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33화 (33/218)

< 언제나 반전이 있다 (3) >

“오빠 인생을 생각하셔야죠! 성도원이랑 우리는 급이 너무 다르잖아요!”

임서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이태희도 보기 드문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저희 신경 쓰지 마시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정말 큰 기회잖아요.”

“맞아요. 원래 배우 담당하고 싶으셨다면서요? 그럼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당연히 성도원 매니저 한다고 하셨어야죠.”

평소 장난기가 많은 편인 엘제이까지 진지하게 거들고 나섰다.

아직 말은 없지만, 이송하도 내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쳐다보고 있고.

그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려니까, 복잡하던 머릿속이 서서히 비워진다.

만약에 내가 미래를 보지 않고, 오로지 내 결정으로 성도원이 아닌 넵튠 애들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인생을 생각해서 결정한 거야. 성도원 매니저 할 생각하니까 좀 감이 안 좋더라고. 그리고 난 니들이 성도원보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

내 진심에 대한 대답은 짧았다.

“미친놈.”

김현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휴, 어차피 이미 저질러서 이제 돌이킬 수도 없어.”

“진짜요?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버스 지나갔어.”

임서영이 가장 먼저 힘없이 주저앉는다. 다른 애들과 김현조도 바닥에 앉았다. 나는 그 뒤로도 복을 내던지고 왔다느니, 이상한 사람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한참 더 들었다.

그리고 겨우 상황이 진정된 후.

“앞으로 연습 더 많이 해야겠다…… 진짜 열심히 할게요.”

임서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애들은 연습을 더 하겠다며 일어나고, 나는 김현조에게 이송하와 레슨 선생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걸 빠짐없이 전달했다. 조심스럽게 손채영 이름도 언급하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까지 한마디씩 보태자 김현조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건 영훈이 형이랑 내가 한 번 알아볼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김현조가 나를 보고 한숨을 푹 쉰다.

“너도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아침 맛있는 거 먹고.”

그래, 내일은 몇 시냐.

“점심까지 먹고 3시에 출근해라.”

“진짜요?”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그래. 어쨌든 휴일에 나와서 큰일 했으니까. 이번 주 스케줄 보고 휴일 하루 더 빼줄게.”

“감사합니다!”

김현조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인사를 하고 기분 좋게 뒤돌았다가 깜짝 놀랐다. 이송하가 코앞에 서 있다.

참,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용건을 꺼내려는데 이송하가 먼저 입을 뗀다.

“저기, 오빠.”

“왜. 배고파?”

“네. 그런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이송하가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어?”

“저한테 계속 신경 써 주셔서요. 너무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송하야.”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라. 두 번째다.

시야에 다시 이십여 년 후의 미래가 보인다.

의아해 하고 있을 틈도 없이 송기자의 질문이 들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셔서 생각난 질문인데, 대표님이 신입이셨을 때 만났던 사람 중에 ‘그 사람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할 만한 사람이라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이건 나도 정말 궁금한 질문이라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미래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동안 박국장이 불쑥 끼어든다.

“이송하씨 아니에요?”

응?

“넵튠에서 노래하고 춤출 때까지만 해도 이송하씨가 뜬금없이 연기로, 그것도 할리우드에서 잘 풀릴지 누가 짐작이나 했나요? 아무리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는 게 연예계라고 하지만, 이송하씨 같은 경우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비가 온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

이건 그거다.

쐐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그런 확신이 쐐기처럼 박혔다.

미래의 내가 씁쓸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지금도 제가 제일 아쉬워하는 부분이에요. 제가 넵튠 매니저를 그만두고 나서,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송하가 연기를 시작했잖아요. 만약 송하가 어릴 때 연기에 재능이 많다는 걸 눈치채고 연기를 권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배우가 돼 있지 않을까…… 그게 항상 아쉬워요.”

“하긴, 이송하씨가 서른 넘어서 연기 시작하셨죠.”

“이제 와서 얘기해봐야 소용 없지만, 사실 제가 처음 송하를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 미래의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나도 이송하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쟤는 가수가 아니라 배우를 해야 되는 앤데.”

다음 순간.

내 앞에는 다시 이송하가 서 있다.

“송하야.”

나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땐 너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널 가르친 레슨 선생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건 확실하게 확인해 볼 테니까, 니가 연기하는 게 싫은 게 아니라면…….”

가방 속에서 늘 가지고 다니는 고양이 수호령의 시놉시스를 꺼냈다.

“이거 한번 읽어볼래?”

그리고.

“네.”

이송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가슴 뻐근한 행복을 느꼈다.

원룸의 작은 창문으로 햇빛이 흘러들어와 얼굴을 간지럽힌다. 베개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럽고. 저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모처럼 월세 낸 보람을 느끼네.

쭉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까 오후 1시다. 내가 어제 새벽 2시 넘어서 잤으니까 엄청 잤구나. 이게 얼마 만이더라. 오랜만에 숙면을 취해서 그런지, 늘 수면부족으로 흐리멍덩하던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뿐하다.

그래. 이거야.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고 출근하는 직장인. 좋잖아.

먼지 앉은 밥통을 보면서 잠깐 고민했다. 밥하기 귀찮다. 그렇다고 배달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결국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리고 냉장고에서 형수님이 챙겨준 밑반찬을 몇 개 꺼내서 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해먹는 건데 상차림이 좀 심심하길래 파를 썰어 넣고 계란찜도 하나 했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숟가락, 젓가락질하면서 노트북을 열고 일과를 시작했다.

일단 포털에 넵튠을 검색해서 새로 올라온 기사들이 있나 제일 먼저 확인한다. 뭐, 오늘도 별거 없다. 넥스트 K스타와 관련된 뉴스에 이름 한 줄 올라온 정도?

포털 연예뉴스란 뿐 아니라 네티즌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커뮤니티 사이트까지 한차례 쭉 돌았다.

다행히 안 좋은 언급은 없다.

사실 언급이 아예 없다.

곧 첫방이 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오겠지.

다음은 겨울 시즌 드라마 라인업.

김칫국 마시는 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고양이 수호령 시놉시스를 받은 날부터 계속 정보를 수집해 오고 있다. 이송하가 고양이 수호령의 배역을 따내게 되면 바로 같이 비교될 작품들 위주로.

공중파 3사에는 타임슬립하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가 제일 기대작으로 꼽히고 있고, 케이블과 종편에도 눈에 띄는 작품들이 몇 개 있다.

새로 올라온 기사들을 훑으려는데 포털 연예란 메인에서 확 띄는 헤드라인들을 발견했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막강 라인업, 손채영 최종 확정]

[초호화 캐스팅! 손채영 합류한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1월 출격]

[기대작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침체기 공중파 미니시리즈 부활시킬까?]

아, 결국 이걸로 결정했구나.

기사에는 손채영이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를 차기작으로 확정했다는 내용, 그리고 원작의 인기와 더불어 초호화 캐스팅을 완료해 기대와 관심을 끌고 있으며, 연이은 시청률 참패로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공중파 미니시리즈 라인을 구해줄 기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내용이 줄줄 써 있다.

하긴 요즘 공중파 미니시리즈들 성적이 암담하긴 하다.

여름 시즌에 시청률 20프로를 넘어간 작품이 하나도 없었고, 12, 13프로만 꾸준히 나와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정도였으니까.

그쪽 관계자들은 모두 대박 작품이 하나 나와서 이 침체기를 끊어주길 바라고 있겠지.

인어공주는 시청률 3프로 찍고 침몰할 테지만.

얼마 전이었다면 바닷속으로 점프하는 손채영이 안타까웠겠지만,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 꺼지라는 말을 들은 건 둘째치고 이송하한테 뭔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는 심증 때문인지 찜찜할 뿐이다.

미래 예지로 본 건 아니지만, 영 감이 안 좋다. 만약 이게 심증만이 아니라 사실인 걸로 밝혀지면 드라마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부족하지.

혀를 차며 댓글창을 열어봤다. 원작이 인기 웹툰인 만큼 대중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기사에 벌써 댓글이 수백 개가 달려있다.

-헐 대박. 손채영? 1월 빨리 와라ㄷㄷㄷㄷ

-으아으아 넘 좋다ㅠㅠ 손채영표 로코는 믿고 봅니다!

-싱크로율이 살짝 아쉬운 건 저뿐인가요?

-너 뿐이에요. 손채영 완전 좋은 카든데 재 뿌리지 마세요.

-이미지는 살짝 에러긴 한데 손채영 연기력이면 커버 가능할 거라고 봄.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원작만 잘 살려도 대박.

아직까지는 긍정적이고 양호한 반응들이다.

다른 기사들도 꼼꼼하게 읽어보고 고양이 수호령도 검색해봤다. 주연배역에 누가 물망에 올랐다, 긍정적으로 검토중이다, 결국 고사했다, 그런 기사들만 몇 개 보인다. 인어공주랑 비교하면 기사도 적고 댓글도 찾아보기 힘들다. 확실히 화제성이 좀 떨어지긴 하네.

심각하게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엄마?”

-그래. 통화할 수 있어?

“어. 괜찮아.”

그러고 보니까 엄마랑 통화한 지 좀 됐구나.

-엄마가 파김치랑 반찬 몇 개랑 생강차랑 이것저것 포장해서 택배 보냈어. 내일 도착할 거니까 퇴근하면 바로 냉장고에 넣으라고. 밖에 오래 두면 안 돼.

“엄마 아버지 드시지 뭘 또 보냈어. 형수님도 반찬 잘 챙겨주시는데.”

-어차피 집에서는 꺼내놔 봤자 잘 먹지도 않아. 생강차 그거, 꿀에다가 절인 거니까 뜨거운 물에 한 잔씩 타 마시고. 감기 안 걸리게.

“어. 잘 먹을게요. 엄마랑 아버지는 어디 아프신 데는 없고?”

-우리야 괜찮지. 넌, 회사 다니는 건 괜찮아? 여기 아는 사람 아들이 방송국 다닌다고 해서 좀 물어봤는데, 연예인 매니저 그거, 고생 많이 한다던데.

“괜찮아, 괜찮아. 나 어제도…….”

엄마가 안심할 만한 얘기를 생각하다가 퍼뜩 뭔가가 떠올랐다.

어제가 너무 다사다난한 하루여서 여유 있게 생각해볼 틈이 없었는데, 분명 백한성 대표가 나한테 차를 뽑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뒤에 본부장이 롤스로이스 얘길 꺼냈었고…… 아냐, 그건 잊자.

어쨌든 성도원 제안 거절한 거랑은 별개인 거 맞지? 맞겠지?

“……엄마, 나 차 생길 거 같아.”

나도 아직 안 믿기지만.

-돈 모으면 전세로 이사부터 하는 게 좋지 않아? 차는 그다음에 사고.

“아니, 내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회사 대표님이 한 대 뽑아준대.”

-뭐?!

하긴, 직접 들은 나도 긴가민가한데 엄마야 어련하겠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걱정과 불신으로 가득하다.

-너 다니는 회사, 더블앤…….

“W&U.”

-멀쩡한 회사 맞아? 이상한 사기꾼들 있는데 아니고?

“멀쩡한 데 맞아. 이 업계에서는 꽤 큰 회사야, 엄마. 내가 엄청 중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했는데 그거 때문에 뽑아준다고 한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상한 거면 안 받지.”

나름대로 설명한다고 했는데, 엄마는 전혀 납득한 분위기가 아니다. 나랑 통화 끝나는 즉시 형이나 형수님한테 전화해서 자세히 좀 알아보라고 할 확률 백 프로다. 이따가 형 집에서도 전화 오겠네.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으니까 항상 의심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다 식은 밥을 마저 먹고 일어나니까 벌써 2시가 다 돼 간다.

이제 이골이 나서 순식간에 출근준비를 끝내고 원룸을 나섰다.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지하철이 한산하다. 역사 안에 있는 머핀 가게에서 한정판 시리즈라고 새로운 메뉴들을 팔고 있길래 몇 개 포장했다. 혼자 늦게 출근하는 거니까 간식이라도 좀 사가야지.

지하철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톡 단체창으로 들어갔다. 내가 오랫동안 확인을 안 하긴 했는지 지난 톡들이 주르륵 올라온다.

가끔 친군지 원순지 헷갈리는 고등학교 동창들.

시도 때도 없이 만나서 놀던 놈들인데 입사한 후에는 모일 때도 한 번도 못 나갔더니, 다들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묻고 있다.

-안 죽었어. 나 군대 재입대했다고 생각하고 한동안 잊어먹고 있어라.

톡을 올리자마자 답이 주르륵 달린다.

이놈들은 일은 안 하고 톡창만 들여다보고 있나.

-군대? 헐, 그 정도로 빡세냐?

-인간적으로 첫 월급 타는 날은 한턱 쏴야 된다. 난 한우 쐈다. 그날 너 얼만큼 처먹었는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

-야, 매니저 일하면 연예인들은 많이 보지 않냐? 나 소개팅 좀.

-나도.

-나도.

이런 미친놈들.

뜨신 밥 먹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남겨 놓고 톡창을 닫았다.

얼마 안 걸려서 회사에 도착했다. 어제 대형 폭풍이 지나갔지만, 오늘의 회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4층에 내려서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라운지에서 얼굴만 아는 실장급 직원 한 명이 인사한다.

“복댕이 왔어?”

“네. 안녕하세요…… 네?”

< 언제나 반전이 있다 (3)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