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이 발아하는 순간 (3) >
김현조가 미간을 좁히며 말한다.
“글빨이 문제가 아니지. 사전제작으로 하지 않는이상 백프로 중간부터 생방으로 찍게 될 텐데, 그걸 버틸 역량이 있느냐가 문제지. 작품 몇 개 한 작가들도 시간에 쫓겨서 쪽대본 쓰기 시작하면 멘탈 흔들린다는데.”
나는 재빨리 다른 정보들을 투척했다.
“작가가 신인이라도 신태균 피디 정도면 충분히 끌고 갈 역량이 있으니까요. 제가 알아봤는데, TVL에서 대본 몇 부 보고 바로 편성 내줬다고 하더라구요. TVL도 작년에 탑스타들 써서 만든 드라마들 시청률 죽쑤고 조기종영한 게 많아서 라인업 신중하게 짰을 텐데, 가능성을 봤으니까 이 작품에 편성 주고, 또 연출력, 흥행력 입증한 신태균 피디 붙여준 거죠.”
설득하는 데 도움될만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없는 시간 쪼개 조사하고, 협찬 알아보는 척하고 TVL 광고사업부랑 판 프로덕션 제작 피디한테 전화문의도 해봤다. 스파이 영화를 한 편 찍었지.
제발 조금이라도 먹혀야 할 텐데.
심장이 쿵쿵대는 걸 느끼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데 김현조가 물었다.
“너 거기서 뭐 받았냐?”
“네?”
“아니지, 다른 배우도 아니고 송하를 달라고 뭘 줬을 리도 없고,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 작품을 밀어?”
3팀장이 각진 턱을 긁적이며 말한다.
“이것저것 알아본 거 보니까 확 꽂혔나 보네. 뭐, 가끔 그럴 때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수상한데…….”
뜨끔해서 헛기침하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3팀장이 이번엔 이송하에게로 시선을 준다.
“송하는 어때,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네. 저는 좋아요.”
아, 살았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는 거랑 오디션 볼 당사자인 이송하가 미는 거랑은 무게가 확 다르지.
연기자들 의견은 무시하고 무조건 회사에서 시키는 작품 하라고 윽박지르는 매니저들도 있지만, 김현조와 3팀장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래? 시놉이 꽤 괜찮나 보네. 그럼 일단 한번 읽어보고.”
“고양이 수호령? 제목이 만화 같네.”
두 사람이 시놉시스를 한 장씩 넘기며 읽는다.
그걸 지켜보는 내 심정은…… 심하게 말아먹은 시험 성적표를 내밀고 엄마의 처분을 기다리던 어느 날의 심정과 아주 유사하다.
3팀장과 김현조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지고 있다.
물론 나도 이해한다. 저 시놉시스를 보고 대박 작품이 탄생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나 말고 확신하는 사람이 또 있으면 그 사람도 미래 예지 능력자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 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시놉시슨데, 작품 초안인데. 좀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만들었으면 좀 좋으냐고. 이젠 판 프로덕션 김판석 대표와 홍주미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펄럭.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김현조가 시놉시스를 덮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김현조가 먼저 침묵을 깨고 물었다.
“형 생각은 어때?”
“어떻긴 뭘 어때. 넌 어떤데?”
“형 생각이 내 생각이겠지, 뭐.”
김현조가 나와 이송하를 번갈아 쳐다본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니들은 이게 왜 좋냐? 다른 공중파 작품들은 오디션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좀 더 가능성 있을 것 같은 작품을 선택한 거야? 그런 이유가 아니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송하 너 이 시놉시스가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
이송하가 물끄러미 김현조를 바라보며 말한다.
“재밌어서.”
김현조가 다시 한숨을 쉰다.
“……내 말은, 이게 왜, 어디가 재밌냐고.”
“정해원이라는 역할이 좋아. 이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고.”
“궁금하면 드라마를 보면 되잖아.”
“아.”
거기서 납득하면 안 되지!
“그래도…… 내가 직접 해보고 싶은데. 오디션을 본다면 난 이 역할이 좋아, 오빠. 저는 이게 좋아요, 팀장님.”
다행히도 이송하가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3팀장까지 쳐다보며 확실하게 의사를 전한다.
나도 대답할 말을 생각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젠장, 아까부터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복댕이, 너는…….”
김현조가 얘기하다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뜬다.
“넌 임마, 감 얘기할 거면 말 꺼내지도 마.”
“감?”
3팀장이 의아해 하자 김현조가 턱짓한다.
“형, 쟤가 감이 안 좋다고 성도원 깠다잖아. 난 이제 니 감은 못 믿겠다.”
“안 그래도 송하 문제 끝나면 그 얘기도 좀 하려고 했는데… 감이 안 좋았다고? 참 보면 볼수록 희한한 놈이네.”
감 얘기는 꺼내지 말걸 그랬나?
나를 안주로 놓고 얘기를 주고받더니, 곧 김현조가 다시 물었다.
“그래, 넌 이 작품에 왜 그렇게 꽂혔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송하한테도 보여준거구요. 감독 전작들도 다 봤는데 분명 실력 있는 연출가고, 시놉시스는 좀 밋밋하지만 대본은 정말 잘빠졌다고 들었어요.”
미래에서 들은 거지만.
홍보팀 직원이 ‘대본이 다 했다.’,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다.’라고 했던 걸 생각해 보면, 대본이 좋다는 정보는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믿어도 되겠지. TVL 드라마국 직원들도 퀄리티 떨어지는 신인 작가 대본에 편성을 주진 않았을 거고.
나도 만약 배우들이 다 했다거나 그 외 다른 복합적인 요인 덕분에 성공했다고 한다면 이송하를 이 작품에 넣는 것을 망설였을 거다.
내가 이송하를 끼워 넣음으로써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대본이 좋아서 성공한 드라마라면, 조연 배역 하나 바뀐다고 성공할 드라마가 실패하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 배우가 작품 퀄리티를 뚝 떨어뜨릴 만큼 엄청난 발연기를 하지만 않는다면.
“그럼 대본을 한 번 보자.”
3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조 니가 대본 좀 받아. 대본 보고 괜찮으면 오디션 알아보자고. 아무래도 마음에 들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배역으로 오디션 보는 게 좋지. 붙을 확률도 더 높을 거고, 붙으면 캐릭터 분석하기도 더 편할 거고.”
“뭐…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송하 너는 다른 작품들 시놉도 다 챙겨 봐.”
김현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쯧, 혀를 찬다.
“근데 이 판 프로덕션 대표라는 사람도 참 답답하네.”
“네?”
답답하다고?
“TVL에서 독립하고 첫 작품 만드는 거라면서. 그럼 TVL에 있을 때 인맥 총동원해서 진행하는 걸 텐데, 왜 리스크를 짊어지고 신인 작가를 써? 증명된 작가 쓰면 안전하고 좋잖아.”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나는 홍주미 작가가 실력 있는 작가라는 걸 아니까 망할 걱정을 거의 안 하고 있는 거라지만, 김판석 대표는 무슨 자신감으로 프로덕션의 앞날을 좌우하게 될 첫 작품에 신인 작가를 기용했을까?
*
“사람들이 나보고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고 있겠지?”
판 프로덕션의 대표. 김판석은 거구의 몸을 작은 철제의자에 끼워 넣은 채로 중얼거렸다. 앞자리에 앉아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제작 피디 박수경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힐끔 시선을 던진다.
김판석 대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냐, 지금은 그래도 딱 첫방 나가 봐. 방송을 보면 아, 김판석이가 저래서 이 중요한 타이밍에 신인 작가를 데려왔구나, 하는 걸 바로 알 거라고. 난하나도 안 불안해. 불안할 이유가 없잖아. 난 홍작가 글빨을 믿으니까.”
“대표님, 안 불안하시면 다리 좀 그만 떠세요. 노트북 흔들려요.”
“뭐?”
안 그래도 위협적인 김판석 대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자 박수경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김판석 대표가 끙, 앓는 소리를 내뱉는다.
“이거 진짜 망하면 안 되는데. 이 작품에 내 인맥 다 털었다. 이거 실패하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잘 되겠지? 대본 좋고, 신태균이 그 자식도 매가리가 없어 보여서 그렇지 실력은 확실하잖아. 어? 잘 되겠지?”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너는 제작 피디라는 놈이 작품에 자신감도 없냐? 걱정은 월급 주는 내가 하는 거고, 너는 잘 될 거라고 확신을 갖고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네. 이번 작품 정말 잘 될 거 같아요. 대박 날 거예요.”
“대박은 무슨, 주연배우 캐스팅부터 안 되고 있는데!”
“…….”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판석 대표의 반도 안될 것 같은 작은 체구의 홍주미 작가, 그리고 머리에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삼십대 후반의 남자, 신태균 감독.
“안녕하세요, 선배.”
“대표님…… 저희 왔어요.”
“어, 신감독. 홍작가. 어서 와.”
김판석 대표가 재빨리 다리를 꼬고 태연히 말했다. 박수경에게도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홍주미 작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저…… 큰 소리가 들리는 거 같던데,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죠?”
“뭐? 대본이 좋은데 문제가 어딨어? 홍작가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앞으로도 대본만 잘 뽑아, 대본만. 다음 편 나왔어?”
“네. 초고는 나왔고, 지금 감독님하고 같이 수정하고 있어요.”
“대본은 다 괜찮은데 캐스팅이 문제죠.”
신감독이 머리를 긁적였다.
“위에서 빨리 확정 지으라고 난리에요. 계속 캐스팅 미뤄지면 편성 엎어질 수도 있어요.”
그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박수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임주원이 갑자기 어그러지는 바람에…….”
“어휴, 다쳤다는데 별수 있나. 김연성한테도 까였고, 박혜민한테도 까였고. 대한민국에 배우가 몇 명인데 우리 주인공 할 애가 없냐? 주연을 빨리 정해야 조연도 섭외하는데…… 급을 조금만, 한 반 단계만 낮춰볼까?”
김판석 대표의 말에 신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GTBN에서 우리랑 동시간대에 붙는 작품, 거기서 김연성 잡았대요.”
“뭐? 그 큰곰 프로덕션 거?!”
“네. 그거 때문에 위에서 우리도 무조건 김연성급으로 캐스팅하라네요. 공중파 3사 작품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경쟁사인 GTBN한테는 밀리면 안 된다고.”
“김연성이 걔는 케이블 종편은 안 한다고 딱 잘라서 거절하더니만 거기로 갔어? 큰곰에서 어떻게 잡았대?”
“회당 출연료 4천. 계약서 도장 찍자마자 선지급해주기로 하고 잡았다던데요.”
“회당 4천에 20부작이면…… 8억 아냐. 그걸 바로 쐈어? 걔들 돈이 그렇게 많아?”
“김연성은 중국에서도 반응 괜찮으니까 해외 판권 수입이랑 이것저것 계산기 두들겨 보고, 8억 정도 먼저 주고서라도 잡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죠.”
“아이고…….”
김판석 대표가 이마를 짚으려다가, 홍주미 작가를 의식하고 헛기침했다.
“괜찮아. 우리는 대본이 좋잖아!”
“저쪽도 대본 좋대요.”
박수경이 중얼거렸다.
회의실 안에 답답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기, 대표님.”
판 프로덕션의 제작부 막내 피디가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왜?”
“전화가 왔는데요.”
“너는 회의 중에…… 어휴, 어딘데?”
“W&U요.”
김판석 대표가 멈칫했다.
“W&U?”
“네.”
“백한성 대표 거기? 성도원이랑, 박소현이랑, 손채영 있는 그 W&U?”
“어, 네. 거기 맞는 것 같은데요.”
김판석 대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 재능이 발아하는 순간 (3)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