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3) >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넵튠 숙소로 향했다.
이송하에게 가능한 한 빨리 대본을 건네주고 싶었다. 오디션 준비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시놉시스의 짧은 대사만으로도 기대되는 연기를 보여줬던 이송하에게 이 대본을 주면, 과연 어떤 연기가 튀어나올지 그게 너무 궁금했다.
도착해서 벨을 누르자 엘제이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문을 연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지 반짝거리는 긴 금발이 헝클어져 있고, 같은 색의 속눈썹에도 졸음이 뚝뚝 떨어진다.
“오셨어요?”
“어. 송하한테 대본 주려고.”
“걔 지금 씻어요.”
엘제이가 기지개를 켜더니 툭 던지듯 말한다.
“비번 828289예요.”
“어?”
멈칫하며 쳐다보자 엘제이가 목을 긁적인다.
“다음부턴 그냥 비번 누르고 들어오세요. 몇 달 지나야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오빠가 이상한 짓 할 사람처럼은 안 보여서요. 도둑이나, 스토커나, 변태나, 그런 거 아니잖아요?”
“음. 아닐 거야, 아마.”
“아마는 뭐예요! 비번 확 바꿔버릴까 보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임서영이 커다란 고무 짐볼에 배를 대고 엎드리고 있다. 운동을 하는 건지, 그냥 걸쳐져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옆, 소파에는 이태희가 드러누워서 리모컨을 누르고 있다.
애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도 소파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신대륙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설었는데,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다 보니까 이젠 이 소파가 내 지정석처럼 느껴진다.
“오빠, 오빠, 오빠.”
“어. 한 번만 불러도 들려.”
“에이, 한 번만 부르면 정 없잖아요.”
임서영이 허우적거리며 짐볼을 밀어서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묻는다.
“어제 송하랑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죠?”
있었지. 많았지. 짚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쿡쿡 찔리는 속을 감추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왜?”
임서영이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힌다.
“있었던 것 같은데. 걔가 어제 막 웃으면서 들어왔단 말이에요.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 별일이네.”
“그렇다니까요. 발목에는 붕대나 감아놓고.”
아. 들켰구나.
슬그머니 임서영의 도끼눈을 피했다. 이태희가 TV를 끄고 날 쳐다본다.
“자기 입으론 별거 아니라는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가벼운 염좌래. 관리만 잘하면 문제없을 거야.”
걱정하고 있었는지 애들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다.
얼마 후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끊어졌다. 덜컥 문이 열리더니 이송하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타올로 닦으며 나온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화면 때깔 참 좋다.
“어, 오빠.”
이송하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온다.
“잘 잤어? 피곤하지?”
“이 정도는 괜…… 저 체력 좋아요. 어제도 새벽에 밥 먹고 잤어요.”
말을 하려다가 바꾸는 게, 어제 내가 괜찮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걸 기억하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가방에서 서류봉투 두 개를 꺼냈다. 이송하 거 한 부, 복사한 내 거 한 부.
“고양이 수호령 대본이야.”
“아……!”
“오디션 연습도 해야 하니까, 같이 리딩 한 번 해보자.”
이송하가 서류봉투를 양손으로 답삭 받아서 확인한다. 그리고 다른 애들 눈치를 보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서 해요.”
“응?”
느닷없이 이송하의 방에 들어왔다. 뒤에서 임서영이 치사해서 안 듣는다고 땍땍거렸지만, 이송하는 단호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어색하게 처음 들어온 방안을 둘러봤다.
음…… 여자애 방에 특별한 환상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모습을 상상하진 않았는데. 내 조카들 방과 몹시 흡사하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대신 빈 과자봉지와 과자 부스러기가 굴러다니는 게.
내가 그 참상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송하가 주섬주섬 치우는 시늉을 하더니 침대 밑에 깔린 갈색 러그를 탁탁 친다. 그리고 마음이 급한지 서류봉투를 까뒤집다시피 하며 대본을 꺼낸다.
“여기 앉으세요. 전 대본 먼저 읽어볼게요.”
“어, 그래.”
한참 동안 이송하는 내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대본에만 집중했다. 점점 상기되는 뺨. 놀랐다가, 심각했다가, 희미하게 웃기까지. 미세하게 변하는 그 표정들이 보기 좋아서 나도 지루한 줄 모르고 기다렸다.
마침내 이송하가 숨을 크게 쉬며 대본을 덮는다.
“어때?”
“재밌어요, 이거.”
그럴 줄 알았다. 산타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흐뭇하다.
“그럼 제대로 리딩 한번 해볼까? 내가 지문이랑 상대역 대사 쳐줄게.”
나는 정해원이 처음 등장하는 페이지를 펴고 지문을 술술 읽어내려갔다.
“씬 17. 카페. 밤. 해원, 수척한 얼굴로 구석 자리에 앉아 있다…….”
지문과 카페 직원의 대사를 한참 읽다가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이송하가 놀란 듯 쳐다보고 있다.
“왜 그래?”
“되게 잘하시네요. 프로 같아요.”
“응? 아…… 동화책을 많이 읽어줘서 그런가 보다.”
네쌍둥이들이 워낙 취향이 분명하다 보니, 각자 좋아하는 동화책을 돌아가면서 읽어주다가 생긴 재주다. 지문은 물론, 백설공주부터 마귀할멈까지 내가 소화하지 못하는 동화 캐릭터는 없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자, 그럼 다시 시작한다.”
첫 리딩을 마친 후, 이송하는 탈진한 것처럼 늘어졌다.
얼굴에는 정해원이라는 인물을 뒤집어썼던 여운이 가득 남아 있다.
대본을 덮었음에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따끔따끔하다. 그러고 보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그 긴 지문과 대사를 다 읽었구나.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거실로 나갔을 때. 나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세 명과 마주쳤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굉장한 시선이다.
“오빠.”
임서영이 다가온다.
“밖에서도 들렸는데요, 제가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송하의 방문을 힐끔거리며 조그맣게 묻는다.
“송하 쟤, 연기 좀 잘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지.”
“네?”
“엄청 잘하는 거야.”
이제 확신한다.
이송하는 연기를 굉장히 잘한다. 대본 리딩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 쟤는 연기 쪽으로 재능이 쏠린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재능을 가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내 눈이 삐었거나,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거겠지.
이제는 오디션을 보는 게 염려되거나 긴장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감독, 작가에게 이송하의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감상을 얘기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했다.
처음 보는 번호다.
“여보세요.”
-넵튠 이송하씨 담당하시는 분 맞으시죠?
“네, 정선웁니다.”
-판 프로덕션 제작 피디 박수경입니다.
타이밍 끝내주네.
빠른 걸음으로 소파로 가서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디션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스케줄 괜찮으신 때가 언제세요?
“어제 막 큰 녹화가 끝나서, 모레까진 풀로 괜찮습니다.”
-모레는 저희가 안 되고, 내일로 픽스할까요? 아, 그리고…….
핸드폰 너머의 피디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잇는다.
-이왕이면 정해원 말고 다른 역으로 오디션을 보시는 게 어떠세요?
충격적이진 않다. 사실 대본을 보고 나서 걱정이 되긴 했으니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동시통역사 정해원의 비중이 훨씬 높다. 남녀주인공을 서포트하기 위한 롤만 주어진 조연들과는 달리 서사가 확실한 캐릭터고, 그렇다 보니 감정선도 복잡하다.
그런 중요한 배역에 실력을 증명하지도 않은 신인, 그것도 연기자 지망생도 아닌 무명 걸그룹 멤버를 아무런 고민 없이 캐스팅할 제작자와 감독은 없을 거다. 그랬다면 오히려 내가 더 불안했겠지.
-혹시 대본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정해원이 어려운 배역이에요.
“네, 봤습니다.”
-감정씬이 많아서 연기가 어색하면 힘들거든요. 이송하씨는 나이도 어리시니까 여주인공 직장 아르바이트생 같은, 쉽고 안전한 캐릭터로 오디션 보시는 게…….
만약 이곳에 오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면 좀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처음에 이 역할에 집중한 건, 미래 예지를 통해 이송하가 동시통역사라는 배역을 연기했다는 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정해원 배역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더 큰 이유가 생겼다.
첫째는 정해원이라는 캐릭터가 욕심날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
둘째는 이송하가 이 역할에 애정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물론, 이송하가 이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할 거라는 확신도 생겼고.
“감사합니다, 피디님. 그런데…….”
-네.
“오디션은 예정대로 정해원 역으로 보고 싶습니다.”
*
판 프로덕션의 제작 피디 박수경은 먼지떨이를 들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뿌연 책장 상단을 휘젓자 덩어리진 먼지가 함박눈처럼 떨어진다. 아래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담던 홍주미 작가가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아니, 서지준이 오는 것도 아닌데 굳이 청소까지 해야 돼요?”
박수경이 구시렁거리자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던 김판석 대표가 혀를 찬다.
“W&U에서 오는 건데 걔들이 돌아가서 우리 사무실 거지소굴 같다고 하면 어쩔래.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오디션 보러 오는 연예인인데 사무실 꼬락서니가 이러면 내가 면이 서겠냐? 빨리해, 임마. 곧 도착하겠다.”
“어차피 정해원 역으로는 안 뽑을 확률 99프로라고 하셨으면서…….”
외부 일을 끝내고 들어온 기획 피디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이송하씨 프로필 봤는데요. 비주얼은 대단하던데요? 그 비주얼이면 연기를 좀 못해도 화보나 CF 본다고 생각하고 채널 안 돌릴 것 같던데.”
김판석 대표가 코웃음 치며 딴죽을 걸었다.
“프로필은 개나 소나 다 여신이야. 요즘 포토그래퍼들 실력이 얼마나 좋은데.”
“뮤직비디오도 봤어요.”
“실물 봐야 알아. 비주얼 끝판왕이라고 팬들이 떠받드는 걸그룹 멤버들, 막상 배우랑 투 샷 찍으면 열에 아홉은 굴욕 샷 되는 거 몰라?”
“그건 맞죠. 배우 비주얼은 따로 있다니까.”
박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때, 오디션 보러 올 손님들한테 내놓을 고급 과자를 사러 갔던 막내 피디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우와…… 다들 보셨어요? 지금 밑에 연예인 있어요. 여배운 거 같아요.”
“쟨 또 왜 저래? 너 영화 조연출 하다 왔다며. 여배우 하루 이틀 봐?”
박수경의 핀잔에 막내 피디가 침을 꿀꺽 삼킨다.
“엄청 예뻐요, 선배. 백 미터 밖에서부터 후광이 빡!”
그 순간.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남녀 한 쌍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안에 있던 모두가 단숨에 여자 쪽이 막내 피디가 말한 후광의 주인공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막내 피디의 호들갑을 이해했다.
“안녕하세요, 이송하예요.”
“정선웁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박수경이 먼지떨이를 집어 던지고 손님을 맞았다.
“제작 피디 박수경입니다.”
명함을 꺼내며 그는 눈앞의 이송하를 힐끔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느라 흐트러진 생머리를 흰 손가락이 쓸어넘긴다. 그 아래로 완벽한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박수경은 휘파람을 불고 싶은 걸 참았다.
스무 살짜리 걸그룹 멤버라길래 통통 튀는 발랄한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오히려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다. 사실을 모르고 봤다면 영락없이 여배우인 줄 알았을 거다.
배우랑 투 샷 찍으면 굴욕 샷이 될 거라고?
오히려 이송하가 조연으로 들어오면 여주인공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지간한 비주얼로는 투 샷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경은 어렵사리 이송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함께 온 남자가 명함을 내밀고 있다. 캐주얼 정장에 깔끔한 코트 차림. 보자마자 매니저라는 직업을 떠올릴 만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멀끔하지만, 정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다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고급스러운 명함에는 ‘W&U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정선우’라는 글자가 박혀있다.
김판석 대표를 비롯해 사무실 식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박수경은 그 두 사람을 오디션을 볼 회의실로 안내했다. 함께 들어간 사람은 김판석 대표와 신태균 감독, 그리고 홍주미 작가 세 사람이었다.
문이 닫히자 밖에 남은 세 사람은 커피와 간식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수군거렸다. 물론 대부분 이송하의 외모와 관련된 얘기였다.
그러다가 막내 피디가 뜬금없이 물었다.
“같이 온 사람 젊어 보이던데, 높은 사람인가? 직함이 뭐예요?”
“명함에는 이름만 써 있던데? 로드 같진 않더라. 여유 있어 보이는 게.”
“근데 보통 신인 오디션 보는데 윗사람이 따라오나? 소규모 기획사도 아니고 W&U 같은 덩치 큰 회사에서…… 혹시 거기서 제대로 키워보려고 밀고 있는 앤가? 비주얼만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데.”
“그럼, 생각보다 연기 잘할 수도 있겠네요.”
그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막 오디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3)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