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37화 (37/218)

<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1) >

날씨가 심상치 않다.

나는 승합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창밖의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부터 햇빛 한 점 없이 우중충하더니, 지금은 먹구름까지 꾸물꾸물 몰려들어 짙은 회색으로 덧칠하고 있다.

“오늘 비 오는 거 아냐?”

다른 날이라면 상관없지만, 야외무대 스케줄이 있는 날은 아주 상관이 많다.

운전석에 앉은 배신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아침에는 비 소식 없었잖아. 다시 한 번 확인해봐.”

일기예보 어플을 다시 확인했다. 여전히 구름 아이콘만 떠 있을 뿐이다. 강수확률도 낮고, 한 시간 후에는 구름도 걷히고 해가 나올 거라고 표시돼 있다.

내가 너무 걱정이 많은 건가?

핸드폰을 넣으려는 순간, 드르륵 진동이 울린다.

“여보세요?”

-희망 캠페인 막내 작간데요. 언제쯤 도착하세요?

“지금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작가가 찾아오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가는 스케줄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나눔 캠페인인데, 공연을 한 곡 해달라고 넵튠에게 섭외가 들어왔다. 넥스트 K스타랑 날짜가 겹쳐서 고민을 좀 하다가, 공중파 방송에 공연하는 모습을 내보낼 기회가 많지 않아서 스케줄을 잡은 거다.

“얘들아, 도착…….”

뒷좌석 상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한 명씩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더니, 지금은 네 명 다 담요에 폭 둘러싸인 채 서로의 어깨와 머리에 기대서 곯아떨어져 있다.

가장 뒷좌석에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까지 비몽사몽 하는 중이라, 일단 나랑 배신자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목을 할퀴고 지나간다.

으, 추워.

얼마 안 가서 여자가 달려온다. 목에 관계자용 비표와 헤드셋 형태의 무선 인터컴을 걸고 있는 걸 보니 방금 전화한 막내 작가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넵튠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30분 후에 무대 리허설이에요. 넵튠 무대는 두 번째구요.”

배신자가 중간에 끼어들어 묻는다.

“저희가 오후에 넥스트 K스타 녹화가 있어서 바로 넘어가야 하는데, 시간 지체되거나 그럴 일은 없죠?”

“생방송인데 당연하죠. 한 시간 방송하고 딱 끝날 거예요.”

“네.”

“그럼 대기실 안내 해 드릴게요. 멤버분들은…….”

밖이 너무 추운데. 든든하게 입은 나도 추운데 팔다리가 훤히 드러난 무대의상을 입은 애들을 내놓으면 달달 떨겠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배신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애들 지금 자고 있어서요. 혹시 차 안에서 대기해도 괜찮을까요?”

“아, 그럼요! 그러셔도 되죠.”

막내 작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문득 스치는 게 있어서 물었다.

“작가님, 날씨가 좀 불안한데 괜찮을까요? 야외무대잖아요.”

“원래 오늘 날씨 좋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러네요. 기상청에 연락해 봤는데 별일 없을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기상청을 믿자.

애들은 십 분 후에 깨우기로 하고 김현조에게 도착 문자를 보냈을 때.

“너 왜 안 갔어?”

배신자가 불쑥 물어온다.

“첫날 그랬잖아. 아이돌 매니저는 관심도 없고, 사실 배우 맡고 싶었다고. 배우팀으로 옮길 기회가 생기면 바로 옮길 거라고.”

그랬었지.

“그런데 왜 안 갔어? 무명배우도 아니고, 성도원인데?”

배신자가 재차 묻는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마음속에 벽을 세웠기 때문인지, 배신자와 대화를 할 때는 항상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쟤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의도로 묻는 걸까, 혹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닐까, 혹시, 혹시,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팀 옮길 생각을 하니까 넵튠 애들이 눈에 밟혔어. 그때 니가 말했던 것처럼, 하다 보니까 아이돌 팀 담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정도 좀 있었고.”

“사정? 그, 감이 안 좋다는 거?”

“뭐?”

옆을 돌아봤다. 배신자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너 있잖아.”

속내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배신자가 입을 연다.

“내가 너한테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그때였다.

배신자가 말을 하다 말고 하늘을 쳐다본다. 나도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아까보다 훨씬 더 어두컴컴하다.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부을 것처럼.

그리고 툭…… 차가운 물기가 이마로 떨어진다.

젠장, 비 오잖아!

막내 작가를 찾아 차가운 빗속을 뛰어다녔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서 한참을 헤매다가, 무대 세트 뒤에서 겨우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우비를 입고 있는 남자랑 얘기 중이다.

“피디님, 그대로 진행하는 거예요?”

“부장님 얘기 못 들었어? 생방송 얼마 안 남아서 지금 큐시트 수정 못 한다고, 무조건 그대로 가라잖아!”

“중계 넘어올 때까지 계속 쏟아지면 어떡해요? 가수들 공연은요?”

“부조에서 기상청에 다시 연락해 봤다는데, 잠깐 지나가는 비래!”

그놈의 기상청, 아까는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면서?

얘기를 끝내고 또 어딘가로 뛰어가려는 막내 작가를 붙잡았다.

“작가님!”

“아, 매니저님. 안 그래도 제가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리허설 조금 늦춰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약 비가 안 그치면, 다른 대안은…….”

내 말에 막내 작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한다.

“녹화 방송이면 잠깐 끊었다가 하면 되는데, 이게 생방송이라서요. 무대는 그대로 가게 될 거 같아요.”

“세트 위에 가림막 같은 걸 칠 수는 없을까요?”

“아, 잠깐만요, 여쭤볼게요. 피디님!”

막내 작가가 좀 전에 얘기하던 남자 피디한테 달려가서 말을 건넨다. 곧 남자 피디가 한숨을 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넵튠 담당하시는…… 실장님이신가요?”

“매니접니다.”

“아… 무대 위를 가리면 지미집으로 위에서 잡았을 때 지저분해 보여서 안 돼요. 부장님이 그림에 신경 많이 쓰셔서, 그건 최악의 상황에 생각해 볼 문제고. 지금은 그 정돈 아니니까요.”

그 정돈 아니라고?

“대신 스튜디오에서 MC들한테 넵튠이 비 오는데도 열정적인 무대 보여줬다고 멘트 쳐달라고 할게요. 또 이런 그림이 방송 나가면 화제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좀 부탁해요.”

피디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달려가 버린다.

나는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걸 한숨으로 토해냈다. 막내 작가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한다.

“일단 저희가 우산이랑 우비 먼저 챙겨드리고, 수건도 한번 구해볼게요. 그리고 춤추실 때 움직이시는 걸 좀 자제하시는 걸로…….”

결국, 내 손에 쥐어진 건 투명한 비닐우산 4개와 우비 몇 장이다. 그걸 들고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에 탔더니, 웅성웅성 떠들고 있던 배신자와 넵튠 애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임서영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오빠! 우산을 4개나 들고 왜 비를 다 맞고 와요!”

“이미 젖어서 상관없어.”

“아, 수건도 없는데…… 일단 이걸로라도 닦아요.”

임서영이 덮고 있던 담요를 내민다.

“고마워.”

다 젖어서 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닦으며 배신자에게 물었다.

“비 와도 계속 진행한다는데, 실장님한테 연락해 봤어?”

“생방송이라 어쩔 수 없대. 다치면 절대 안 된다고, 너무 뛰어다니지 말고 안무를 최소한으로 하라더라.”

비슷하구나. 걱정스럽게 넵튠 애들을 바라봤는데, 애들은 담담한 표정이다.

“방송 나가는 건데 당연히 해야죠. 태풍이 오는 것도 아닌데.”

“안 넘어지게 조심하면 돼요.”

“비 맞으면서 공연하는 경우 많아요, 오빠.”

다들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불안을 감추며 창밖을 바라봤다.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창문을 두들긴다.

예정 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뒤에야 드디어 무대 리허설이 시작됐다.

솔로 가수가 먼저 리허설을 하는 동안 우리는 무대 옆에 있는 천막에 옹기종기 모여서 대기했다. 솔로 가수는 비닐우산에 우비까지 입고 여유롭게 리허설을 하고 있다. 지켜보는 매니저도 태평하다.

뭐, 저쪽이야 큰 동작 없이 그냥 서서 노래하기만 하면 되니까.

“저쪽은 생방 때도 우산 쓰고 한다는데, 우리도 우산 쓰는 게 어떨까?”

우비는 힘들어도 우산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어서 물었더니 이태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한 손에 우산 들고 한 손에 마이크 들면 그게 더 위험해요. 우산 부피가 있어서 동선도 꼬이고, 아차 하는 순간 엉망 될 텐데. 현장 상황이 어떻든 TV로 보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건 프로답지 못하잖아요.”

“오빠, 조심할 테니까 걱정 마요!”

“비도 슬슬 그쳐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

다른 애들까지 이렇게 나오니 더 할 말이 없다.

곧 앞 가수의 리허설 무대가 끝나고 막내 작가가 사인을 보낸다.

“넵튠 올라갈게요!”

“네!”

애들이 빗속으로 걸어나간다.

무대에서 포즈를 잡고 서자 미리 보내 놓은 타이틀곡 MR이 흘러나온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무대를 주시했다. 아까보다는 빗줄기가 약해졌지만, 그래도 노래가 반쯤 지났을 때쯤엔 애들 모두 흠뻑 젖어버렸다. 아슬아슬한 하이힐을 신고, 젖은 무대를 활기차게 누비며 안무를 소화한다.

하지만 광장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다들 비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숨은 상태라, 관심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무대 앞에 있는 카메라들만 애들이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잡고 있을 뿐.

노래가 거의 끝에 다다랐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리허설이 끝나는구나, 하고 안심했을 때.

갑자기 비가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한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이 정도면 몸이 젖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야가 흐려질 정도다. 빗물이 눈에 들어가면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텐데. 그 상태로 어떻게 네 명이 뒤섞여서 춤을 추지…… 하고 생각한 순간.

“……!”

무대 위에서 한 바퀴 돌던 이송하가 휘청하더니 그대로 엎어져 버린다.

심장이 덜컥했다. 당장 뛰어 올라가려고 했는데 이송하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계속 안무를 쫓아가고 있다.

괜찮나? 괜찮은 건가?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추가적인 사고 없이 노래가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애들에게 담요를 하나씩 안기고 천막으로 데려갔다. 들어가자마자 다들 이송하를 둘러싼다.

“송하, 괜찮아? 안 다쳤어?”

“그래, 너 완전히 퍽 넘어지던데.”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이송하가 양쪽 다리를 박력 있게 몇 번 움직이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무대에 안 올리면 항의라도 할 기세다.

“너 지금 흥분해서 모르는 걸 수도 있어. 앉아 봐, 좀 보자.”

아예 의자에 앉혀놓고 발목을 만져 봤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다행히 겉보기엔 멀쩡해 보인다. 좀 세게 붙잡아도 아파하는 기색도 없고. 맨다린데 까진 상처도 없는 것 같고.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눈에 빗물이 들어가서 중심을 못 잡았어요.”

“혹시 아프면 바로 얘기해야 돼.”

“네.”

이송하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상보다 리허설이 늦어져서 본무대에 서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차에서 빗물 때문에 망가진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다시 점검하는 동안, 바깥을 살피러 나갔던 배신자가 들어왔다.

“비 거의 그쳤어, 이제 몇 방울씩 떨어지는 정도야.”

“아…… 다행이네.”

기상청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구나. 지나가긴 지나가네.

밖을 내다보니 확실히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진다. 발라드 가수도 우산 없이 무대에 올라가 공연하고 있다. 저 다음에 다시 스튜디오로 넘어갔다가 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려고 애들을 데리고 내렸을 때.

막내 작가가 기웃기웃 다가온다.

“저기…….”

“아, 작가님. 그래도 비가 그쳐서 다행이네요.”

내 말에 막내 작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

“저, 매니저님. 부조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

“어떡하죠, 아무래도 넵튠 무대는 못할 것 같아요.”

“네?”

“아까 멤버 한 명이 넘어진 것 때문에 부조에서 급하게 결정했나 봐요. 생방송 중에 안전사고 발생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죄송해요. 출연료는 미리 말씀드렸던 것보다 좀 더 넉넉하게 챙겨드릴게요.”

막내 작가의 말을 해석하느라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굳어있는 이송하가 가장 먼저 보였다.

<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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