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4) >
“네?”
“그 날. 확실히 그런 사진을 찍힐만한 상황이 있으셨는지…….”
말을 골라가며 조심스럽게 묻자 성도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사진은 각도 같은 것 때문에 왜곡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이번에도 운 나쁘게 이런 식으로 찍힌 거라고 생각했는데….”
했는데?
“좀 이상하긴 해요. 이 여자랑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던 기억이 없어요.”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도원이 나서준 덕분에 한고비 넘겼다.
그리고 저 반응으로 보아 이 사진이 조작이 맞을 확률도 쭉 올라갔고.
“도원아. 저… 술 마셔서 기억 안 나는 건 아니고?”
“팀장님. 전 절대로 필름 끊길 정도로는 안 마셔요. 실수할까 봐…….”
성도원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저 날은 평소보다 좀 더 풀어지긴 했지만… 기억은 확실해요. 긴급상황인 건 아는데 저 분 말대로 전문가 판독 먼저 맡겨보면 안 될까요?”
확실히 성도원의 발언은 나와는 파급력이 다르다.
저 사람들이 성도원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까보다 사진의 진위 여부를 더 진지하게 따지고 있다.
“이리 줘 봐.”
“네.”
사진을 받아든 백한성 대표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조작이라…….”
곧 그가 사진을 내려놓고 변호사에게 물었다.
“우리한테 시간이 얼마나 있지?”
“별로 없습니다. 저쪽에서는 사진을 살 건지 말 건지 당장 확답을 달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자꾸 시간을 끌면 다른 쪽에 넘겨 버릴지도 모릅니다.”
박팀장도 한숨을 쉬며 끼어든다.
“국내 언론사여도 문제지만 중국 언론사로 넘어가면 아예 손쓸 방법이 없어요. 거기는 할리우드 뺨치게 막장인 동네라서…… 사진이 진짜가 맞으면 뒷일은 수습도 못해요.”
“박팀장.”
“네, 대표님.”
“지금 당장 믿을 수 있는 사진 전문가 몇 명한테 연락해서 사진 판독 의뢰해. 초를 다투는 일이니까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부탁하고.”
지시를 받은 박팀장이 바로 사진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벡한성 대표가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나를 바라본다.
“정선우?”
“네?”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까? 니 생각을 한번 말해봐.”
안심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에 당한 기분이다.
“대표님. 이제 막 일 시작한 신입이 뭘 안다고…….”
“젊은 애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
턱수염 팀장의 말을 끊어버린 백한성 대표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대표 앞에서 면접을 보는 기분이랄까.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어떤 전환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 생각에는…… 사진 판독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거래를 멈추고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거래가 어그러질 수도 있는데. 그 위험을 감수하고?”
“만약 이게 퓨어스타의 수작이라면, 우리 쪽에서 돈으로 입을 막으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언론에 흘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결과적으로 사진이 조작이라는 게 밝혀져도 안 믿는 대중들이 있을거구요. 찔리는 게 있으니까 돈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겠죠.”
미래에서 들었던 박국장의 얘기가 바탕이 됐고, 그 위에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더해졌다.
그리고 나도 놀랄 정도로 술술 흘러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덮으려고 시도했다는 걸 더 괘씸하게 생각하고 비난할 거구요. 지금 성급하게 움직이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진이 진짜고, 퓨어스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럼 큰일나는 거지.
W&U도 큰일 나고, 성도원도 큰일 나고.
나도…… 지금은 이런 최악 중에서도 최악인 경우까진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태풍을, 그것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던 태풍을 맞는 것 보다는 지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간을 벌어서 확실하게 짚고 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할 말은 다 했다.
슬쩍 보니 백한성 대표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인상적이네.”
이건 칭찬인가?
“아… 감사합니다.”
“알았어. 이제 나가 봐.”
“네?”
본부장이 문을 가리킨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이게 뭐야?
나야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나오긴 했지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설득해 보겠다고 애쓰긴 했는데 내 말이 좀 먹혔을까? 설마 거래를 그대로 진행하는 건 아니겠지?
사진 판독 결과가 중요한데. 결과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기사가 터지기 전에 나올까?
“야, 이리 와 봐!”
김현조가 내 팔을 질질 끌고 엘리베이터에 태운다.
“너 걱정돼서 엿듣다가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진짜 사진에 문제 있는 거 맞아? 얼마나 확신하는 거야?”
“저는 꽤 확신하는데요.”
“손모가지 걸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손모가지는 좀.
내가 바로 대답을 안 하자 김현조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네.”
“너 잘리면 내가 다른 회사 소개해줄게.”
그만해, 더 걱정되잖아!
김현조는 다른 일이 있어서 사라지고 나는 4층 사무실로 돌아가 뭔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이 상태로 원룸으로 돌아가 봤자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알아봐야 할 일도 있고.
이송하에게 막말을 한 레슨 선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야지.
내 감으로는 분명 여기에도 뭔가가 있다.
만약 레슨 선생이 다른 꿍꿍이나 악의가 있어서 이송하를 깎아내리고 연기력을 비하한 거라면, 그 사실을 알려주면 이송하를 설득할 수 있겠지. 아까 반응으로 봐서는 연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고양이 수호령 시놉시스를 보여주고 오디션을…….
-연결이 되지 않아…….
젠장,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레슨 선생한테 연락 달라는 문자를 남겨놓고 다음 주 넵튠의 스케줄을 정리했다. 틈틈이 포털에 성도원의 이름을 검색해보면서. 혹시 성도원의 기사가 뜰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이제는 뭘 더 하려고 해도 할 일이 없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창밖에는 달이 떠 있다.
황금 같은 휴일이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목이 텁텁해서 라운지로 나갔다.
자판기 앞에서 뭘 마실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쪽 자리에 앉은 여직원들의 소곤대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야. 이거 성도원 아니야?”
“뭐가?”
“조금 전에 올라온 기산데, 청정 이미지를 어필해 온 탑스타 A… 최근 영화 두 편에서 각각 천만, 6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티켓파워를 입증한… 이거 읽어봐. 누가 봐도 성도원인데? 홍보팀은 이거 알고 있나?”
나는 자판기에서 굴러떨어지는 음료수도 버리고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연예기사란이 떠있는 화면을 새로고침해 봤는데 아직 성도원의 이름이 헤드라인에 뜬 기사는 없다. 포털의 인기검색어나 성도원 연관검색어도 괜찮고.
하지만 여직원이 말한대로 탑스타 A로 검색하니까 바로 기사가 나온다.
[청정 이미지를 어필해 온 탑스타 A, 초대형 스캔들 휘말리나?]
헤드라인을 클릭하자 뉴스777이라는 생소한 언론사 사이트가 뜬다.
바이라인에는 기자의 이름도 없다. 연예부 메일주소만 한 줄 적혀 있을 뿐.
침을 삼키고 스크롤을 내렸다.
최근 영화 두 편에서 각각 천만, 6백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티켓파워를 입증한 20대 한류스타 A가 유부녀와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소문이 돌아 연예계 관계자들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A가 깨끗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로 어필해 온 만큼, 사실로 밝혀지면 연예계에 큰 파문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진짜 누가 봐도 성도원이다.
청정한 이미지, 노골적인 관객 동원수, 20대 한류스타.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많잖아. 연예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차리겠는데…….
한 연예 관계자는 “A는 자기관리에 투철한 배우”라며. “지금까지 열애설 한 번 난 적 없는 것도 은밀한 곳에서 충분히 즐기고 밖에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이번 스캔들에 대해 최근 A와 결별한 전 소속사 관계자는 “말도 안 된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한 언론사가 증거사진을 쥐고 있고, A의 현 소속사와 거래를 진행 중이라는 구체적인 소문이 퍼지면서 스캔들의 진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그것도 모든 정황이 한꺼번에 터져 버릴 줄이야.
대강 적은 찌라시도 아니고 내용이 엄청 구체적이다. 증거사진에 거래 얘기까지 언급한 걸 보면 이 일을 훤히 아는 사람이 쓴 게 분명하고.
게다가 이건 또 뭐야?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퓨어스타 관계자가 이렇게 인터뷰했다고?
혹시 이 기사, 아예 퓨어스타에서 손을 써서 내보낸 건가?
댓글창을 열어보니 벌써 주르륵 달려있다.
-헐? 빼박 성도원.
-이렇게 사람 대놓고 저격할 거면 연예 관계자가 누군지도 까던가.
-성도원은 언제 한번 터질 줄 알았다. 나도 지인한테 들은 건데 얘 엄청 지저분하게 논다던데.
-캡처했습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 먹을 준비나 하세요.
-성도원 깨끗한 이미지로 먹고 살았는데 훅 가겠네ㅋㅋㅋㅋㅋㅋ
더 검색해보니 벌써 성도원의 실명이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다. 기사도 하나 더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예 탑스타 S라고 이니셜을 붙인 기사다.
이 속도면 금방 실명으로 기사가 뜨겠지.
SNS에도 금방 퍼질 거고,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갈 거고. 그렇게 되면 고정된 미래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도원 이미지가 바닥을 칠 거고…… 다 끝났구나.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엎드렸다.
답답하고 허탈해서.
내 개입으로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증거사진 판독이 끝나고 조작 사실이 증명되면 W&U에서 반격을 시작할 테지만, 만약 송기자 말이 사실이라면?
이 일이 성도원의 연기자 인생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거라면 뒤늦게 반격해 봤자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물인 거잖아.
성도원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기사는 봤겠지?
지금까지 노력해서 쌓아올린 것들이,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아까 낮에 봤을 때도 얼굴이 사색이었는데 지금은 제정신이기나 할까?
성도원을 생각하니 미래를 알면서도 바꾸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나?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았을까?
“하아, 사진 판독 결과만 일찍 나왔어도…….”
그게 너무 아쉽다.
결과가 빨리 나왔으면 그대로 상황 종료였을 텐데.
물론 전문가들도 농땡이를 피우진 않았겠지. 신중하게 살펴보느라 늦는 거겠지만…….
“다행이네. 아직 퇴근 안 했구나?”
“……!”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박팀장이 바로 뒤에 있다.
아니,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 아닌가? 이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아직 모르나?!
“팀장님! 지금 인터넷에 성도원 씨 기사…!”
“알아, 내가 홍보팀 팀장인데 그럴 모르겠어?”
그런데 왜 이렇게 느긋해?
“지금까지 위에서 보도자료 작성하고 왔어.”
“네?”
“지금 올라오고 있는 기사들은 다른 직원들이 연락해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리라고 협박하고 있고, 몇 분 안에 언론사에 보도자료 발송할 거야. 그럼 지금 기사 쓰고 있는 기자들도 그거 엎고 보도자료 참고해서 해프닝 기사로 바꿀 거고.”
어안이 벙벙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끝난 게 아니라는 건가?
오히려 잘 해결되고 있다는 말인가?
박팀장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린다.
“일단 대형사고는 막았으니까 자기한테 상황 알려주고, 고맙다는 얘기도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잠깐 내려온 거야. 오늘 정말 큰일 했어. 자기 아니었으면 그 사진이 진짠 줄 알고 벌써 그놈들하고 거래했을지도 몰라. 하하, 농담 삼아 복덩이라고 불렀는데 진짜 복덩이였네!”
잠깐! 잠깐만!
“혹시 사진 판독 결과가…….”
“조작된 거 맞대. 전문가 3명한테 의뢰했는데 만장일치야.”
< 폭풍전야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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