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2) >
서지준. 서지준이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2팀장님이 반대하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몰라.”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머리가 다시 복잡해진다.
“아참, 대본. 너도 대본 봐야지.”
“아.”
김현조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봉투를 받았다. 열어보자 A4용지에 프린트된 대본 두 부가 보인다. 고양이 수호령 대본 1부, 그리고 2부.
우여곡절 끝에, 대박 드라마를 탄생시킨 그 대본이 내 손에 들어왔다.
대본을 들고 곧장 회의실에 틀어박혔다.
50페이지 내외의 대본 두 부를 다 읽은 후, 참고 있던 깊은숨을 토해냈다.
재미있다.
단 한 씬도 지루하지 않고, 주연과 조연, 심지어 단역까지 모든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따라가면서, 그 안에는 복합적이고 탄탄한 구성과 리얼한 대사를 잘 버무렸다.
텍스트만 읽었을 뿐인데 눈앞에 드라마 두 편이 재생된 기분이다.
대본이 다 했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은, 정말 재미있는 대본이다.
……그럼 다시 머리를 굴려보자.
주인공이 바뀌게 될 거라고 확정 짓고 생각해 보면, 서지준은 절대 나쁜 카드는 아니다.
내가 알기로 고양이 수호령의 남자주인공 물망에 올랐던 배우가 임주원, 김연성, 박혜민 정돈데, 급으로 따져보면 서지준이 제일 나으니까.
문제는, 잘나가는 배우를 쓰는 게 반드시 성공으로 직결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럼 탑스타를 쓴 드라마들은 줄줄이 히트만 치게?
탑스타 약발이 무조건 통하던 시절은 지났고, 이제 관건은 소화력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얼마나 잘 살려내는가.
연기력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거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와 훌륭한 대본이 합쳐지면 시너지가 폭발하게 돼 있으니까.
고양이 수호령의 남주인공은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의 가면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가면 속에 있는 건 섬세하고, 소심한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덜떨어진 것 같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적인.
그런데 내가 아는 서지준은 지금까지 일관된 이미지를 보여준 배우다.
차갑고 까칠한 엘리트 이미지.
그 배우가 과연 이런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망가지는 역할을?
……젠장, 골머리 아파 죽겠네.
혼자 고민하다가 5층 홍보팀 사무실로 올라갔다. 물론 양손에는 커피를 포장해 들고.
“팀장님. 커피 좀 드세요.”
“응?”
파티션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비죽비죽 나온다. 박팀장이 피식 웃으며 일어난다.
“이제 자기가 그러고 있는 그림이 익숙해지려고 한다?”
“그러게요. 오실 때마다 커피 들고 오시니까 저희야 너무 좋지만.”
“근데 오늘은 뭐예요?”
내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신라의 화랑, 야수, 사차원의 남자, 커플의 의무… 같은 드라마요.”
“응, 다 대박 난 드라마네.”
“주인공이 바뀌었어도 그렇게 대박 났을까요?”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박팀장이 입을 연다.
“뭐, 늘어놓자면 끝도 없겠지만…… 한 마디로 운이지, 뭐.”
“운…….”
“그만큼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큰 대박이 났을 수도 있고. 캐스팅을 왜 도박이라고 하겠어.”
“그런데 선우씨가 말한 작품들이라면, 주연배우가 바뀌더라도 못해도 중박은 치지 않을까요?”
여직원이 진지하게 턱을 문지르며 끼어든다.
“왜, 그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대본이 좋았잖아요. 연출도 좋았고.”
“그렇긴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라마는 역시 대본빨이 크니까. 교체된 배우가 연기를 엄청 못하거나, 다른 배우랑 케미가 엄청 안 살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뭐.”
남직원도 한마디 거든다.
그 부분은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입을 열려는데 박팀장이 불쑥 말한다.
“자기, 고양이 수호령, 그 작품 때문에 생각이 엄청 많은가 보네. 우리도 어제 대본 봤는데 재밌더라. 내가 근래 본 것 중에 제일 재밌었어.”
“맞아요. 시놉은 정말 별로였는데 대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요.”
“첫날엔 넥스트 K스타를 물어오더니, 만약 이 드라마까지 잘 되면 선우씨한테 진짜 뭐 있는 거예요. 두고 봐야지.”
박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찔러온다.
“그런데 주연배우가 바뀌어도 드라마가 괜찮은지 물어본 거 말이야. 혹시 지준이가 남주인공 역할로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해서 그래? 지준이가 들어가서 작품 이상해질까 봐?”
“진짜 그런 거예요? 선우씨는 그럼 남주로 누구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김연성? 임주원?”
“에이, 걔들보다는 지준씨가 낫지. 지준씨 잡으면 프로뎍션 입장에서도 완전 때땡큐일 텐데.”
나는 입술을 살짝 핥고 말했다.
“서지준씨 굉장히 좋은 배운 거 알죠. 그런데 남주인공 캐릭터가 중간중간 망가지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사실 서지준씨 이미지가…….”
“아, 자기는 지준이 실물을 아직 못 봤구나?”
박팀장이 갑자기 소리 내서 웃는다. 두 직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지준이가 이 드라마를 괜히 하고 싶다고 한 게 아니야.”
“네?”
“서지준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내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이 캐스팅이 성사되면, 작품에는 분명 신의 한 수가 될걸?”
……신의 한 수라고?
*
매니지먼트사업부 2팀.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는 사무실 안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지준아, 너 안 그러던 애가 왜 갑자기 고집을 부리냐.”
2팀장이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올해 영화 찍기로 얘기 끝냈잖아. 이제 시나리오만 결정하면 돼. 작품성 있는 걸로 한 편 찍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니 이름 앞에 영화배우 타이틀 붙을 거고, 몸값도 훨씬…….”
“팀장님.”
서지준이 담담하고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이 주신 시나리오, 저한테 어울린다고 추천해 주신 배역들, 사실 전 이해가 잘 안 돼요. 저 멍청한 거 아시잖아요. 캐릭터를 이해를 못 하는데 어떻게 연기를 해요.”
“지준아, 들어 봐. 그건……!”
“그런데 고양이 수호령, 그 작품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밌고.”
“아니, 미니시리즈라도 왜 하필이면 케이블이야? 어? 공중파에서도 너 달라고 했던 작품들 얼마나 많았는데. 너도 알 거 아냐, 케이블은 드라마 완성도가 좋아도 시청률 1프로로 막 내리는 거 많아. 왜 시간 낭비하려고 그래?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긴지 몰라?”
2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설득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서지준이 날렵하게 뻗은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팀장님이 골라주신 작품 다 했잖아요. 이번엔 제가 하고 싶은 거 할게요.”
“지준아!”
“죄송합니다.”
서지준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무표정한 서지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걷던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비상구 문을 연다.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매니저 이봉준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어? 어? 딱 잘라서 얘기하고 왔어?”
비상구 문을 닫은 서지준이 주르륵 미끄러진다.
“어어, 그런 거 같아. 아우 씨,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팀장님한테 안 잡아먹힌 게 다행이다.”
“그러니까 같이 좀 들어가자니까! 형은 어떻게 자기 배우를 뱀 아가리에 혼자 처넣냐?”
“넌 배우니까 들어가서 딱 잘라서 얘기할 수 있는 거지, 난 들어가면 딱 잘려. 너 나 잘렸으면 좋겠냐?”
“그건 아니지…….”
서지준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린다. 이봉준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잘 됐다니까 다행이네. 고집부려서라도 이번 드라마는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렇지?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하지. 보자마자 딱 알겠더라. 그건 너를 위한 대본이야. 너를 위한 배역이고. 난 작가가 널 모델로 쓴 줄 알았다니까?”
“아, 진짜…… 형은 어쩌면 나랑 그렇게 생각하는 게 똑같지?”
“흐흐. 그러니까 내가 니 매니저지.”
두 사람은 차가운 비상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이봉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린다.
“이렇게 되면 내가 3팀 복댕이를 한번 만나봐야겠네. 어쩌면 같이 촬영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복, 뭐? 그게 누구야?”
“우리 회사 걸그룹 넵튠 알지?”
“어…… 들어본 거 같아.”
“그 팀 매니저. 이 작품 걔가 갖고 온 거래. 홍보팀에 부탁해서 시놉 받고, 그거 보고 넵튠 멤버 한 명 드라마에 넣으려고 대본 요청한 거라더라.”
“아, 그래? 그럼 그 사람 아니었으면 내가 이 대본을 볼 일도 없었다는 거네?”
“그렇지?”
“음…….”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던 서지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형, 그 사람 만날 때 나도 같이 가.”
판 프로뎍션. 김판석 대표는 미동 없는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작 피디 박수경이 싹싹 긁어먹은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표님, 짜장면 불어요. 얼른 드세요.”
“짜장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서지준이 우리 드라마를 할지, 안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 중차대한 시국에?”
“그렇게 쳐다본다고 연락이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신태균 감독이 하품을 쩍 하며 대화에 동참했다.
“위에서는 빨리 서지준 계약서 들고 오라고 난리예요. 벌써 캐스팅 확정 기사까지 써놓고 기다리고 있다던데요.”
“하아…… 피를 말리는구만, 피를 말려.”
“그런데 그 친구 연기 잘하는 건 아는데, 진짜 우리 작품에 맞겠어요? 선배도 어제 만나서 잠깐 얘기했다면서요.”
“그때 삘이 딱 꽂혔다니까. 신감독이랑 홍작가도 만나보면 알 거야. 그러니까 꼭 성사돼야 하는데…….”
김판석 대표가 핸드폰을 보물처럼 쥐고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박수경이 빈 그릇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그런데요, 대표님. 이송하였나? 걔 오디션은 언제 볼까요? 연락해주기로 해서 빨리 결정해야 하는데요.”
“아…… 그 걸그룹? 연기 처음이라는?”
“네. 동시통역사 정해원 역이요.”
심태균 감독은 물론, 짬뽕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던 홍주미 작가도 얼굴을 들었다. 김판석 대표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걔를 오디션에서 떨어뜨리면, 서지준도 날아가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죠. 처음부터 서지준한테 끼워서 보낸 것도 아닌데. 이송하라는 멤버가 시놉보고 꼭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해서 연락했다고 했잖아요. 걔 매니저가 적극 추천했댔나? 어디서 우리 드라마 얘길 들었는지, 처음에 시놉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도 그 매니저였다고.”
“그럼, 그 고마운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오디션은 정해원 역 말고 더 쉬운 역할로 보자고 얘기해봐. 정해원 역은 어려울 거니까.”
“네?”
“정해원은 조연 롤이긴 해도 비중이 높다고. 그리고 연기력이 안 받쳐주면 절대로 소화할 수가 없는 배역이야.”
홍주미 작가도, 신태균 감독도 고개를 끄덕인다.
김판석 대표가 다시 말했다.
“초짜 캐스팅했다가 연기 안 되면 배우도 욕먹고 작품도 망가져. 좋은 대본을 미스 캐스팅으로 망치면 쓰냐?”
“알았어요. 매니저랑 통화해 볼게요.”
박수경이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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