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1) >
나는 뛰다시피 가서 조수석에 올라타려는 김현조를 붙잡았다. 다른 애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하자, 김현조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라네요.”
“쟤도 참…… 그럼 선우 니가 응급실에 좀 데려가라.”
“네. 걱정 마세요.”
“집에 들어가서 나한테도 전화하고.”
“네.”
다른 애들한테는 김현조가 능숙하게 둘러댔다. 드라마 오디션 문제로 급하게 회사에 들러야 할 일이 생겼다고. 배신자가 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을 뿐, 다른 애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승합차를 타고 떠났다.
나와 이송하도 택시를 잡아서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혹시 큰 문제라도 생긴 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심하지 않은 염좌였다.
진료를 받고 병원을 나왔을 때는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도로 쪽으로 나가면서 택시가 있나 둘러보는데 이송하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비척비척 따라온다. 보는 사람 마음 약해지게.
“주스 한잔 마시고 갈래?”
“네.”
이송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벤치에 앉혀놓고 자판기에서 이송하가 좋아하는 주스 한잔을 뽑았다. 주스를 건네주고 나도 옆자리에 앉았다.
생각이 복잡해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더니, 지금은 씻은듯한 밤하늘에 달이 유난히 밝은 빛을 뿌리고 있다.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왜 일찍 말 안 했어?”
이송하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진다.
“죄송해요.”
“심하게 다친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다쳤다고 하면 녹화 못 하게 할까 봐 그랬어?”
다그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노력한 게 도움이 되었는지, 주스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송하가 무거운 입술을 뗀다.
“제가 다 망쳤잖아요.”
“그게 왜 니 탓이야, 비 탓이지.”
그리고 지저분해 보인다고 가림막을 안 친 제작진 탓이지.
그래서 애들을 빗속에 춤추게 만들고, 넘어지게 하더니, 결국에는 공연까지 캔슬해?
내가 그 프로그램 피디 이름하고 부장 이름 다 알아놨다. 혹시라도 나중에 넵튠 애들 뜬 다음에 섭외가 들어오면 단칼에, 아주 단칼에 쳐내버리겠다고 다짐까지 했다고.
그 제작진을 떠올렸더니 또다시 짜증이 불쑥 올라온다. 심호흡하면서 가라앉히고 있는데, 이송하가 다리를 움츠리는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위에는 든든하게 입었어도 아래는 짧은 치마 밑으로 맨다리가 드러나 있다.
혀를 차며 코트를 벗어서 내밀었다. 뭐, 이것도 한번 쫄딱 젖었다가 마른 거라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찬 바람은 막아주겠지.
“이걸로 덮어.”
“괜….”
“넌 괜찮다는 말을 하지 마. 아까도, 그게 괜찮을 일이야?”
뱉어놓고 아차 했다. 괜히 마음 다스린 애한테 다시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것 같아서. 힐끔 보니 이송하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어둡다.
젠장, 어떡하지.
머리를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굴리고 있을 때, 이송하가 무릎에 덮은 코트를 만지작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전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뭐?”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이송하가 말도 없이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니까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보다.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시 입을 열려는데, 이송하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가슴이 덜컥했다.
애들이 우는 건 질리도록 보고, 또 달래도 봤다. 하지만 걔들은 당장 죽을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다가도 눈앞에 엄마만 데려다 놓으면 살아나는 종족이라고.
“그…… 송하야.”
“네.”
이송하가 손등으로 눈을 슥슥 문지른다. 눈물은 딱 한 방울로 끝났다. 하지만 눈물이 더 흐르지 않아도,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울먹울먹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이 가득하다.
저렇게 가라앉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달랜다고 이 얘기 저 얘기 했다가 더 악화하면 어쩌지? 지금 저것도 내가 울린 것 같은데?
넵튠 애들한테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위로를 해야…….
“너, 어… 부모님께 전화라도 할래? 기분 좀 나아지게. 자리 비켜줄까?”
던져놓고 아차 했다. 부모님께 전화하기엔 늦은 시간이잖아.
이송하의 안색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진다.
“엄마 아빠는 저 연예인 하는 거 싫어하세요. 안 되는 걸 왜 자꾸 하려고 하냐고.”
“어…….”
“저번 앨범 망하고 난 다음부턴 전화도 잘 안 와요.”
돌아버리겠네.
몇 차례 입술만 달싹이다가,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니가 왜 쓸모가 없어. 너 아까 녹화할 때 잘했어. 실장님이랑 건영이랑 나랑, 우린 보면서 너 잘한다고 난리 났었다고. 그리고 춤이랑 노래는 좀 더딜지 몰라도, 그래, 넌 연기에 재능이 쏠렸다니까?”
이송하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지금 이것도 봐. 얼마나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했으면, 너 발목 다친 것도 니가 말하기 전까진 아무도 몰랐잖아. 최건영, 걔 눈치 빠른데 걔도 몰랐어.”
농담을 섞어 말하자 이송하의 눈이 살짝 빛난다.
“드라마 한 편 찍고 나면, 분명 ‘이송하의 재발견’이라는 소리 듣게 될 거야.”
아. 얼굴에서 먹구름이 서서히 걷혀간다. 그 속에서 미소가 드러난다.
“오빠 말처럼, 제가 진짜 연기에 재능이 있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기운을 차린 듯, 이송하가 주스를 단숨에 비우고 나서 말했다.
“빨리 오디션 보고 싶어요.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너는 지금처럼만 해.”
그럼 기회는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까.
이송하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송하가 재능을 활짝 꽃피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 지금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까마득히 높고 화려한 그곳에,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
내 힘으로.
내 손으로 그곳까지 데려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이송하를 숙소에 들여보내고 나도 원룸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문 앞에 섰는데 밑에 웬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있다. 뭐지, 생각하다가 엄마가 택배를 보냈다고 하셨던 게 떠올랐다.
방으로 가져가서 열어보니 지퍼백 안에 파김치랑 마른반찬 몇 개가 가지런히 정리된 채로 담겨있다. 그리고 꿀에 재운 생강이 가득 들어있는 유리병도.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내일 출근 전에 전화드려야겠네.
물을 끓여서 생강차를 한잔 탔다.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한 모금 마시자 굳어 있던 몸이 사르르 풀어진다.
이제야 좀 살겠네.
뱃속이 따듯해지니까 졸음이 밀려온다. 나는 코트도 안 벗은 채로 책상에 엎드렸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냥 이대로 엎어져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한다. 꺼내보니 김현조다.
아, 전화하라고 했었지.
“네, 실장님. 저 지금 막 들어왔어요.”
-그래. 송하는 어때?
“가벼운 염좌래요. 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다행이네. 그럼 오디션 보는 데는 문제 없는 거지?
정신이 번쩍 든다.
“오디션이요?”
-영훈이 형이랑 통화했는데, 오후에 판 프로덕션 대표가 대본 들고 회사에 왔었대. 형이 직접 만났고, 대본도 읽어봤는데 괜찮다더라. 좀 더 얘기해봐야겠지만 송하 이 작품으로 오디션 준비하면 될 것 같아.
드디어!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기회를 눈앞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건 그걸 잡아채는 것뿐이다.
이송하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이 얘기를 해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참, 앞으로 송하 개인 스케줄은 너한테 한번 맡겨볼까 하는데. 어때?
“……!”
-니가 들고 온 작품이기도 하고, 송하도 널 좀 따르는 것 같고. 그리고 너 하는 거 보니까 한 번 믿어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뭐, 못하겠으면 관두고.
“아뇨! 제가 할게요!”
거의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크긴 컸는지 옆집에서 벽을 두들기길래, 소리없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그래도 흥분을 참기 힘들어서 좁은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신이 축축 늘어지고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당장 출근하라고 해도 거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김현조가 불쑥 덧붙였다.
-아, 그리고 이건 확실한 건 아닌데. 그 작품 남자 주인공 배역, 우리 회사 애가 할지도 모른대.
……뭐?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 내일 회사에서 얘기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내가 봤던 미래. 고양이 수호령이 대박 났다는 정보를 들은 미래에서 분명 드라마의 주인공은 W&U 소속 배우가 아니었는데.
설마…… 드라마 주인공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도는 생각들이 나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왜 고양이 수호령의 주인공 역할에 W&U 배우가 거론되게 된 걸까?
진짜 바뀐다면 누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는 거지?
설마, 설마 성도원은 아니겠지? 아냐. 이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이것만큼은 절대 아닐 거다. 내가 그 정도로 재수가 없는 놈은 아니야.
하아……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생긴다면, 앞으로의 미래 역시 필연적으로 바뀌게 되겠지.
송하가 오디션을 볼 동시통역사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연이지만, 남주인공은 드라마의 간판인데. 비중이 전혀 다르잖아.
성공이 예정된 드라마에 남주인공 배우가 교체된다면 그 드라마는 과연 예정대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을까?
젠장. 고양이 수호령에 캐스팅만 되면 이송하 앞길에 8차선 고속도로는 아니더라도 시멘트 도로 정도는 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하나 쉽게 쉽게 진행되는 게 없다.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김현조가 깜짝 놀란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는데?”
“고양이 수호령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요.”
“아하, 그래서 새벽같이 왔구만? 어깨가 무거워지니까 잠이 안 오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내 급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김현조가 팔짱을 끼며 말한다.
“판 프로덕션 쪽에 니 연락처 알려줬으니까 너한테 전화 올 거야. 통화해서 오디션 일정 잡고. 그밖에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은 나한테 먼저 얘기하고.”
“네. 그런데 남주인공을 우리 배우가 할지도 모른다고 하셨던 건…….”
“아, 그거?”
제발 파투났다고 해라. 제발.
최악의 경우 남주인공이 바뀌더라도 성도원만큼은 안 된다. 다 된 드라마에 성도원을 끼얹을 순 없어.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때, 김현조가 물었다.
“너, 서지준 알지?”
“……서지준이요?”
당연히 안다. W&U에서 직접 키워서 데뷔시킨 배우.
지적이고 세련된 비주얼에, 트레이닝을 오래 받아서 연기력으로는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없는 좋은 배우다.
공중파 주말 드라마와 평일 미니시리즈 몇 편을 차례로 성공시키면서 원톱 스타로 자리매김했고, 지금은 스크린 진출을 위해 신중하게 시나리오를 고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판 프로덕션 대표가 회사 왔을 때 서지준이랑 마주쳤나 봐. 그래서 대본을 줬는데, 서지준이 대본을 읽고 나서 하고 싶다고 했다네?”
< 미스 캐스팅인가, 신의 한 수인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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