
“만약 불씨가 꺼질 것 같으면 얘기해.”
백한성 대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랜만에 인터뷰 한 번 하지 뭐.”
“대표님이요?”
“연기를 못하는 애였다면 오디션을 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면, 내가 낙하산으로 꽂았으면 TVL밖에 못 꽂았겠느냐, 이런 거 어때. 던져놓으면 활활 잘 탈 것 같은데.”
모두 식겁한 표정으로 듣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농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박팀장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활활 타겠죠, 아주 회사까지 시커멓게 다 타겠죠. 대표님 인터뷰하실 일 없게 그냥 제 선에서 알아서 할게요.”
“그래, 그럼 다들 수고해.”
슬슬 나가는 분위기길래 나도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내 노트북을 챙겼다. 그리고 김현조의 뒤를 따라 일어섰을 때였다.
“안 바쁘면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불쑥, 백한성 대표가 말했다.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겠느냐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들 날 쳐다보고 있다.
백한성 대표까지.
나야?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거든.”
“아…… 예.”
일단 대답부터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얘기가 오갈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마지막으로 김현조가 아래에서 보자는 듯, 검지로 바닥을 가리키는 제스쳐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대표실 안에 남은 건 나와 백한성 대표. 그리고 침묵뿐이다.
뭐지?
나한테 또 뭘 물어보고 싶다는 거지?
드라마에 대한 얘긴가? 아니면 이송하에 대한 얘기?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있을 때.
내 경우의 수에 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성도원 문제는 어떻게 알았어?”
“……예?”
“알고 도원이 제안을 거절한 거 아니야?”
잠깐 멈췄던 머리가 다시 빠르게 굴러간다.
성도원이 겉만 멀쩡할 뿐, 속으로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았구나. 하긴 그날로부터 벌써 몇 주나 흘렀지. 예지능력으로 본 미래에서도 W&U는 성도원과 퓨어스타의 폭로전이 터지기 전에 계약을 해지했다고 했으니까, 미리 알게 되나 보다, 생각하긴 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아는 척을 하면 어떻게 알았느냐부터 시작해서 뒷감당이 골치 아파지니까.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쳐다봤더니 백한성 대표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우연이라…….”
긴 손가락이 또다시 소파 팔걸이를 툭, 툭, 두드린다.
추궁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입사하고 나서 한 달이 워낙에 스펙터클했고, 무엇보다 미래 예지능력이 생기면서 멘탈이 몇 배나 강화됐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태연히 표정관리를 하긴 힘들었을 거다.
“알았어.”
침묵 끝에 백한성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드라마도 니가 가져온 거라고 들었는데.”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해서 박팀장님께 부탁했습니다.”
“이게 성공하면 이번엔 뭘 줘야 하나…… 원하는 게 있으면 그때 가서 얘기해. 이것저것 안겨놓고 옆에 둬야지. 운이 좋은 사람은.”
백한성 대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 봐.”
“예. 가보겠습니다.”
다시 노트북을 챙기는데, 위에서 다시 백한성 대표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아, 그리고 이송하 말인데. 계속 붙어 있어.”
붙어 있으라고?
“연기에 대한 중압감, 압박감, 책임감,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배우는 드물거든. 그래서 대부분 뭔가에 의지하려고 해. 그게 약이나 술 같은 게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백한성 대표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 의지하게 만들어. 다른데 눈 돌리지 않게.”
나는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이송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해야 지금 이상하게 울렁거리고 있는 속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아서.
-네, 이송하 핸드폰입니다! 잠깐만 기다….
“나야.”
인터넷을 하지 못하게 지켜보라고 했더니 아예 핸드폰을 뺏었구나.
익숙한 임서영의 목소리를 자르며 말했더니 건너편이 조용해진다.
“여보세요? 안 들려?”
-아뇨, 들리는데…… 선우 오빠예요? 오빠 핸드폰으로 전화한 거예요?
“서영아, 우리 만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내 목소리를 몰라?”
-아니에요, 알죠, 아는데…… 어, 저장이…….
“설마 송하 핸드폰에 내 번호 저장이 안 돼 있어?”
그건 다른 의미로 충격일 것 같은데.
-아뇨, 저장은 돼 있는데…… 어쨌든 바꿔드릴게요!
뭐지?
반응이 이상한데, 더 궁금해할 새도 없이 바로 이송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출근하셨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다.
“어. 뭐해?”
-밥 먹어요.
“아침을 이제 먹어?”
-아뇨. 아침은 아까….
“아, 점심?”
-아뇨. 점심은 이따 언니들이랑 피자 시켜먹기로 했어요.
“……너 혹시 인터넷 기사 같은 거 봤어?”
-아니요. 언니가 핸드폰 가져갔었어요. 지금 막 받은 거예요.
다행이다. 스트레스 때문에 먹는 건 아니겠구나.
나는 저쪽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전화 끊으면 다시 줘. 인터넷에서 하는 말들 보면 기분만 상하니까.”
-전 괜찮…… 신경 안 써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 망설임 없는 대답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가 휘어져 올라갔다.
오도독 뭔가를 깨무는 소리와 함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안 그래도 캐스팅이 너무 쉽게 돼서 기분이 좀 이상했는데, 이제 실감이 나요. 진짜 같아요. 시간이 빨리 가서 얼른 드라마 촬영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송하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묻는다.
-우리 오늘은 대본리딩 안 해요?
“해야지. 여기 일 끝나는 대로 갈게.”
나는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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