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3) >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렸다. 사건이 터져서 그런 건지, 여긴 아래층하고는 공기부터 다른 것 같다. 숨소리도 크게 내면 안될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대표실 앞에 낯익은 사람들이 보인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인지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홍보팀 박팀장, 그 옆에 머리 벗겨진 남자는 매니지먼트사업본부장.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건 저번에 봤던 성도원 매니저다.
그럼 성도원도 이미 도착한 건가?
“야. 너는…….”
본부장이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쉰다.
“대체 배우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사달을 내?”
“죄, 죄송합니다. 그날 도원 형이 따라오지 말고 먼저 들어가라고 해서…….”
“그래서 애를 그런데 보내 놓고 넌 그냥 들어갔어?!”
“친한 지인 몇 명만 모이는 프라이빗 파티라고 해서… 저, 전 정말 그런 파티인 줄 몰랐….”
성도원 매니저는 이 상황이 감당이 안 되는지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얼굴은 아까부터 사색이 다 돼 있고.
“본부장님. 박팀장님.”
“어?”
우리가 다가가자 본부장이 깜짝 놀란다.
“여긴 왜 올라왔어? 뒤에 걔는 또 왜 데려왔고? 아예 동네방네 소문 다 내려고 그래?”
“그게 아니라…….”
김현조가 내가 했던 얘기를 전달하자 본부장의 눈빛이 달라진다.
“퓨어스타 엔터에 있는 놈이라고?”
“네.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퓨어스타…….”
잠시 생각하던 본부장이 박팀장을 보며 묻는다.
“이거 찜찜하지?”
“엄청 찜찜하죠. 본부장님도 아시잖아요. 그 회사가 좀…….”
“잠깐만 기다려봐.”
본부장이 대표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빠르게 열렸다가 닫히는 문 사이로 몇 명의 얼굴이 보였다.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턱수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백한성 대표.
그리고 성도원.
항상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를 띄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돌처럼 굳어 있다.
“하아…….”
본부장이 닫힌 문 안으로 사라지자 성도원 매니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는다.
이쪽도 저쪽도 쓰러지기 직전처럼 보인다.
“안에 법무팀 들어가 있는 것 같던데… 고소한대요?”
김현조가 묻자 박팀장이 고개를 젓는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미래에서도 W&U가 처음에 익명의 남자를 고소했다는 얘긴 없었지.
왜지?
아무리 성도원이 한국에서 공인 취급받는 연예인이라지만, 도촬에 사생활침해, 거기다가 공갈협박까지 더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범법 행위 아닌가? 할리우드에서는 실제로 파파라치 고소하는 일도 많던데. 아예 일 커지기 전에 고소해서 넘겨버리면…….
“고소하면 여기저기서 냄새 맡고 달려들 텐데, 우리는 이 얘기 흘러나가면 잃을 게 너무 많잖아요.”
“그럼….”
“돈 주고 입 막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게 제일 깔끔할 수도 있어요.”
아, 이래서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된 거구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나고. 마침내 대표실 문이 움직였다.
그리고 본부장이 내게 손짓한다.
“정선우.”
“네?”
“대표님이 직접 듣고 싶다고 하시니까… 일단 들어와 봐.”
눈 앞에서 대표실 문이 활짝 열린다.
“긴장할 거 없어. 니가 들은 대로만 얘기해.”
김현조가 내 등을 툭툭 치며 속삭인다.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모든 일이 잘 끝났을 때 내가 얻게 될 이익, 회사의 인정, 연봉상승, 보너스, 그런 것들부터,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잘 안 풀렸을 때 얻어먹을 욕과 불이익까지.
어쨌든 문은 열렸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탁.
뒤따라 들어온 박팀장이 문을 닫는다.
고개를 들자 대표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정말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다. 특히 성도원과 턱수염은 눈빛으로 나를 꿰뚫을 기세다.
“매니지먼트 3팀 정선웁니다.”
나는 태연한 척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물론 속은 전혀 태연하지 않다.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도 이 자리에 서면, 게다가 나처럼 찔리는 것까지 있는 상황이라면 심장이 얼어붙을걸?
정말 다행인 건 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봤다는 거다.
이 사건의 시발점이자 해결의 열쇠인 증거사진.
내가 보는 걸 알아챈 턱수염이 뒤집어 버리긴 했지만, 이미 꼼꼼하게 다 살펴본 뒤였다.
미래 예지 능력이 생긴 이후로 순간 관찰력이 엄청나게 좋아졌거든.
성도원과 얼굴이 모자이크로 가려진 여자가 같이 찍혀 있었고, 충분히 안 좋게 보일 만 한 구도와 배경이었지.
“퓨어스타 엔터 매니저가 뭐라고 했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백한성 대표의 태도는 감탄할 만큼 침착하다.
나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W&U에서 그딴 식으로 일 가르쳤냐고 하더니, 상도덕도 없는 놈들, 한번 된통 당해보면 정신이 들 거라고 했습니다.”
아까 김현조한테 했던 말에 조금 더 보탰다.
거짓말도 하면 는다더니, 술술 잘도 나온다.
“더 확실하게 언급한 건 없고?”
“네. 단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백한성 대표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턱수염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상한 낌새가 있었으면 그때 바로 보고를 했어야지. 도원이가 퓨어스타 재계약 뿌리치고 온 거라 거기랑 우리랑 관계 안 좋은 거 몰랐어?”
“그 매니저가 질도 안 좋고, 다른 회사 매니저들 협박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때는 저한테 겁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성도원씨한테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긴거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냐.”
본부장이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일이 터졌으니까 그렇지,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만 했구만.”
“뭐 하여튼… 퓨어스타는 이런 짓 하고도 남을 놈들이긴 해요. 거기 순 양아치 새끼들뿐이라서.”
“심증뿐이지 확실한 게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그리고 거기서 우리 물 먹이려고 판을 만든 거면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겠어? 증거사진 있으니까 그거 그냥 까버리면 되는 건데… 사진 보낸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박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트루 미디어라고 작은 인터넷 신문산데, 검색해 봐도 어뷰징 기사 말고는 나오는 것도 없어요. 사진 원주인 신원은 절대 말해줄 수 없대요. 제보자 보호 차원에서.”
턱수염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끼어든다.
“제보자는 무슨, 파파라치 새끼지. 이 변호사. 고소하겠다고 겁 좀 줘보면 어때?”
“내용증명 보내겠다고 했더니 코웃음 치더라고. 고소해 봤자 우리 손해라는 거지. 이거 터지면 도원 씨 이미지 추락할 거 뻔하고, 도덕성 문제라서 도원 씨가 광고 모델로 있는 회사들, 그쪽에서 위약금 조항 걸고넘어지면 수십 억 물어줘야 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대놓고 우리한테 입막음 값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게 아니라 사진을 팔겠다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우리가 안 사면 중국 언론사에 팔겠다고. 이 바닥 훤한 놈들이에요.”
어라?
박국장은 익명의 남자가 거액을 요구하면서 일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설마…… 뭔가 바뀐 건 아니겠지?
잠깐. 혹시 그런 건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W&U 입맛에 맞게 고쳐진 얘기가 사실로 알려진 걸지도 모르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처음부터 거액을 뜯어내려고 접근했다고 하면 성도원이랑 W&U가 더 피해자처럼 보이잖아.
내 예상이 맞아야 되는데… 지금 이 타이밍에 뭔가 바뀌어버리면 큰일 난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미쳤었나 봐요.”
성도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런데 끼는 게 아니었는데…….”
“아냐, 아냐. 니 나이에는 그런 거 궁금할 수도 있지.”
턱수염이 위로했지만 성도원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돈거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약이나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마음 맞는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술 마시고 놀다가 같이 잘 수도 있지. 그렇게 노는 애들은 많아.”
“…….”
“그런데 하필 왜 거기 유부녀가…… 사진을 찍혀도 꼭….”
그 말에 성도원이 주먹을 꽉 쥔다.
“사진이 저렇게 찍힌 거지, 정말 저 여자한테는 손도 안 댔어요.”
“그래. 우린 믿어. 믿는데…….”
“얼굴도 잘 기억 안 나요. 유부녀라는 것도 전혀 몰랐어요. 저는 진짜…!”
“사진이 저렇게 찍힌 게 중요한 거야.”
백한성 대표가 성도원의 말을 끊었다. 억울한 사정을 토로하던 성도원이 입술을 깨문다.
“섹스파티에서 놀긴 했는데 유부녀와는 안 잤다. 그렇게 인터뷰라도 할 거야?”
“그…… 하아.”
“이 일이 퓨어스타랑 관련 있는지는 내가 알아볼 테니까, 그동안 얘기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틀어막고 있어. 퓨어스타랑 상관없는 파파라치면 그냥 돈 쥐여주고 덮어버리고. 만약에 퓨어스타가 관련 있으면…….”
백한성 대표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사실 아까 사진 얘기가 나왔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조작사진이라는 걸 백 프로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순간적으로 혀가 굳어버렸다.
하지만 나설 거라면 더 늦기 전에 나서야 한다.
……그래도 몰빵하지 말고 수습할 여지는 남겨놓자.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가장 말하기 편한 박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어?”
박팀장이 ‘아 참. 너도 여기 있었지.’라는 표정으로 날 본다.
“아까 잠깐 사진을 봤는데요.”
“그것도 봤어? 자기 꼭 입조심… 아냐, 이건 나가서 얘기하자.”
“그런데 그 사진, 제 생각엔 조작한 것 같던데요.”
“뭐? 조작?”
또다. 처음 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모두 이 쪽을 돌아본다.
여기서 망설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자기 지금 이거 심각한 문제야.”
“그래서 저도 계속 고민하다가 팀장님한테 말씀드리는 거예요.”
“진짜 조작한 것처럼 보였어?”
“네. 아까 성도원 씨가 ‘사진이 그렇게 찍혔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예 합성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더라구요. 일을 진행하기 전에 전문가한테 사진 판독을 맡겨보는 게….”
“무슨 헛소리야?!”
턱수염이 뒤집어뒀던 사진을 들고 뚫어지도록 본다.
“너 그냥 막 던지는 거 아냐?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이제 낄 데 안 낄 데 구분도 못 하고…… 이게 어디가 합성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미래의 박국장도 성도원 측이 조작 사실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고 했고, 그리고 보자마자 합성인 걸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허술한 작품이었으면 퓨어스타가 이런 일을 꾸미지도 않았겠지.
“조작된 티는 전혀 안 나는데? 설마 모자이크 말하는 건 아니지?”
“도원 씨가 파티에 간 건 확실하다며. 그런데 무슨 합성이야.”
“전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요?”
박팀장과 본부장, 변호사들, 성도원까지 사진을 둘러싸고 웅성거린다.
그리고 백한성 대표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선우!”
본부장이 또 나를 부른다.
“너 혹시 사진이나 뭐 그런 쪽 공부했어?”
“공부한 건 아니고, 컴퓨터 그래픽에 관심이 좀 있었습니다.”
관심은 있었다. 아는 게 없을 뿐.
할리우드 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보다 보면 컴퓨터 그래픽 작업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걸 관심 있게 본 정도라서. 신기하니까.
턱수염이 다시 나를 노려본다.
“너 진짜 뭘 알고 말하는 거 맞아? 이거 수십 억이 왔다 갔다 하는 대형사고야. 나중에 죄송합니다, 착각했어요, 이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고.”
본부장도 심각한 표정으로 손짓한다.
“이리 와서 제대로 설명해봐, 진짜 조작인 거 같아? 어떤 부분이?”
“그게 느낌적인 부분이라서 정확하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뭐?”
“전체적으로 보시면 뭔가 어색하잖아요.”
“어색하다고?”
사람들이 매직아이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사진에 달라붙었다.
“음…….”
“그래도 모르겠는데….”
그 사이에 나는 미리 생각해 뒀던 대로 한 사람을 끌어들였다.
저 사진이 조작인 것처럼 보인다는 내 말을 가장 믿고 싶을 사람.
“저… 성도원 씨. 혹시 미심쩍은 부분 없으세요?”
< 폭풍전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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