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38화 (38/218)

<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2) >

“액땜한 거 같아.”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임서영이 불쑥 말했다.

“바닥 엄청 미끄러웠잖아. 거기서 다시 공연했다가 누가 또 자빠져서 뼈라도 부러졌어 봐. 당장 넥스트 K스타 녹화는 어쩔거야?“

“그래. 나도 아슬아슬했어.”

“다쳐서 녹화 일정에 지장 생기면 그게 더 큰 일이지.”

애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던진다.

나도 백미러로 뒷좌석 구석에 있는 이송하를 살폈다. 이송하가 울면서 자책감에 시달리는 티를 낸 건 아니다. 하지만 쟤가 지금 상태가 안 좋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휴게소에서 멈췄을 때 애들한테 점심거리를 골라오라고 했는데, 이송하 혼자 3인분은 될 양을 싸들고 왔거든. 그리고 그걸 꾸역꾸역 다 먹어치우는 중이고.

예전에 스트레스받았을 때 야식을 시켜서 먹었다고 했지.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

차라리 애가 울기라도 하면 다른 애들이 좀 더 위로해줄 수 있을 텐데. 속으로 다 밀어 넣고 겉으로는 괜찮다고 해버리니, 지금으로써는 신경 쓰지 않는 척 분위기를 푸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도 그렇고.

“송하야.”

내 부름에 이송하가 얼굴을 든다.

“맛있어?”

“네. 하나 드릴까요?”

“아직 나한테 줄게 남았어?”

그렇게 전투적으로 먹었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단 말이야?

백미러를 보자 이송하가 꾸물대면서 뭔가를 내민다. 빨간 양념이 치덕치덕 묻은 닭꼬치다.

“……드릴까요?”

“아냐, 너 다 먹어.”

내가 어떻게 그걸 뺏어 먹겠냐.

임서영이 이송하를 뚫어져라 보면서 말한다.

“너는 그렇게 먹는데 왜 살이 안 찌니?”

“걔는 먹는 만큼 칼로리를 소모하니까 안 찌지, 멍청아. 넌 운동을 안 하니까 먹는 만큼 찌고.”

엘제이가 놀림조로 던진 말에 임서영의 동그란 눈이 도끼눈이 된다.

“뭐래, 나도 운동 좀 하거든?”

“웃기네. 니가 숨쉬기 운동 말고 뭘 하는데? 뭐, 숟가락 들기?”

“야, 그러는 너는……!”

임서영이 말문이 막힌 듯 버벅거린다. 너는 운동 얼마나 하냐, 하는 질문을 던지기엔 상대가 안 좋다. 엘제이는 복싱을 취미로 하는 애니까. 할 말이 궁해진 임서영이 비교할 상대를 바꾼다.

“태희 언니는! 태희 언니도 연습 안 할 때는 맨날 소파 차지하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운동도 안 하는데 살 안 찌잖아!”

“저 언니는 체질이야, 멍청아. 억울하면 너도 다시 태어나든가.”

“멍청이라고 하지 마, 멍청아!”

그래도 저 두 명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을 틈이 없다. 힐끔 보니 이송하도 유치한 말싸움을 구경하면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한동안 더 들려오다가 차츰차츰 잦아든다. 그리고 곧 차 안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백미러를 보니 다들 곤히 잠들어 있다.

“잠들었네.”

“비도 많이 맞았는데 도착할 때까지 푹 재우지, 뭐.”

보조석에 앉은 배신자가 핸드폰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 그러고 보니, 쟤랑 할 얘기가 남았지.

“최건영.”

“어?”

“너 아까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

이제 기억났다는 듯 배신자가 기묘한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배신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궁금하다. 감 얘기는 왜 꺼낸 거고, 나한테 그동안 묻고 싶었다는 건 또 뭔지.

마침내 배신자가 씩 웃으며 말한다.

“됐어,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야, 나 궁금해서 운전에 집중 못 해. 뭔데?”

“별거 아니었어. 신경 쓰지 마.”

신경이 안 쓰이겠냐.

“진짜 별거 아니야.”

본인이 별거 아니라는데 당장 입을 열고 하려던 말을 토해내라고 협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흩트려 놓고, 배신자는 태연히 다시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

차라리 미래 예지 능력으로 최건영이 어떤 놈이고, 앞으로 어떤 짓을 하는지 낱낱이 알게 된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건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 움직이는 것 같아서.

저놈이 터지는 게 먼저일지, 내 신경줄이 끊어지는 게 먼저일지 모르겠다.

Knet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이미 대기실에서 김현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송하, 엎어졌다면서. 괜찮아?”

“응. 괜찮아. 멀쩡해.”

김현조는 이송하가 괜찮은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

음악방송과는 달리 넥스트 K스타는 대기시간이 길지 않다. 우리는 30분 정도의 여유 시간 동안 다른 팀들한테 눈도장을 찍고, 오늘 처음 보는 심사위원들에게도 인사를 하려고 찾아갔다.

넥스트 K스타의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들을 줄줄이 배출한 프로듀서 송백진, 걸그룹 출신의 실력파 보컬 차수지,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스타 작곡가 사이먼 리. Knet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캐스팅했는지 훤히 보인다.

세 사람이 다 독설에 일가견이 있는 캐릭터니까.

심사위원들하고는 길게 얘기할 틈이 없었다. 참가팀만 모두 8팀, 멤버들과 각 팀에 딸린 스탭들까지, 수십 명의 대인원이 우르르 심사위원 대기실에 몰려드는 바람에 얘기는커녕 인사도 간신히 했다.

몇몇 팀은 하이에나처럼 심사위원들 주변을 서성거렸지만 우리는 미련 없이 대기실로 돌아갔다. 애들은 심사위원들의 눈길 한 번 더 받는 것보다 공연 전에 노래를 한 번 더 듣는 쪽을 선택했다.

잠시 후 FD가  대기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알린다.

“5분 후에 녹화 들어갑니다! 스탠바이해 주세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들은 대기실에 딸린 모니터로 보기로 하고, 나머지 인원만 이동했다.

북새통인 대기실 통로를 빠져나가 공개홀 관람석에 앉으니 세트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번의 심플한 세트와는 딴판이다. 압도적인 규모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는 레일이 쭉 깔렸고 여러 종류의 조명기기들이 빽빽하게 매달린 채 빛을 뿜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한다.

“거기 줄 밟지 마세요! 카메라 나가면 큰일 납니다!”

“심사위원석에 PPL 상품 잘 보이게 세팅 좀 다시 해!”

“출연자들 오디오 채우고, 스탠바이는 다 시켰어?”

“차수지씨 빼구요! 의상 교체하신다는데요?”

“뭐?!”

“다른 심사위원 두 분이랑 컨셉이 따로 놀아서 안 되겠다고 의상 다른 걸로 교체하신대요! 지금 퀵으로 오는 중인데 거의 도착했다고 10분 후에 나온다고 하셨어요!”

“아, 진짜……!”

무대 아래에서 스탭들이 정신없이 소리치며 뛰어다닌다. 시선 돌리는 곳마다 신기한 것투성이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넵튠 애들에게 시선이 멈췄다. 저 애들도 지난번 녹화 때는 주위를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오늘은 다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집중하고 있다.

“둘 다 핸드폰 껐지?”

김현조가 나랑 배신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요.”

“밑에 돌아다니다가 카메라 가로막거나 건드리면 큰일 나니까 조심하고. VJ가 인터뷰하자고 하면 멘트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답하는 거 잊지 말고.”

“네.”

“앞으로 니들한테 맡겨놓고 자리 비울 때가 많아질 거니까 오늘 잘 봐둬.”

귀가 번쩍 뜨인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상황이라는 건 잘 알지만, 내가 직접 모든 상황을 컨트롤한다는 건 역시 흥분되는 일이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만큼 스케줄을 끝낸 후에 느끼는 성취감도 크고.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뒷줄에서 누군가 묻는다.

“애들 보랴, 신입 가르치랴, 힘드시겠네요.”

돌아보니 슈가캣 멤버들과 그 실장이다. 저번 녹화 때 지나다니면서 몇 번 스쳤는데, 슈가캣 애들이 볼 때마다 밉상이라 그런지 저 매니저도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슈가캣 실장이 넵튠 애들을 힐끔 보면서 웃는다.

“근데 넵튠 열심히 하네요. 어차피 오늘은 누가 욕을 덜 먹느냐의 싸움 아니에요? 초반에는 제작진도 세게 간다고 얘기했고, 심사위원들이 세 명 다 완전 필터 없이 내뱉는 스타일들이잖아요.”

“뭐, 방송 초반에 반응이 와야 하니까 어느 정도 자극적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누가 봐도 잘하는 애들은 또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펌프질하고 빨아주기로 했으니까 애들 하기 나름인 거고.”

김현조의 시큰둥한 대답에 슈가캣 실장이 피식 웃는다.

“그런 애들이 많겠어요? 저 양반들 눈이 얼마나 높은데. 뭐, 자극적인 건 상관없으니까 시청률이나 잘 나왔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그룹들과 스탭들도 시청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긴, 이런 예능 프로그램에 시청률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아마 넥스트 K스타와 관련된 사람 중에 시청률 걱정이 없는 건 나뿐일 거다.

나야 뭐, 넥스트 K스타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서 시즌제 프로그램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빨리 첫방이 나가고 넵튠의 인지도가 점점 올라가는 걸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애들도 오늘 오전처럼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을 거고, 나도 활동반경이 훨씬 넓어질 테니까.

“서영아. 연습 많이 했어?”

불쑥, 슈가캣 리더인 한샛별이 상체를 내민다. 임서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폰을 뺀다.

“응.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어.”

“진짜? 시간 많았구나. 부럽다. 우리는 다른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연습시간을 많이 못 뺐어.”

다른 사람이 했으면 무심코 넘길 얘긴데, 몇 번의 부딪침 때문인지 난 이제 쟤가 하는 말이 무조건 번역기를 거쳐서 들린다. ‘우린 다른 스케쥴 소화하느라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니들은 여기 말고는 부르는 데가 없으니까 연습할 시간 많았겠구나’라는 뜻으로.

나보고 속 좁은 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데, 쟤들은 제발 심사위원들한테 가루도 안 남을 정도로 까이고 내려왔으면 좋겠다.

그때, 임서영 옆에서 엘제이가 중얼거린다.

“그럼 심사위원들 대기실 앞에서 죽치고 있을 시간에 연습을 더 하지.”

“……뭐?”

한샛별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엘제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 순간 우리 쪽 진영이 바빠졌다. 주변에 VJ가 있나 확인하느라고.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VJ들을 확인하고 안심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엘제이의 직설적인 말에 통쾌함을 느꼈다. 솔직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다.

“야!”

임서영이 엘제이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카메라 있으면 어떡하려고!”

“주변에 없는 거 다 확인했어, 내가 바보냐?”

애들 싸움이 부모 싸움 된다고, 애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듯 싶자 양측 실장들의 분위기도 싸해진다. 김현조와 슈가캣 실장의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각 팀 멤버분들 오디오 차고 관객석 맨 앞줄에 앉아주세요! 곧 녹화 들어갑니다!”

제작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애들이 주섬주섬 이어폰을 빼고 일어난다. 김현조가 애들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며 말한다.

“아까 들었지? 심사위원들이 혹평하더라도 쇼라서 더 심하게 까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마.”

“걱정하지 마, 오빠. 아침에 비 맞고 멘탈 엄청 단단해졌어.”

임서영이 주먹을 불끈 쥔다.

“오전에 못한 거 여기서 다 보여주고 올게!”

<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2)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